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과분한 보답2021.08.03.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 날. 침대에서 눈을 뜬 나린은 천장을 응시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단출하지만 행복했던 작년 이날이 떠올라 한참이나 늑장을 피운다. 일 년 전 오늘. 나린은 퇴근길에 눈 내린 풍경을 닮은 새하얀 케이크를 샀다. 저녁 식사 후 열린 케이크 파티는 나린과 수정이 철든 후부터 시작된, 가족의 작은 전통이었다. 둘러앉은 나린과 수정, 승태와 지숙은 케이크 중앙에 하트 모양의 캔들을 꽂고 ‘한 해 동안 수고 많았다’고, ‘새해에도 힘내자’고 서로를 북돋우며 다 함께 초를 불어 껐다. 자정을 기다리면서는 누가 연기대상을 받을지 열띤 토론도 하고, 자정 10초 전엔 상을 탄 배우들과 새해맞이 카운트다운도 하고, 자정이 되어서는 보신각 종 치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를 것이다. 이곳은 어떻게 한 해를 마무리할까. 어쩌면 입이 떡 벌어지는 호화스러운 방식일 수도, 또 어쩌면 놀라울 정도로 서로에게 무관심한 방식일 수도 있다. 궁금하면서도 전혀 기대는 되지 않는 그런 마음. 나린은 뭉그적대며 출근 준비를 했다. 키친으로 내려가자 미옥이 준비해둔 아침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곳 식구들은 아침 식사 습관이 제각각이었다. 태용은 꼭두새벽에 일어나 한식을 먹었고, 주환과 세훈 부자는 회사에서 적당히 때웠다. 채 여사는 서재에서 시집을 읽으며 사과 한쪽을 먹는 게 전부였다. 나린은 가장 늦게 일어나서 아침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고 나가는, 어찌 보면 가정부들이 가장 번거로워할 존재였다. 다행히도 미옥은 조금도 귀찮아하는 내색이 없었다. 오히려 스스럼없는 나린을 딸처럼 귀여워하는 눈치였다.
“연말인데 집에 안 가세요?”
나린이 사과를 깎고 있는 미옥에게 묻는다.
“아이고. 할 일이 산더미인데 못 가죠. 설에나 갈까.”
미옥은 사람 좋은 웃음을 웃었다. 정겨운 웃음소리는 외숙모를 연상시켰다. 외롭다. 할아버지 연태용 회장도 큰엄마 채 여사도 사촌 오빠 세훈도, 누구 하나 부족할 것 없이 챙겨주고 있는데 나린은 사무치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서 외삼촌네로 갈 수는 없었다. 채 여사는 당분간 외삼촌네와 왕래가 없었으면 한다고 했다. 안부 전화 정도는 괜찮지만 따로 만나거나 집을 오가는 모습은 안 보였으면 한다고. 나린이 채 여사의 의견에 동의한 건 아직 언론이 주목하고 있을 가능성 때문이었다. 외삼촌네에 피해를 주고 싶지 않으니까.
“저기.”
나린은 미옥을 불렀다. ‘아줌마’라는 표현이 입에 붙지 않아서 피하려다 보니 애매한 호칭이 되었다.
“네?”
“오늘 같은 날, 여기 어른들은 어떻게 시간 보내는지 아세요?”
미옥은 사과가 소담히 담긴 접시를 나린 앞에 올려놓으며 대답했다.
“회장님 빼고는 다들 약속 있으세요. 회장님께서도 소싯적엔 바쁘셨는데 이젠 연로하시니까요.”
“세훈 오빠도요?”
“네. 부사장님은 매년 친구분들하고 보내세요. 호텔에 모여서 술 한잔하면서요.”
결국 오늘 저녁은 할아버지와 단둘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 연말에 할아버지 혼자 쓸쓸히 계시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우울해!”
나린은 차가운 겨울 하늘에 대고 소리쳤다. 팀장 재량으로 허락된 한낮의 퇴근에도 전혀 신나지가 않았다. 우울해! 우울해! 무작정 보도블록을 따라 걷는다. 삼십 분쯤 걷다가 집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발이 시린 것쯤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음이 시린 것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었다. 거리 위 들뜬 분위기라도 실컷 눈에 담아야지. 좀 더 번화한 거리를 향해 나아가는데 가방 안에서 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모바일 사내 포털 어플이 표시하고 있는 이름. 도윤완 부사장님?
‘뭐지? 출장 중에 전화를 다 걸다니.’
나린은 얼떨떨해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뭐 해.]
“그냥……. 걷는 중이요.”
틀린 말은 아닌데, 안 해도 될 말이었다. 그냥 퇴근길이라고 하면 될걸.
[퇴근했어?]
“네.”
하다가 나린은 아차 싶었다. 이 시간에 퇴근시켜 준 건 팀장님 재량이었는데. 도윤완 부사장이 팀장님한테 한소리 하면 어쩌지.
“그러니까 그게……. 오늘이 올해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저희는 어차피 결산 때문에 어제도 야근했고 내일도 야근해야 되고……. 팀장님도 한 해 동안 수고했다고, 오늘 일 다 마친 사람들은 먼저 들어가라고, 좋은 마음으로…….”
[누가 뭐래?]
“……저희 팀장님 혼낼 거예요?”
장황한 변명 속에 묻혀 버린 핵심 질문을 던지자, 전화기 저편에서 흐릿하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니.]
웃어? 도윤완 부사장이? 그럴 리가. 잘못 들었음에 틀림없다.
[부탁 하나 하려고 했더니.]
“……뭔데요?”
[내 방에서 서류 하나만 스캔해서 보내 달라고. 콘퍼런스에 필요한 서명본을 두고 왔어.]
나린은 걸음을 멈추었다.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도와줄까. 그간 도윤완 부사장이 베풀어 준 호의에 미약하게나마 보답할 겸.
“보내드릴게요. 지금 막 나와서 다시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럼 내 방 비밀번호랑 어떤 서류인지 메시지 보낼게.]
“네.”
나린은 씩씩하게 발길을 되돌렸다. *** 도쿄 호텔에서 모레 있을 콘퍼런스 자료를 정리하던 윤완은 CEO 서명이 들어간 오프라인 결재본을 두고 왔음을 깨달았다. 윤완의 비서 정 대리는 그의 출장 일정에 맞춰 장기 휴가 중이었다. 재무팀장에게 연락할까 하다가 만 건 머릿속에 떠오른 그리운 얼굴 때문이었다. 이건 기회다. 합리적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할 기회. 합법적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기회. 비서가 휴가 중인 게 행운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윤완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한결같은 톤. 예쁜 목소리. 안녕, 연나린. 봄을 맞은 것처럼, 그의 가슴 안에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 스캔본 전송을 완료한 나린이 사무실을 나서는데 윤완에게서 재차 전화가 걸려왔다. 나린은 뭐가 잘못됐나 싶어 걸음을 멈추었다. 잘못됐으면 사무실로 되돌아가야 하니까.
“뭐 문제 있으세요?”
[아니.]
“그럼요?”
[…….]
침묵이 인다. 사실 전화를 건 윤완도 왜 다시 전화를 걸었는지 몰랐다. 충동에 졌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충동. 지는 횟수가 늘면 곤란한데.
“퇴근하면 뭐 해?”
[집에 가야죠.]
그렇지. 퇴근하면 집에 가겠지. 이런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질문을 하다니. 수화기 너머의 윤완은 들리지 않게 자책했다. 그때였다. 할 말을 소진한 윤완을 대신해서 나린이 대화를 이은 건.
[오늘 친구들끼리 모여서 한잔하는 날이라면서요. 못 가게 돼서 서운하시겠어요.]
어떻게 안 거지? 그새 태준이라도 만났나?
“별로.”
널 못 보는 건 좀 서운하네. 한국이었으면 만나러 갔을 텐데. 이제는 윤완도 될 대로 되라였다. 그래. 어디 생각나는 대로 내버려 둬 보자. 이 앨 향한 마음이 어디까지 달려가는지. 단, 입 밖으로 내뱉지만 않으면 된다. 아무도 모르는 일은 없는 일이 되기도 하니까.
[전 좀 서운해요.]
“…….”
[원래 오늘은 케이크 사서 다 같이 촛불 부는 날인데, 그걸 못하는 것도 서운하고……. 올 한 해 수고 많았다고 말할 상대가 없는 것도 서운하고…….]
“…….”
나린은 코를 훌쩍거렸다. 추워서인지 눈물이 나서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오늘 눈 떴을 때부터 외로웠는데, 이런 전화라도 받아서 좋았다면……. 믿으시겠어요?”
쑥스러워하며 나린이 고백했다.
“고맙습니다.”
용기를 쥐어 짜낸 감사 인사에도 전화 저편의 침묵은 계속되었다. 나린이 볼 수 없는, 바다 건너의 윤완은 충격을 받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 이 애는 이렇게도 간단히 경계를 넘어오는 걸까. 내가 어렵지도 않나. 아니, 평소에 대하는 걸 보면 어려워하는 건 맞는데……. 또 어떨 때는 너무도 편안하게.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겁이 없다고 해야 할지. 신기한 아이.
“일찍 들어가. 추워.”
무뚝뚝한 어조와 달리 그의 얼굴은 따스한 빛을 띠었다. 나린이 봤더라면 낯모르는 표정에 당황했을지 몰랐다.
[콘퍼런스 잘하세요.]
“그래.”
금방 만나자. 보고 싶은 연나린. 윤완은 비로소 전화를 끊었다. 더 얘기를 나눴다가는 마음이 통제 밖의 영역으로 달아나 버릴까 무서웠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제동을 걸어야만 한다. 하지만 도무지 방법을 알 수 없는 그였다. *** 한참이나 거리를 쏘다니던 나린은 늦지 않게 집으로 돌아왔다. 모두가 제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 집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냥 이대로 넘어가는 건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나린의 걸음이 천근만근 무게를 싣고 2층 계단으로 향하였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예정대로 세훈은 친구들을 만나러 갔고, 부회장 부부도 외식을 하러 나갔다. 그래서 식사 자리엔 여지없이 태용과 나린, 둘만 남았다. 여전히 대하기 어려운 할아버지와의 어색한 침묵 속에 식사를 마친 나린은 일찍 잠자리에 들 요량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앉아 책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폰이 진동하며 매트리스를 긁는 소리가 나린을 깨운다. 발신자 표시에 뜬 사람은…….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째인 그.
“여보세요?”
[집이야?]
“네.”
[그럼 잠깐 나와. 집 앞이야.]
……집 앞? 설마, 우리 집 앞?
“저희 집 앞이요?”
나린은 재차 확인을 했다. 해외 출장 갔단 사람이 순간이동을 했을 리도 없으니.
[그래. 두 번씩 말하게 하지 말고 빨리 나와. 끊는다.]
전화가 끊기고 나린은 뭐가 뭔지 몰라서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려 보았다. *** 진짜였다. 진짜로 도윤완 부사장이 집 앞에 와 있었다. 나린은 뭐에 홀린 사람처럼 조수석에 올라탔다.
“출장 가신 거 아니었어요?”
지금 일본에 있어야 할 사람이 어떻게. 그러나 윤완은 대꾸 없이 나린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뭐가 이상한가 싶어서 나린은 양 볼을 번갈아 쓸었다.
“……왜요?”
“잠깐 들어왔어. 아무래도 오늘은 애들하고 술 한잔해야 할 것 같아서.”
윤완은 앞선 질문에의 답으로 미리 마련해둔 변명을 했다.
“아, 네.”
스스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나린은 믿는 눈치다. 예고도 없이 쑥, 윤완의 상체가 나린 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린이 깜짝 놀라서 어깨를 움찔거리는데, 윤완은 긴 팔을 그대로 뒷좌석을 향해 뻗었다. 다시 제자리로 되돌려진 그의 손엔 네모난 상자가 들려있었다. 그는 상자를 나린에게 안겼다.
‘……케이크?’
얼결에 상자를 받아든 나린은 놀라서 윤완을 쳐다보았다.
“스캔본 보내준 거에 대한 보답.”
뜻밖의 보너스에 말문이 턱 막혔다. 상사의 업무 지시 이행에 대한 대가는 월급만으로 충분한데.
“그만 가 봐.”
무색무취한 얼굴이 운전대와 일직선상에 놓인다. 나린은 윤완의 입력값대로 출력해내는 로봇이 된 양 차에서 내렸다. 선물 받은 케이크 상자는 두 팔로 꼭 끌어안은 채. 윤완의 차가 나린을 남겨둔 채 떠나고. 나린은 멍하니 그가 사라져 간 쪽을 주시했다. 뭘까. 이 친절은. 굳이 출장 중에 되돌아와서까지. 그러다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세훈 오빠네 보러 온 김에 들린 거라고 했잖아, 분명.’
이 또한 원래 다현의 몫이었을 친절을 대신 받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현을 닮은 눈매 덕에 받은 예기치 못한 행운. 그것 말고 지금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없었다. 적어도 나린에게는. 근데 서울에서 도쿄를 무슨 인천 왔다 갔다 하듯 하네. 나린은 혀를 내둘렀다. 한편. 테라 호텔 강남으로 차를 모는 길에 윤완은 괜한 초조함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충동적으로 비행기에 오른 진짜 이유는 나린으로부터 들은 말이 뇌리를 떠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오늘은 케이크 사서 다 같이 촛불 부는 날인데, 그걸 못하는 것도 서운하고……. 올 한 해 수고 많았다고 말할 상대가 없는 것도 서운하고…….’
생전 해본 적 없는 돌발행동에 윤완 스스로도 적잖이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올 한 해 수고 많았어.’ 그 한마디를 끝끝내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