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신데렐라 (17/101)

#17. 신데렐라2021.07.27.

16558027750356.jpg

- ‘현대판 신데렐라의 탄생! 테라 호텔 연태용 회장의 숨겨진 손녀딸 등장!’ - ‘충격! 테라 호텔 故 연성환 부회장, 혼외 자식 있었다!’ - ‘인생역전! 하루아침에 재벌가 손녀로!’ 상투적이고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달고 나린의 스토리가 기사로 난 월요일 아침. 사내 포털 상의 이름도 ‘강나린’에서 ‘연나린’으로 정정되었다. 일부러 맞추려 한 건 아닌데 참으로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여느 날처럼 출근한 나린은 기사를 보고 달라진 동료들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16558027750361.jpg“과장님, 안녕하세요.”

평소보다 배로 씩씩하게 민하 과장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되돌아온 건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16558027750365.jpg“어, 나린 씨. 안녕…….”

나린은 속상한 마음을 감추며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 태국 법인 사무실 임차 계약 연장 건으로 뻔질나게 나린을 불러대던 박 부장도 오늘은 잠잠하기만 했다. 다른 때 같으면 업무 중간중간 말도 붙이고 커피도 사러 가자고 했을 민하 과장은 아침 인사 이후 나린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 나린은 사무실에서의 오전 시간을 숨죽인 채 흘려보냈다. 언젠가 나린도 누구누구 임원 자식이 입사했다더라 하는 소문을 듣고 사내 포털에서 이름을 검색하고 사진을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 다른 직원들도 그런 얕은 호기심으로 나린의 이름을 검색해보고 있을 것이다. 경험상 그런 관심은 얼마 못 갔다. 이러쿵저러쿵해도 맡은 업무를 잘 해내면 ‘낙하산이다’, ‘부정 입사다’ 하는 평판도 금세 사라졌다. 그러니 이 또한 곧 지나갈 것이었다. 나린은 그렇게 위안을 삼으며 마음을 굳건히 했다. 그때 사내 메신저 불이 깜빡인다.

16558027750369.jpg[점심시간에 휴게실 옆 비상계단으로 와. 직원들 눈에 안 띄게.]

윤완이 보낸 메시지였다. *** 점심시간에 맞춰 사무실이 자동 소등되고 15분쯤 지나자 층 전체에 나린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나린은 윤완이 이른 대로 휴게실 옆 비상계단으로 갔다. 화물 전용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완은 나린을 보더니 인사도 없이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부터 눌렀다.

16558027750361.jpg“……어떻게 된 거예요?”

나린의 물음에 윤완이 비뚜름히 내려다본다.

16558027750369.jpg“로비에 기자들 와 있어.”

16558027750361.jpg“네……? 왜요……? 아.”

금세 이유를 깨우치고 입을 다무는 나린. 그래. 기삿거리가 되었지, 내가. 나린은 그제야 윤완이 저를 위해 화물 전용 엘리베이터를 수배하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16558027750361.jpg“감사합니다.”

직접적인 수고야 비서가 대신해 줬겠지만, 그래도.

16558027750369.jpg“됐어. 세훈이한테 부탁받은 거야.”

16558027750361.jpg“네…….”

이건 반만 진실이었다. 윤완은 세훈이 부탁하기 훨씬 전부터 나린을 구해줄 채비를 마쳤다. 왜 도와주느냐 물으면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차에 세훈이 마침맞게 연락을 해왔다.

1655802776858.jpg‘나린이 좀 챙겨줘. 기자들한테 시달리지 않게. 부탁한다!’

  그렇게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 그가 나린을 신경 쓰여 한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는 아주 적절한 핑곗거리가. 엘리베이터에 오른 윤완은 즉시 닫힘 버튼을 눌렀다. 목적지인 ‘B3’ 버튼을 누르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무심코 옆을 돌아다본 윤완의 눈에 엘리베이터 손잡이를 감아쥐고 있는 나린이 걸렸다. 파르르, 잔떨림을 실은 눈꺼풀 아래 감출 수 없는 공포심이 선연히 엿보였다.

16558027750369.jpg‘아직 무서워하는 건가.’

29층에서 지하 3층이면 제법 오래 내려가야 하는데. 다른 이들에게는 한순간일 이 시간이 나린에겐 매우 길고 힘들 것이다. 윤완은 몸을 비틀어 나린을 마주 보고 섰다. 성큼. 눈동자 안에 제 얼굴이 꽉 차도록 한 걸음 더 가까이. 나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뭐라도 해야겠는데 이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대안이 없었다. 이렇게라도 시야를 가려주면 지금 있는 공간을 조금이라도 잊어버리지 않을까 해서.

16558027750361.jpg“아…….”

나린은 불시에 시야를 메운 그를 올려다봤다. 나린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윤완은 지난 금요일 밤 먹었던 쿠키를 떠올렸다. 달긴 단데 끝엔 묘하게 씁쓸함이 남았던 맛. 그럼에도 자꾸만 입에 넣고 싶었던 맛. 그녀의 손길이 녹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지만 세훈은 딱 두 개까지만 양보해 주고 상자를 닫아 버렸다. 구두쇠 같은 놈.

16558027750369.jpg“정신과 상담은 계속 받고 있어?”

그의 물음에 나린은 이 돌발행동이 다른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걱정을 해서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내 불안감을 눈치채준 것. 그의 친절이 정말 다현의 동생이기 때문이라면, 다현은 그에게 매우 각별한 존재였음이 틀림없었다.

16558027750361.jpg“아뇨. 한 번밖에 못 갔어요.”

16558027750369.jpg“힘들면 더 다녀. 근무 시간이 문제면 팀장한테 말해둘게.”

16558027750361.jpg“아니에요. 엘리베이터를 아예 못 타는 것도 아니고…….”

16558027750369.jpg“…….”

이렇게 힘들어하면서.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힐 만큼.

16558027750369.jpg“남한테 줄 쿠키 만들 시간 있음 상담이나 더 받지?”

계속 눈을 맞추고 있자니 쑥스러워져서 윤완은 저도 모르게 말꼬리를 비틀고 말았다. 나린은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 쿠키? ……설마 그 쿠키?

16558027750361.jpg“어떻게 알았어요? 세훈 오빠한테 들었어요?”

윤완은 입을 다물었다. 들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먹었다고 하면 이 애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궁금했지만 확인은 하지 않기로 한다. 나린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지속하지 않을 관심이니까. 아주 잠깐의 호기심으로 끝내고 말 거니까. 반드시 그럴 것이다. 내 마음 정도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다. 충분히.

16558027750361.jpg“부사장님은 상담받으셨어요?”

16558027750369.jpg“응.”

16558027750361.jpg“언제요?”

16558027750369.jpg“아직도 받고 있어. 매일 아침 출근 전에.”

16558027750361.jpg“엄청 일찍 오시는데 그때 병원이 문을 열어요?”

16558027750369.jpg‘아니, 주치의가 집으로 오는데.’

이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살게 된 새 세상이 그동안 살아왔던 세상과 얼마나 다른지 굳이 일러주고 싶지 않았다. 일러주지 않아도 차차 알아가게 될 테니. 하나하나 깨우쳐 가겠지. 이곳이 어떤 곳인지. 제게 쥐여진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 깨달으면, 이 애도 변할까. 저 맑은 눈동자도 잇속에 밝은 눈으로……. 저 순수한 미소도 속내를 감추는 가면으로……. 너도 그렇게 변해 갈까.

16558027750369.jpg“정신과 상담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야. 감기 걸려서 병원 가는 거랑 다를 바 없어.”

윤완은 아이를 어르듯 따끔하게 타일렀다.

16558027750361.jpg“알고 있어요.”

16558027750369.jpg“말만 하지 말고.”

16558027750361.jpg“오늘 퇴근하고 또 갈게요.”

16558027750369.jpg“확인해 볼 거야.”

윤완이 다짐을 두는데, 엘리베이터가 지하 3층에 도착했다. 주차장으로 나가자 넓은 공터에 윤완의 차만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평일 회사 주차장은 임원과 임산부 등 소수에게만 개방되어 있어 널널한 축에 속했다. 그중에서도 지하 3층은 층 전체가 그의 전용 주차장이 된 지 오래였다. 윤완이 애용한다는 걸 안 임직원들이 철저히 기피한 탓이었다. 옆자리에 나린을 실은 윤완은 어딘가로 차를 몰았다.

16558027750369.jpg“오후엔 팀장한테 말해서 휴가를 내는 게 좋겠어.”

교차로 정지선에 맞춰 멈추며 윤완이 말한다.

16558027750361.jpg“네.”

이젠 온 세상이 알았다. 나린의 세계가 뒤집힌 걸. 또 한 번 예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갈 퇴로를 차단당하고 만 기분. 이런 호화로운 생활이 딱히 싫을 건 없었지만, 그래도 나린은 외삼촌네에서 지낼 때의 푸근함이 더 그리웠다. 남들은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이전 삶에 더없이 만족했던 그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불안감일지도 몰랐다.

16558027750369.jpg“금방 조용해질 테니 너무 걱정 마.”

윤완은 잠잠한 나린이 가여워서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하지만 나린은 묵묵부답이었다. *** 윤완의 차가 최종적으로 멈춘 곳은 어느 구석진 골목, 엘리베이터도 없는 오래된 건물 앞이었다. 나린은 윤완을 따라 높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재벌가 귀공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협소한 크기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단조로운 소품들.

16558027750361.jpg“이런 곳도 오세요?”

16558027750369.jpg“…….”

나린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는데 윤완은 조소로 답을 갈음했다. 자리로 안내받은 뒤 나린은 별생각 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판을 펼쳤다. 생소한 외래어들 위로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자 얼핏 가격에 붙은 ‘0’의 개수가 위화감이 들었다. 숫자 관련 직군에서 일하고 있기에 곧바로 모든 요리의 가격이 상식적인 자릿수와 다르다는 걸 깨닫는다. 믿을 수가 없어서 애피타이저 하나를 골라 손가락으로 직접 ‘0’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그리고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다.

16558027750361.jpg‘일, 십, 백, 천, 만, 십만…… 십오만 원?! 이 조그만 접시 하나가?’

16558027750369.jpg“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습관은 버리도록. 우리 회사 인재상이랑은 안 맞으니까.”

나린의 반응을 지켜보던 윤완이 냉소를 띠며 말했다. 이건 분명 노린 거다.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일 줄 알고 일부러. 무방비 상태로 당한 게 분했지만, 마지막 자존심을 끌어모아 최대한 무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적절히 받아쳐 줄 말을 떠올리지 못한 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었다. 싸워보기도 전에 함정에 빠져 패배한 기분이 이런 걸까.

16558027750369.jpg“뭐 먹을 거야?”

윤완이 선택을 재촉하고,

16558027750361.jpg“알아서 시켜주세요.”

지난번 ‘페퍼’에서 한 실수를 기억해낸 나린은 깔끔하게 포기 선언을 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윤완이 이것저것 주문을 하는 사이 나린은 가게 내부를 요리조리 뜯어봤다. 테이블이라고는 딱 세 개뿐이고 그마저도 모조리 비워진 채. 윤완이 가게를 통째로 빌린 탓이었지만 나린은 손님이 없을 만하다고 멋대로 단정 지었다. 이런 곳에 오는 손님은 부사장님 같은 다이아몬드 수저밖에 없겠지. 누군 하루를 꼬박 일해도 벌기 힘든 돈을, 누군 음식 한 접시에 탕진해 버리고……. 아아, 세상은 정말 불공평한 거야.

16558027750369.jpg“너도 이제 이런 데 익숙해져야지. 어엿한 테라 호텔 손녀로 공표까지 됐는데.”

불만이 담긴 눈으로 가게를 요리조리 훑는 나린을 보며 윤완이 충고한다. 속마음을 낱낱이 읽힌 기분에 나린은 어깨를 움찔거렸다. 그렇지. 지금 누가 누굴 다이아몬드 수저라고. 이젠 나도 저 사람이랑 다를 바 없는데. 당장 네가 살고 있는 방을 생각해 봐. 대학교 때 종종 놀러 갔던 친구들의 자취방에 비견하면 과하게 넓고 사치스러운 공간. 고작 집에 딸린 방 하나에 불과한데도. 이렇게 또 달라진 처지를 확인받고 나니 어딘지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16558027750361.jpg“예전엔 너무너무 부자가 되고 싶었는데, 또 막상 돼보니까 기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꾹 눌러둔 진심이 엉겁결에 튀어나왔다.

16558027750369.jpg“……”

부자가 되었음에도 기쁘지 않다니.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윤완은 뭐라 답해줘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나린은 스스로 그 해답을 알고 있었다. 이 부는 제가 이룬 것이 아니다. 원래 친아빠의 것이었으니 뭐 어떻냐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나린의 신분이었다. 존재가 알려진 순간 아빠의 가정을 불행에 빠뜨렸을 혼외자라는 신분. 이 부의 대가로 잃은 것 또한 너무 컸다. 그녀에겐 부모나 진배없었던 외삼촌과 외숙모. 친구이자 자매였던 수정이.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랑하는 가족들. 매일 보던 정든 얼굴과 이별해서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들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다 큰 어른이니까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나린의 얼굴이 우울한 빛을 띠자 윤완도 덩달아 우울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소모적인 감정이 아직도 제 안에 남아 있었다니 당황스럽기만 하다. 때마침 애피타이저가 도착했다.

16558027750369.jpg“먹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조금이라도 기분이 풀어지기를 바란 그는 나린을 재촉했다.

16558027750361.jpg“네.”

몸 안으로 집어넣어도 되는 건가 싶은 호사스러운 음식이지만……. 사준다는데, 뭐 어때. 나린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애피타이저를 한 스푼 떠서 입에 넣었다. 입맛을 돋우는데 딱 적당한 산미가 혀를 자극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새롭고 신선한 맛이었다.

16558027812482.jpg

16558027750361.jpg“맛있어요.”

나린은 언제 우울했냐는 듯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러자 윤완의 입가에도 보일락 말락 미소가 번졌다. 윤완은 마치 복사기라도 된 것처럼 나린의 표정을 복사하고 있었다. 고작 이런 걸로 행복해한다면 매일이라도 사줄 수 있는데. 해줄 수 없는 말들만 자꾸 머릿속에 떠올라서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는 때아닌 과묵함을 고수하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