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잡아줄래요?2021.08.06.
윤완으로부터 받은 케이크를 두고 나린은 고민에 빠졌다. 키친으로 들어온 미옥이 케이크 상자 안을 들여다보며 감탄한다.
“아이고. 예쁘기도 해라. 웬 케이크예요?”
“선물 받았어요.”
나린은 민망한지 관자놀이께를 긁적였다.
“이태준 전무님한테요?”
“아, 아뇨.”
그럼 누구에게 받았을까. 궁금했지만 미옥은 가만히 두 손바닥만 펼쳐 보였다.
“주세요. 냉장고에 넣어둘게요.”
“아, 그게…….”
“왜 그러세요?”
그래. 그래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인데. 나린은 마음을 정했다. 용기를 내보는 방향으로.
“저…… 어른들 좀 거실로 불러주실 수 있으세요?”
*** 연태용 회장이 상석에 자리를 잡고 곧이어 연주환 부회장과 채윤희 여사도 나왔다. 부부동반 외식만으로도 심히 고단했던 주환은 짜증이 올라왔지만 연 회장의 눈치를 봐서 두말없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린은 기다란 초를 꽂은 케이크를 들고나와 거실 테이블 위에 반듯이 올려놓았다.
“그래도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인데 그냥 넘기기 아쉬워서요. 같이 촛불이라도 불면 어떨까 하고…….”
나린의 조심스런 제안에 연태용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래. 우리 나린이가 막내 노릇 톡톡히 하는구나. 허허허.”
웬 어린애 장난 같은 짓이람. 주환과 윤희는 모처럼 생각이 일치했지만 겉으로 티 내지 않았다. 그저 연태용 회장을 따라 형식적으로 웃을 뿐이다. 나린이 성냥을 긁어 초에 불을 붙이자, 애정이 듬뿍 담긴 태용의 눈이 나린을 응시하였다.
“이제 불면 되는 게냐?”
“아. 그전에 올 한 해 수고 많았다고 서로 인사 한마디씩요!”
태용의 호응에 추진력을 얻은 나린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보았다. 태용이 빙긋이 웃더니 주환을 쳐다본다.
“네가 올해 수고가 많았다. 식품계열 이익률도 궤도에 올랐고……. 이젠 뭐 내가 없어도 될 것 같더구나.”
오래간만에 듣는 거한 칭찬에 주환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아닙니다, 아버님.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태용은 따뜻한 시선을 채 여사에게로 옮겨 갔다.
“에미, 너도 집안 건사하느라 수고 많았고.”
막 시집왔을 때만 해도 서릿발 같던 시아버지가 이렇게 유한 모습이라니. 채 여사는 격세지감을 느꼈다.
“다 아버님께서 살펴주신 덕분입니다. 내년에도 건강하셔야 해요.”
“그래, 그러마.”
채 여사의 답이 썩 흡족한지 태용은 또다시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으로 태용의 시선이 도달한 곳은 나린이었다.
“그리고 나린아.”
“네, 할아버지.”
“내 집에 와줘서 고맙다.”
‘내 집에 와줘서 고맙다.’
태용의 말이 긴 여운을 남기고, 나린은 공연히 울컥하는 기분이 됐다. 동시에 이 집을 낯설게 느끼고 선을 그었던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게 되었다.
“저야말로 한 해 동안 감사했어요, 할아버지. 내년 한 해도 건강하셔야 해요.”
나린은 주환 내외와도 차례로 눈을 맞추었다.
“큰아빠, 큰엄마도 잘 챙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잘 적응하고 있어요.”
큰아빠를 끼워 넣은 건 그저 구색 맞추기인 것만은 아니었다. 주환의 무관심이야말로 이 집에서 평화롭게 지내는 데 가장 일조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연주환 부회장은 어딘가 죽은 동생을 떠오르게 하는 나린의 얼굴에 불편함을 느끼고 슬쩍 고개를 돌려 피했다.
“자, 그럼 하나둘 셋 하면 불어요. 하나, 둘, 셋!”
나린의 활기찬 구호에 맞춰 ‘후’ 하는 소리가 나고 케이크 위의 촛불이 꺼진다. 주환 내외는 시늉만 했고 실제로 초를 불어 끈 건 나린과 태용이었다.
“내년 한 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린은 행복한 얼굴로 씩씩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윤완을 떠올렸다. 이 케이크를 선물해준 고마운 사람을. 그러고 보니 받고 나서 고맙단 말도 못 했던 것 같네. 다음에 만나면 꼭 잘 먹었다고, 고맙다고 인사해야지. 선물한 이가 소원했던 대로, 선물 받은 이의 얼굴은 한가득 포근한 미소로 물들었다. *** PK 백화점 VVIP 퍼스널 쇼핑룸. 혜원은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신경질적으로 헤집었다. 옆에선 VVIP룸 담당 매니저가 쩔쩔매는 중이었다.
“다 별로야. 입어볼 것도 없어. 다시 가져와!”
앙칼진 명령에 담당 매니저는 허둥지둥 옷들을 내갔다. 뭘 원하는지 힌트라도 주면 좋으련만. 한숨이 절로 나온다. 혜원은 PK 백화점의 톱 고객인 동시에 톱 진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몇 번 히스테리를 부리고 나면 수천 수백만 원 어치는 거뜬히 결제할 테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그래. 새해 첫날부터 액땜한다 치자.’
담당 매니저는 불경이라도 외는 심정으로 혜원의 신경질을 봐내었다. 혜원이 카탈로그를 뒤적이며 기다리는 사이, 새로운 컬렉션으로 갈음된 새 옷걸이가 도착했다. 이번엔 제발 그녀를 만족시키기를. 맨 앞에 걸린 원피스를 일관하던 혜원의 눈이 번뜩 옷걸이를 들여온 여직원에게 꽂혔다.
‘아니……?’
그 여자다. 세훈의 생일 파티에서 심심풀이 주제에 감히 와인을 쏟아부었던 여자. 공들여 맞춘 제 드레스를 망가뜨렸던 여자. 그 여직원도 혜원을 알아본 듯 사색이 됐다.
“안녕……하세요.”
사색이 된 여직원, 지아는 혜원의 기에 눌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어떤 심심풀이인가 했더니, 바로 자기 회사 직원이었어?
‘윤재오, 아슬아슬 선 타기 즐기는 건 여전하네.’
싸늘한 웃음을 흘리던 혜원은 홀연 좋은 생각이 났다.
“일단 이 옷들 먼저 계산하고 신발 좀 골라 와. 딱 100켤레. 그리고 여기 이 직원은 좀 남고……. 한……지아 씨?”
혜원의 눈이 지아의 이름표를 더듬는다. 혜원의 명령에 담당 매니저의 얼굴이 활짝 폈다. 옷이 단 두 번 만에 통과되다니. 이런 행운이 있을 수가 없었다. 신바람이 난 매니저는 혜원과 지아를 남겨두고 VVIP룸을 나갔다. 지아에겐 일각이 여삼추 같은 시간이 흐른 뒤, 신발 100켤레가 진열되었다. 지아와 VVIP룸 담당 매니저가 서로 눈치만 보는 와중에, 혜원의 눈은 곧장 지아에게로 고정됐다. 혜원이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내밀자 매니저는 곧바로 그 의미를 알아챘다.
“한 대리, 뭐 해요? 시착 도와드리지 않고.”
“네? 아…….”
그제야 지아는 자신이 이곳에 붙잡힌 이유를 깨달았다. 이건 복수다. 그날 일에 대한 복수.
‘끝난 게 아니었단 말이야?’
지아는 억울했다. 원래 VVIP룸 담당도 아니었는데, 결원이 생겨서 지원을 나왔다가 이런 불운을 맞닥뜨린 것이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지아는 입술을 꾹 깨물며 억울한 기분을 눌렀다.
‘그래, 일이라고 생각하자. 이건 그냥 일이야. 프로답게. 할 수 있어, 한지아.’
지아가 구두 한 켤레를 골라와 혜원의 발에 신겨준다. 혜원은 신발을 신겨주기 위해 무릎을 꿇은 지아를 보며 통쾌함을 느꼈다.
“예쁘네. 통과. 다음.”
혜원이 턱짓을 하고, 지아는 계속해서 혜원에게 신발을 신겨주었다. 혜원은 100켤레를 전부 신어볼 기세였다. 아니, 애초에 100켤레를 가져오라고 한 게 그럴 의도였나 보다. 100켤레를 신을 동안 지아를 자신의 아래에 무릎 꿇리겠다는 의도. 혜원의 발을 거치는 신발 개수가 늘어날수록 지아의 무릎과 어깨의 통증도 늘어났지만, 지아는 오기로 버텨냈다. 이런 괴롭힘쯤 굴할 수 없었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고. 지아는 태준을 사랑한 대가로 이보다 더한 일도 당한 적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재벌들은 어쩜 하나 같이 이럴까. 단 한 사람, 그녀를 사랑해 주었던 태준만 빼면. 지아는 악에 받쳐서 눈물을 참아내었다. *** 테라 호텔 강남, 스카이라운지. 새해에도 어김없이 보여주기식 만남은 지속되었다. 태준은 나린이 내일모레 싱가포르 출장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관심을 보였다.
“재무 쪽 출장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닌데. 가서 뭐 해요?”
“사업팀 양수도 계약 검토하고, 현지 결산 프로세스 개선점 찾고……. 그 정도요.”
“4박 5일로 되겠어요?”
“현지에서 할 것 위주로 빠르게 하고 나머진 복귀해서 해야 할 것 같아요. 출장 기간은 효율적이어야 하니까.”
나린은 처음 가는 해외 출장에 떨고 있으면서 별일 아닌 척 작은 허세를 담아 대답했다.
“마인드가 프로페셔널하네요. 우리 회사에도 이런 직원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당차 보이는 대답이 인상적이었는지 태준이 부드럽게 웃었다.
“세훈 오빠랑 와인 파티는 잘했어요?”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 나린이 냉큼 화제를 바꾼다. 황금 같은 주말에, 더군다나 이런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회사 얘길 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었다.
“네. 윤완이도 왔더라고요. 다음 날 새벽에 갈 거면서 무리해서. 원래 그런 녀석이 아닌데.”
나린은 윤완이 안겨주고 간 케이크 상자를 상기해냈다. 보기보다 속정 깊은 타입인가. 그때 두 사람의 테이블 쪽으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접근했다.
“분위기 좋네.”
나린과 태준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비아냥거리는 말투의 주인공은 PK 백화점 윤재오 전무였다. 마침 여기서 약속이 있었던 재오는 나가는 길에 태준과 나린을 발견하고 즉각 발길을 돌렸다. 안 그래도 전할 뉴스가 있었는데,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태준의 인상이 단박에 구겨졌다. 그는 세훈의 생일 파티 날 재오가 지아를 끌고 온 걸 잊지 않았다.
“신경 끄고 갈 길 가지?”
나린은 들어본 적 없는 태준의 낮고 무거운 톤에 짐짓 놀랐다.
“그러고 싶은데, 내가 테라 호텔 손녀분께 용건이 있어서 말이야.”
“무슨 용건?”
태준의 질문을 묵살한 재오는 나린을 똑바로 쳐다봤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어요?”
“……네?”
나린은 황당했다. 그날 이후 만난 적이 없는데, 이게 무슨. 파티에서도 지아를 구해주느라 한두 마디 나눈 게 다였고.
“그날 내 파트너 빌려 가 놓고 끝까지 안 돌려줬잖아요.”
아. 생각지도 못한 지적.
“그게…….”
나린이 적절한 답을 찾아 헤매는데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헛소리 말고 그만 가.”
나린은 태준의 말투에서 분노를 느꼈다.
“너무하네.”
재오는 태준에게는 별 관심이 없다는 듯 능청스런 웃음으로 나린을 쳐다봤다.
“근데 내 파트너랑은 무슨 사이에요? 친구예요?”
재오의 질문은 꼬박꼬박 나린을 향하는 듯했으나 실제 표적은 태준이었다. 태준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가 일부러 지아를 입에 올려 자신을 도발하고 있다는 걸. 그러니 여기서 발끈하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저기…….”
“저기 아니고 윤재오 전무.”
나린이 응수하려고 입을 떼자 재오는 여전히 능글거리며 나린의 말을 뚝 잘랐다.
“그래요, 윤재오 전무님. 그날은 파트너분이 많이 놀라서 어쩔 수 없이 먼저 집에 보냈어요. 말씀 못 드린 거 죄송해요.”
부디 이걸로 일단락되어라. 나린은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재오가 내뱉은 말은 나린은 물론 태준까지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 파트너 지금 몸져누운 건 알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린은 질문을 재오에게 던지면서도 눈으로는 태준의 안색을 살폈다.
“혜원이가 우리 백화점에 쇼핑하러 온 날 하필 그 친구가 VVIP룸 근무였거든요. 혜원이 시중들다가 좀 무리를 했나 봐요.”
시중. 나린은 두 귀를 의심했다. 이게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의 단어 선택이란 말인가. 재오는 얼빠진 태준의 얼굴을 보자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느꼈다.
“그럼 더 방해 안 할게요. 식사 맛있게 해요.”
비웃음만 남긴 재오가 떠나고 태준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는다. 나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태준을 살폈다.
“전 괜찮으니까 지아 씨한테 가보세요, 얼른.”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태준을 보며 나린이 차분하게 일렀다. 그러나 고개를 똑바로 쳐든 태준은 상상치도 못한 말을 내뱉었다.
“아니요.”
“…….”
“안 갈래요.”
“…….”
“안 갈 거니까…….”
“…….”
“나린 씨가 나 좀 잡아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