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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우연, 아니면 인연 (21/101)

#21. 우연, 아니면 인연2021.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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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028425383.jpg‘안 갈 거니까……. 나린 씨가 나 좀 잡아줄래요?’

  나린의 눈빛이 세차게 굽이친다. 순간,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했다.

16558028425383.jpg“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언젠가 세훈이가 말한 것처럼 지아는 보내줘야 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노력해 보려고요. 그 애에게 휘둘리지 않도록.”

16558028425394.jpg“…….”

16558028425383.jpg“나린 씨가 도와주면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슬픈 듯 다정한 듯 모호한 미소로 물든 태준과 달리 나린의 얼굴은 빳빳이 굳어졌다.

16558028425394.jpg“……어떻게 도와드리면 되는데요?”

나린은 안개 속처럼 잡히지 않는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물었다.

16558028425383.jpg“그냥……. 이렇게 만나는 거 참 좋아요. 나린 씨랑 있으면 편하고 즐겁거든요.”

웃고는 있지만 왠지 모르게 무기력함이 묻어나는 얼굴. 태준의 속내가 더더욱 미궁으로 빠져든다.

16558028425383.jpg“나린 씨는 안 그래요?”

16558028425394.jpg“……글쎄요.”

나린이 확답을 피하자 태준이 말을 이었다.

16558028425383.jpg“난 원래 사람 만나는 거 잘 못 해요. 낯을 많이 가리거든요. 어릴 때부터 고치려고 노력한 덕에 겉으론 괜찮아 보여도, 속으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에요.”

16558028425394.jpg“…….”

16558028425383.jpg“근데 나린 씨랑 이렇게 만나는 건 괜찮아요. 오랜 친구 같은 익숙함이 느껴진달까.”

나린은 그제야 경계심을 풀었다. 친구. 그 단어가 뭐라고. 다행이다. 친구 같은 감정이라서. 이 평화를 계속 유지할 수 있어서.

16558028425394.jpg‘다현 언니 때문이 아니겠어요?’

되묻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음식과 함께 집어삼키고,

16558028425394.jpg“이만 일어날까요?”

디저트 접시가 바닥을 보일 때쯤 성마르게 말한다.

16558028425383.jpg“그러죠.”

딱딱한 표정이 된 태준이 용케 미소를 그려 답하였다. *** 방에 돌아온 나린은 침대 위로 몸을 쓰러뜨렸다.

16558028425383.jpg‘나 좀 잡아줄래요?’

  태준이 했던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를 맴도는 중이었다.

16558028425394.jpg‘설마 아니겠지. 며칠 전에도 지아 씨랑 만났던 사람인데.’

그래도 혹시나 싶어 한숨이 절로 샜다. 나린은 지금 태준과의 만남이 꼭 필요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언제 윤재오와의 선 자리에 끌려나가게 될지 몰랐으니까. 이 연극이, 진짜 연극이 맞아야 하는데.

16558028425394.jpg‘괜찮을 거야. 태준 씨가 먼저 친구라고 못 박았잖아.’

사서 하는 걱정은 이만 멈추기로 하고 기운을 그러모아 침대에서 일어난다. 휴일 근무라도 한 듯 몹시도 피곤한 하루였다. *** 나린이 싱가포르로 출장을 떠나는 아침. 여유롭게 공항에 도착한 나린은 면세품을 찾고 비즈니스 라운지로 향했다. 언젠가 가봐야지 했던 곳인데 세훈의 꿀팁 덕에 이르게 기회를 잡게 되었다. 핑거푸드 위주로 접시를 채워와 요기하면서 수령한 면세품들을 검수했다. 저 멀리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나린을 발견한 그는 며칠 새 반복된 우연이 재미있다는 듯 기분 나쁜 미소를 흘렸다. 오늘따라 VIP 라운지에 가는 게 귀찮아서 가까운 데로 온 건데, 이런 행운을 만나다니.

16558028443041.jpg“왜 그러십니까, 전무님?”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출장 수행원 박 상무가 따라서 몸을 일으킨다.

16558028443041.jpg“앉아 있어요. 아는 사람을 봐서.”

일행을 물리친 그는 뚜벅뚜벅 나린에게로 향했다. 끼이익. 거칠게 의자를 잡아끄는 소리에 나린이 고개를 들었다. 무단으로 앞자리를 점거한 남자, 윤재오의 얼굴을 확인한 나린은 황당해서 멍하니 입을 벌렸다. 뭐지? 왜 또 이 사람이지? 이 사람도 비즈니스를 타나? 재벌이면 더 좋은 좌석에 타야 하는 거 아냐?

16558028443041.jpg“안녕하세요. 또 보네요?”

언제 보아도 능글맞기 이를 데 없는 저 웃음.

16558028425394.jpg“네. 안녕하세요.”

나린이 불안한 눈으로 예의주시하는데, 재오가 테이블 위에 놓인 나린의 여권을 멋대로 집어 들었다. 노린 건 여권 안에 끼워진 비행기 티켓이었다.

16558028443041.jpg“흠. 싱가포르 가네요?”

그는 좌석 번호를 확인하며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였다.

16558028425394.jpg“주세요.”

단호히 말하자 재오는 순순히 여권을 돌려주었다. 나린은 더 상대하기 싫다는 듯 백팩을 정리하는 척했다. 그 모습을 본 재오의 눈에 치기가 어렸다. 누가 연다현 동생 아니랄까 봐 무시한다, 이거지.

16558028443041.jpg“여행 가요?”

나린은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노골적으로 상대하기 싫은 티를 내는데도 꿋꿋이 말을 걸어오다니, 여간 뻔뻔한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16558028425394.jpg“아뇨. 출장요.”

16558028443041.jpg“출장? 아, 테라 호텔?”

아직 모르나 보다. 그녀가 도일 전자 일개 대리인걸. 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모르는 신상 정보를 굳이 나서서 제공할 필요는 없으니까.

16558028443041.jpg“나도 출장 가는데.”

나린의 무응답에도 그는 질기게 대화를 연결했다.

16558028443041.jpg“요새 항공기들 퍼스트 클래스 없애서 별로지 않아요? 웬만하면 기종 골라서 타는데 이번엔 시간이 안 맞아서. 나린 씨도 그래서 이거 타고 가는 거죠?”

아닌데요. 난 비즈니스석으로도 충분한데요. 잊으셨나 봐요.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인걸.

16558028443041.jpg“에이. 웬만하면 대답 좀 해주지.”

껌처럼 끈적끈적 눌어붙는 재오가 성가신 나린은 아예 자리를 뜨기로 했다.

16558028425394.jpg“죄송하지만 자료를 찾을 게 좀 있어서요.”

재오는 PC석으로 이동하는 나린을 빤히 주시하다가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박 상무의 비행기 티켓을 확인한 그는 또 한 번의 기묘한 우연에 짝, 박수를 쳤다. 혹시나 싶어서 본 건데 이런 행운이.

16558028443041.jpg“자리 바꾸죠.”

싱글벙글한 얼굴이 된 재오가 박 상무에게 비행기 티켓을 돌려주며 말했다.

16558028443041.jpg“예?”

16558028443041.jpg“왜 말귀를 한 번에 못 알아들어요. 비행기 좌석, 바꿔 앉자고요.”

혼자 앉는 자리를 굳이 2인석이랑 바꾸시겠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윤재오 전무님이? 귀하디귀하신 회장님 손자분께서 뭘 잘못 잡순 게 아닌지 걱정이 돼서, 박 상무의 낯빛이 흙색이 되었다. *** 이 정도로 자주 맞닥뜨리면 인연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비행기에 오른 나린은 옆 좌석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그를 보고 기가 막혔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흔든다. 아냐, 인연은 무슨.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다 봤잖아. 강나린, 아니, 연나린! 정신 차려. 인연일 리 없어. 우연이야, 악연 같은 우연!

16558028443041.jpg“또 보네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재오는 들뜬 톤으로 말을 걸었다.

16558028425394.jpg“네, 그렇네요.”

무성의하게 대꾸한 나린은 백팩을 짐칸에 밀어 넣고 떨떠름한 얼굴이 되어 자리에 앉았다. 나린이 좌석 지정을 하려 했을 때 창가 1인석은 벌써 만석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가운데 열 2인석 중 하나를 선택했는데 이 정도로 짝꿍 운이 없을지 몰랐다. 재오의 출장을 수행하기로 되어 있는 박 상무가 하필 나린의 옆자리였던 것이다. 웰컴 드링크가 서비스 되고,

16558028443041.jpg“면세품은 뭐 샀어요?”

나린의 철저한 무관심에도 재오는 끈덕지게 말을 걸어왔다.

16558028425394.jpg“……화장품요.”

16558028443041.jpg“가는 길에 심심하진 않겠다. 우리 얘기 많이 해요.”

16558028425394.jpg“전 좀 피곤해서 자려고요.”

16558028443041.jpg“지금 바로 잘 거예요? 그건 아닐 거 아니에요.”

16558028425394.jpg“…….”

16558028443041.jpg“나랑 말하는 거 싫어요?”

16558028425394.jpg“……그냥……. 조용한 게 좋아서요.”

16558028443041.jpg“에이. 그래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참에 친해지면 좋잖아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면서도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뜻을 최대한 피력해 보았으나 이 남자에게는 하나도 통하질 않는다. 저 악당을 어떻게 퇴치해야 하나. 나린의 고민이 짙어지는데, 머리 위로 쏙 익숙한 얼굴이 내밀어졌다.

16558028507783.jpg“자리 바꿔.”

호칭도, 인사도 없이 용건만 간단히를 실천한 그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건조한 눈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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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또 무슨 상황인가 싶어서 나린은 그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분명 장기 출장 중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도윤완 부사장이 왜. 이것도 우연인가. 아니면……. 인연……?

16558028507783.jpg“뭐 해. 내가 일으켜줘?”

명령조에 반응한 나린이 스르르 일어서고, 윤완은 나린의 팔을 잡아끌어 두 칸 앞 창가 자리에 앉혔다. 그런 뒤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 짐칸에 있는 백팩도 옮겨준다. 그렇게 재오로부터 나린을 격리시킨 윤완은 홀가분한 표정이 되어 재오의 옆자리로 왔다.

16558028443041.jpg“와. 이건 전혀 예상 못 한 전개인데?”

안전벨트를 채우는 윤완을 보며 재오가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윤완의 귀에 다 들리도록 아주 커다랗게.

16558028507783.jpg“누가 할 소리. 그러니까 조용히 가자.”

윤완은 재오를 외면하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재오의 호기심은 있는 대로 헤집어진 후였다.

16558028443041.jpg‘도윤완이 자리를 바꿔줬어? 저, 테라 호텔 손녀를 위해서?’

아니, 왜? 남 일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는, 고고하기 그지없으신 도윤완 부사장님께서 대체 왜?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신혜원은 알려나, 이 사태를. 알면 얼마나 자존심 상할까. 이러나저러나 재밌을 일이었다. 나린에게 치근덕거려 윤완을 자극하는 것도, 혜원에게 이 사실을 흘려 윤완을 귀찮게 만드는 것도. 도윤완을 알게 된 지도 어언 20년. 이건 처음으로 발견한 그의 약점 비스름한 것이었다. 완전 행운 맞네. 재오는 나린이 앉아 있는 쪽을 향해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 나린은 방금 벌어진 상황에 대해 차근히 곱씹어 보았다. 그러니까…… 구해준 거지? 도윤완 부사장님이……. 윤재오, 그 사람이 날 귀찮게 하는 거 알고, 자기 자리를 내어주면서까지……? 머릿속이 복작복작 어질러졌다. 이것도 다현 언니가 받았어야 할 친절을 대신 받은 것일까. 어디까지가 자신을 위한 거고 어디까지가 다현 덕분인지 그 경계가 헷갈린다. 힐끔 윤완을 일견하자 그는 눈을 감고 있었다. 시선이 옆으로 이동하면서 재오와 딱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나린은 재빨리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16558028425394.jpg‘저 사람하고는 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나린의 이마가 한껏 우그러졌다. *** 또 졌다. 충동에. 눈을 감은 얼굴이 평온해 보이는 것과 달리 윤완의 속내는 아우성으로 가득했다. 또 져서 나서고 말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알면서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독사 같은 녀석과 나린을 한시라도 빨리 떼어 놓지 않고서는. 그러니 자리를 바꾼 것에 후회는 없다. 비록 비행 내내 상대하기 싫은 놈 옆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벌칙이 붙었지만, 그게 나린 대신이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그룹 행사 때문에 잠시 귀국했던 윤완은 일정대로 다시 출장을 떠나는 길이었다. 그런데 비행기 안에서 운 좋게 나린을 맞닥뜨렸다. 출장 기간 내내 보고 싶어 했던 걸 신에게 들키기라도 한 듯. 마치 신이 주신 선물인 것처럼. 하지만 이 선물에 윤재오가 껴 있다는 건 지독하고도 유일한 오점이었다.

16558028507783.jpg‘아까 VIP 라운지에서 못 봤는데. 어디 있었던 거지?’

그가 보지 못한 곳에서부터 재오가 나린에게 접근한 건 아닐까 생각하자 속이 아파 온다. 연나린도 싱가포르에 가는 줄 알았으면 같이 가자고 할걸. 틈을 벌린 윤완의 눈이 나린이 앉은 자리, 헤드레스트 위로 볼록 솟아 있는 둥근 머리꼭지에 안착했다.

16558028507783.jpg‘싱가포르엔 왜 가는 거지. 휴가인가.’

이렇게 예외가 많은 여자는 처음. 타인의 일은 별로 궁금해해 본 적이 없었는데, 왜 저 애에 대해서만큼은 늘……. 자신이 모르는 출국 일정조차 불안하고 초조할 만큼. 윤완의 한쪽 눈썹이 굴곡을 그렸다. 매출 성장, 이익률 개선, 신사업 개발, ROI 좋은 투자. 수치적 보상이 주어지는 것 말고는 욕망이란 걸 가져본 적 없는 그가 아무런 이득이 주어지지 않는 대상에 욕망을 품게 됐다. 그 욕망은 너무 간단해서 허망할 정도였다. 원할 땐 언제든 불러내고 싶고……. 그래서 얼굴을 보고 싶고, 또 목소리를 듣고 싶고. 그래, 아직은 여기까지. 다행히도 아직은. 지금도 할 수만 있다면 바로 얼굴이 보이는 곳에 나린을 데려다 놓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윤재오와 나린의 자리를 바꿔 놓고 싶었다. 윤완의 눈이 애달프게 나린이 있는 곳을 두드려댔다. 나린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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