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닮은 눈2021.07.30.
새 집에 적응하느라 고군분투하는 사이 12월의 꽃, 크리스마스가 찾아왔다. 나린은 실로 오랜만에 계획이 없는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올해 12월 25일은 인생에서 가장 시시한 크리스마스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부터 박 부장이 다급한 용건으로 나린을 호출했다.
“싱가포르 출장이요?”
나린이 반문하자 박 부장은 미안한 표정을 쥐어짜냈다.
“시간이 촉박해서 미안한데 그렇게 됐어. 갑자기 결정된 거라……. 아무래도 나린 대리 담당이니까 나린 대리가 가는 게 맞지 싶어서.”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해외 출장이라니……. 해외 출장 가본 적도 없는데. 그럼에도 대리씩이나 된 나린은 아마추어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부러 씩씩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사업 3팀 고영철 부장 나가 있으니까 연락해 봐. 갑자기 재무 쪽 지원이 필요하다고 요청 온 거거든. 정 가기 힘들면 말하고. 다른 사람 구해볼 테니.”
“아뇨. 제 담당 법인인데 제가 가야죠.”
평소 같으면 ‘출장 결정됐으니까 잘 알아보고 준비해’로 끝났을 박 부장의 지시가 이렇게 구구절절해진 건 나린의 배경이 변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부와 권력이 이 사회에서 어떤 힘을 갖는지, 이 세계에 발을 들인 이후 문득문득 체험하게 되는 나린이었다. 결코 알고 싶지도, 익숙해지고 싶지도 않은. 자리로 돌아온 나린이 한숨을 내쉰다. 그때 책상 위로 각진 캐러멜 두 알이 툭, 놓였다.
“웬 한숨이야?”
“과장님…….”
민하가 업무 외적으로 알은척한 건 나린의 기사가 나고 꼬박 나흘만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나린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부장님한테 혼났어?”
민하는 자리에 앉으며 새치름한 말투를 했다.
“아뇨. 갑자기 싱가포르 출장을 가라고 해서요.”
나린이 무거운 투로 답을 한다.
“언제?”
“다다음 주요. 다다음 주 월요일.”
“완전 새해 벽두부터네. 누구랑? 설마 혼자?”
“네. 사업 3팀에서 나가 있다고는 하는데……. 걱정돼요. 경험이 없어서.”
아끼는 후배가 털어놓는 고민에 민하 과장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태도가 옹졸했다는 반성을 했다. 고작 성이 바뀐 것뿐인데, ‘강나린’에서 ‘연나린’이 됐다고 그간 거리를 둔 게 미안해진다. 민하는 의자를 끌어 나린 가까이로 바짝 붙었다.
“일단 항공편부터 알아봐야 해. 제휴 여행사 담당자한테 연락하면 확인해 줄 거야.”
나린은 서랍에서 집히는 대로 포스트잇과 펜을 꺼내 민하의 조언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출장 계획서는 샘플 줄 테니까 양식 맞춰서 수정하면 되고, 결재 상신 경로도 메일로 같이 줄게.”
경영지원실에 오기 전 해외영업팀 소속이었던 민하는 출장 경험이 풍부했다. 해야 할 일을 막힘없이 일러주는 민하 덕분에 나린은 마침내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막막했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과장님.”
“됐어. 나도 나린 씨 도움 많이 받잖아. 상부상조하는 거지. 출장 처음 갈 땐 떨린데 막상 가보면 별거 없어.”
자리로 복귀하는 민하를 지켜보며 나린의 마음이 몽글해졌다. 그간 회사생활을 통해 가장 통감한 게 있다면 바로 사람의 중요성일 것이다. 업무가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이 힘든 것만 못하다. 마찬가지로 업무가 힘들 때 버티게 해주는 것도 사람이었다. 나린은 좋은 회사 선배를 만난 게 얼마나 행운인지 민하를 볼 때마다 새삼 깨우쳤다. *** 집에 돌아오자 먹음직스러운 떡볶이가 이벤트처럼 나린을 반겨주었다. 오늘 아침, 무심결에 먹고 싶다고 얘기한 걸 미옥이 귀담아듣고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그냥 사 먹어도 됐는데.”
“아니에요. 오랜만에 솜씨 발휘하고 좋았어요. 제가 떡볶이 하나는 기차게 만들거든요. 그간 솜씨 발휘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는데 잘 됐죠.”
미옥은 넉살 좋게 떠들어댔다. 나린은 새빨간 떡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맵기와 달기가 이토록 조화로운 떡볶이는 처음. 떡볶이 하나는 기차게 만든다더니, 과연 허풍이 아니었다.
“와! 진짜 맛있어요!”
“그렇죠? 다행이네요. 입맛에 맞아서.”
미옥은 뿌듯한 표정을 남기고 별채를 돌보러 떠났다. 나린은 왼손에 든 포크로 떡을 찍으며 오른손으로는 스마트폰을 두드려 아까 예약한 싱가포르 호텔 정보를 검색했다. 그러다가 반뜩, 태준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처음에 나린 씨 봤을 때 우리 다 되게 놀랐어요. 다현이랑 많이 닮아서. 특히 눈이요.’
왜 갑자기 이 말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궁금증이 일었다. 얼마나 닮았길래. 이곳에 오기 전 아버지 ‘연성환 부회장’을 검색해봤을 때 다현의 사진도 본 적이 있기는 했지만 자세히 관찰해보지는 못하였다. 나린은 검색창에 적힌 싱가포르 호텔 이름을 지우고 ‘테라 그룹 연다현’, 일곱 글자를 입력했다. 돋보기 버튼을 누르자 폰 액정 위로 여러 장의 단발머리 여자 사진이 뜬다. 나린은 얼굴이 정면으로 찍힌 사진 하나를 골랐다. 확대된 사진 속 다현은 나린과 달리 차가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분위기가 전혀 다른 것 같은데.
‘맞다, 눈. 눈이 닮았다고 했어.’
나린은 다현의 눈매에 집중을 했다. 크다고도 작다고도 할 수 없는 크기. 적당하게 짙은 눈썹. 길게 뻗은 속눈썹. 옅게 진 속쌍까풀. 검디검은 동공과 광채로 빛나는 흰자위가 뚜렷이 대비되어 선명한,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들여다보던 바로 그 눈이었다.
‘정말이네. 다들 놀랄 만하다.’
나린은 스스로도 인정할 만큼 닮은 눈매가 신기해서 넋을 잃고 사진을 들여다봤다. 외삼촌 승태는 나린의 눈이 엄마를 빼닮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할 때면 나린을 붙들고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눈시울을 붉힐 정도였다. 그랬는데, 실상은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거였다니. 저벅저벅. 키친 밖에서 인기척이 가까워 온다. 놀란 나린은 뒤로 가기 버튼을 연달아 누른 뒤, 검색창에 얼른 싱가포르 호텔 이름을 적어 넣었다. 검색 버튼을 누르는 딱 그 타이밍에 세훈이 들어섰다. 간발의 차이.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다현의 사진을 보고 있던걸.
“떡볶이 먹고 싶다고 하더니 결국엔 먹네. 맛있어?”
“네. 드실래요?”
세훈은 고개를 젓고 유리컵에 물을 따라 나린 옆에 폴싹 앉았다. 그가 나린의 폰 위로 쑥 고개를 내민다.
“가든스 호텔?”
세훈은 고개를 기우듬하다가 이내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 미리서부터 공부하는 거야?”
“아, 아뇨, 아뇨.”
나린은 행여 호텔 경영을 넘본다고 오해라도 받을까 봐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세훈에게는 그런 의심을 할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 다음 후계자가 자신의 친아버지인 이상, 나린은 전혀 위협이 될 수 없으니까.
“출장을 가게 돼서요.”
자신의 반응이 과했음을 인지한 나린이 자그만 목소리로 해명했다.
“싱가포르로?”
“네. 다다음 주 월요일에요.”
“흠. 항공사 마일리지 좀 쌓아 뒀나?”
그는 뚱딴지같은 소리를 꺼냈다.
“……아뇨.”
“그럴 줄 알고 내가 미리 손을 써놨지.”
“네……?”
세훈은 씨익 웃으며 나린에게 항공사 앱에 로그인할 것을 주문했다. 나린이 로그인된 앱을 내밀자 세훈이 카테고리를 눌러 가족 합산 마일리지가 표시된 화면을 띄웠다. 세계 일주라도 한 듯 뻥 튀겨진 숫자를 보고 나린의 두 눈이 똥그래졌다.
“개명 절차 밟을 때 비서실에 얘기해서 가족 합산 신청해 놨거든. 마음껏 갖다 써도 돼. 할아버지는 어차피 안 쓰시니까.”
“……이런 것도 아세요?”
그냥 턱턱 카드나 긁어댈 것 같은 사람이 마일리지를 챙기다니. 어쩐지 친근한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 꼬장꼬장하셔서 임원 달기 전엔 나도 평사원들이랑 똑같은 출장 기준을 적용받았거든. 그때마다 승급 찬스 덕을 톡톡히 봤지.”
“승급 찬스가 뭔데요?”
“회사에서 해주는 항공편은 클래스가 높아서 마일리지로 승급이 돼. 그러니까 이걸로 비즈니스 타고 가. 싱가포르까지 몇 시간인데, 허리 아파.”
꿀팁을 전수한 세훈은 유유히 방으로 되돌아갔다.
‘고작 싱가포르인데 이코노미를 못 탄다고? 이럴 땐 또 영락없는 부잣집 도련님이지.’
겨우 마일리지 하나로 그를 친근하게 느꼈던 걸 허탈해하며 나린은 픽 미소를 지었다. *** 하지만 나린의 선택도 결국엔 비즈니스 승급이었다. 무심결에 마일리지가 있다고 말했는데 민하 과장이 적극 추천했다. 해외 출장이 잦은 직원들 사이에선 꽤나 유용하게 통용되는 방법인가 보았다. 나린이 출장 가서 할 일은 사업 3팀에서 진행 중인 신규 사업 양수도 계약을 검토하는 게 전부였다. 부서 내부 지시로 현지 결산 프로세스 개선점을 도출하는 것도 추가되기는 했지만 부담스러운 업무는 아니었다. 중요한 출장이 아닌 만큼 휘뚜루마뚜루 작성한 계획서로도 손쉽게 출장 승인이 났다.
“이슈 해결이나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하는 출장보단 이런 출장이 꿀이야. 회사 돈으로 여행 가는 거야, 완전.”
나린의 출장 목적을 들은 민하가 부러워했다. 민하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나린은 문득 CFO실에 불이 꺼져 있는 걸 발견했다.
“부사장님은 오늘 출근 안 하셨어요?”
나린이 민하에게 묻고,
“몰라. 어디 아프신가.”
민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짚었다. *** 오늘은 나린이 맡은 업무 특성상 반드시 야근이 예정된 날이었다. 그래도 여느 결산일에 비해선 일찍 마쳤다.
‘오늘 출근 안 했던데, 어디 아파요?’
택시에 몸을 실은 나린은 ‘도윤완’이라고 적힌 채팅방 하단에 의문문을 완성해냈다. 그러다가 조금 거친 손놀림으로 지움 버튼을 눌러댄다. 아프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람. 그러다가 또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래도 곤란할 때 여러 번 도움을 받았는데 안부 정도는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폰과 씨름하고 있는데 태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휴대폰 하고 있었어요? 금방 받네요.]
“그냥……. 메시지 쓰고 있었어요.”
[아. 방해해서 미안해요.]
“아뇨. 무슨 일이에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 파티 이후 오랜만이었다. 그와 연락이 닿은 건.
[안 바쁘면 같이 술 한잔할래요? 여기 강남 테라 호텔인데.]
어른들께 보고드릴 만남 횟수를 한 번 늘리려는 모양이다.
“…….”
[다른 애들도 있고요.]
늦은 시각임을 의식한 나린이 머뭇대자 태준이 덧붙였다. 다른 애들도. 그럼, 도윤완 부사장님도 있을까.
“좋아요. 갈게요.”
[여기 2501호거든요. 프런트에 전화해둘 테니 얘기해서 올라와요.]
“네.”
택시 기사에게 말해 목적지를 바꿔 테라 호텔로 간다. 호텔 직원들은 이미 새 오너 일가의 얼굴을 달달 외운 뒤였다. 나린은 프런트로 갈 필요도 없이 로비에서 대기 중이던 직원을 만나 안내를 받았다. 똑똑. 나린이 2501호실 문을 두드리자 태준이 나와서 반겨주었다.
“어서 와요.”
나린은 입구에 있는 붙박이장에 코트를 걸어두고 태준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객실 한가운데 마주 보고 배치된 두 개의 긴 소파를 세훈과 준우가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있다. 어? 도윤완 부사장님은…… 어딨지? 나린의 눈동자가 잠시 허공을 배회했다. 어쩐지 대놓고 윤완의 행방을 물을 수는 없었다. 그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일까 봐. 나린의 궁금증은 곧 준우의 푸닥거리에 해소가 됐다.
“윤완이 녀석은 사케랑 사시미 실컷 먹고 있겠네. 그게 어디 출장이냐? 새해맞이 해외여행이지.”
아. 출장 갔구나. 다행이다. 아픈 게 아니라서.
“언제까지 출장이래?”
세훈의 질문이었다.
“3주 정도 아시아 위주로 다닐 거래. 다른 일정 때문에 중간중간 들어오긴 할 건가 봐. 걔네 법인이 한두 개여야지.”
그러다가 준우의 시선이 나린에게 닿았다.
“윤완이 오늘 출장 간 거 몰랐죠?”
“네.”
“그룹 차원에서 보낸 거라 팀장들이 굳이 얘기 안 했을 거예요.”
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아까 메시지를 보내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하면서. 쓸데없이 우스워질 뻔했잖아. 메시지를 작성하던 그 타이밍에 태준의 전화가 걸려온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