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한강이 있는 이유2021.07.23.
윤완이 차를 세운 곳은 한강변이었다. 나린은 답지 않게 낭만적인 장소를 고른 그에게 의외라는 시선을 보냈다. 꼬르륵. 나린의 배에서 흘러나온 생체반응 소리가 적막을 깨뜨린다. 인사를 다니느라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허기가 진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왜 하필 지금.’
창피해진 나린은 거북이처럼 목을 어깨 사이로 쏙 집어넣었다. 말없이 운전석에서 내린 윤완은 뒷좌석으로 가 포장된 빵을 꺼내왔다. 나린은 내밀어진 빵을 보며 헷갈려 했다. 친절했다가 불친절했다가. 변덕이 취미인가.
“고맙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빵을 한 입 베어 문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맛있는 빵이 존재했다니.
“지난번 사고는 괜찮아?”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서 윤완이 물었다.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음에도 나린에게는 그저 형식적인 안부 인사처럼 다가왔다.
“네. 괜찮아졌어요.”
아직 엘리베이터를 타면 가슴이 두근거리긴 하지만…….
“부사장님은요?”
“괜찮아.”
나린이 다시 빵에 열중한다. 바사삭,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자잘한 부스러기들이 먼지처럼 흩날렸으나 윤완은 괘념치 않았다. 자신의 공간이 어질러지는 걸 보아내지 못하는 그로서는 가히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근데 이 빵 어디서 샀어요? 완전 맛있어요.”
나린이 감탄하자 윤완은 어이없단 표정을 했다.
“너네 호텔 베이커리.”
“아.”
테라 호텔에서 이런 것도 파는구나. 머쓱한 웃음이 나린의 입가를 스친다.
“자기 회사에 관심을 좀 갖지?”
“저희 회사는 도일 전자인데요.”
나린의 대꾸에 윤완은 피식 웃었다.
“애사심이 대단한 건 칭찬해 주겠지만 틀렸어. 회사의 주인은 직원이 아니라 주주니까.”
네……. 어련하시겠어요. 불만이 실린 나린의 입술이 삐죽 앞으로 튀어나왔다.
“전 그럼 회사가 없네요. 증권 계좌 비밀번호도 가물가물하거든요.”
“곧 받게 되겠지, 테라 호텔 지분.”
나린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또 한 번 손발이 묶이는 기분이었다. 이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근데, 내가 안 왔으면 어디 가 있을 생각이었어?”
윤완이 화제를 돌릴 겸 물었다. 뭘 믿고 그렇게 용감했던 건지 궁금했다.
“찾아보면 뭐, 어디 있을 데 없었겠어요?”
……정말 아무 대책 없었구나.
“그렇게까지 해서 태준이랑 그 여잘 만나게 해준 이유가 뭐야?”
“그냥……. 안 됐잖아요, 두 사람.”
나린의 선택 하나하나가 윤완의 눈엔 아슬아슬하게만 보인다. 태준과 만나는 척 어른들을 속이는 것도, 태준이 지아를 만나도록 도와준 것도. 그러나 충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 이상은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실은 이렇게 함께 있어 주는 것부터가 충분히 개입하고도 남은 것이었다. 왜 이 아이에게만큼은 마음이 물러지는지 도통 불가사의다. 대책이 있든 없든, 선택이 아슬아슬하든 말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 시간에 한강, 오랜만이네요. 너무 예쁘다.”
배가 차자 여유가 생겼는지, 나린이 정면 유리를 투과하는 야경에 눈을 돌리며 찬탄했다. 윤완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작 강물 하나에 행복해하는 그녀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서울에 한강이 있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알쏭달쏭한 퀴즈가 툭, 나린의 입술 새로 삐져나오고,
“서울에 한강이 있는 게 아니라 한강이 있는데 서울이 정해진 거겠지.”
윤완은 사실에 입각하여 대답했다.
“재미없네요.”
“그럼 재밌는 대답은 뭔데?”
“누가 그러는데 서울에 한강이 있는 건 연인들을 위해서래요.”
“…….”
“너무 맞는 말 같지 않아요? 생각해보세요. 한강이 없었으면 도시가 얼마나 삭막했겠어요. 낭만이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을 거예요.”
못 들을 얘길 들은 사람처럼 윤완의 얼굴이 한껏 구겨졌다. 그 표정이 우스워서 나린은 슬며시 아랫입술을 물어 삼켰다.
“누가 그런 유치하고 허무맹랑한 소릴 해?”
“대학 때 만났던 남자친구가요.”
나린은 끝내 쿡쿡,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윤완의 얼굴이 재차 구겨진다. 이 여자가 겁도 없이 다른 남자 얘길 한다. 날 옆에 두고 지나간 사랑을 추억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남자 보는 눈을 키워야겠네.”
윤완은 삐딱하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왜 이 터무니없는 얘기에 제 귀중한 시간을 기꺼이 내어주고 있는지 자문했다. 어제 수정 보고받은 뉴델리 투자 건이나 검토할걸. 하지만 이 알맹이 없는 대화가 묘하게 즐겁다는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다.
“고마워요…….”
눈앞의 한강에 시선을 둔 채로 불시에 나린이 내뱉었다.
“…….”
“사실…… 오늘 와주지 않으셨으면 많이 곤란했을 거예요. 이런 차림으로 시내를 돌아다녀 본 적도 없고, 발도 많이 아팠고요.”
너른 강물같이 속을 탁 터놓는 나린의 옆얼굴은 그가 봐왔던 그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앞으론 남을 돕더라도 상황 봐가면서 해. 자기 생각도 좀 하고.”
더 개입하지 않으리란 맹세를 깨고 충고를 던진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진심 어린 조언에도 나린은 대꾸 없이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그때 손에 쥔 나린의 폰이 부르르 진동한다. 태준으로부터 전화가 온 거였다.
“여보세요?”
[나예요, 나린 씨.]
“지아 씨랑 얘기 끝났어요?”
[네. 어디로 데리러 가면 돼요?]
“아, 여기가 그러니까…… 한강인데…….”
[한강이요?]
“그러니까…….”
나린이 곤란해하며 도움의 눈길을 보내서 윤완이 나린의 폰을 빼앗아 들었다.
“나.”
[윤완이? 너 나린 씨랑 같이 있어?]
“어.”
윤완은 태준에게 정확한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15분이면 도착한대.”
전화를 끊은 그는 나린에게 폰을 건네며 일렀다.
“네.”
그러다가 속살이 훤히 드러나 있는 나린의 어깨에 시선이 닿았다. 윤완의 얼굴이 다시금 붉게 달아오른다. 나린이 저대로 태준의 차에 탄다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어졌다.
“겉옷 좀 제대로 입지?”
“네?”
나린은 그제야 상체를 덮은 줄 알았던 코트가 무릎까지 흘러 내려가 있는 걸 발견했다.
“아, 네.”
옷차림까지 지적하다니 이상할 정도로 예민하다고 생각했지만 얌전히 그의 말을 따랐다. 나린이 팔을 끼워서 코트를 입는 걸 확인한 윤완은 그제야 안도하였다. *** 태준의 차는 금방 나린과 윤완이 있는 곳을 찾아왔다. 태준이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 윤완과 나린도 차에서 내린다.
“같이 있는 줄 몰랐네.”
태준은 설핀 웃음을 웃어 보였다. 지아와 끝냈다고 하면서도 계속 휘둘리는 태준을 윤완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그래서 지아에 관해서 만큼은 늘 윤완의 눈치가 보였다.
“그럼 내일모레 회사에서 봬요.”
태준의 차로 옮겨간 나린이 단정히 고개를 숙였다.
“…….”
흔들려선 안 된다. 이 정체 모를 감정은 신상 장난감을 대하는 어린아이의 호기심 정도에서 그쳐야 한다. 윤완은 나린에게 작은 고갯짓으로 답해주며 방황하는 마음을 다독였다.
“그럼, 간다.”
짤막한 인사를 던진 태준이 차에 오르고 나린도 조수석으로 들어갔다. 멍하니 서 있던 윤완 또한 쫓기듯 차에 올랐다. 안전벨트를 채운 뒤 시동을 걸고 액셀을 밟자 윤완의 차가 오른쪽을 향해 가파른 곡선을 그린다. 그토록 황망히 떠난 건 태준의 차를 타고 멀어지는 나린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
“윤완이랑은 어떻게 만났어요?”
진득하니 운전대를 굴리던 태준이 침묵을 깼다.
“아, 부사장님이 전화하셨어요. 어디냐고.”
“이상하네요. 윤완이 녀석, 남한테 그렇게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닌데.”
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안 그래도 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회사에서는 완전 냉혈한인데, 한 번씩 잘 해주실 때가 있거든요.”
“냉혈한이요? 하하.”
재밌는 여자. 의외로 거침없는 면도 있고.
“그, 신혜원……? 그분이랑 약혼할 사이라고 들었는데…….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분이 벌인 일이 미안해서.”
나린은 나름 합리적인 추론을 해보았다.
“아닐걸요. 혜원이야말로 윤완이한텐 철저하게 남이거든요.”
“약혼할 사이인데도요?”
“네. 오히려 그래서 약혼 얘기라도 오가는 거예요. 부모님께서 원하는 상대니까 두고 보는 거죠. 연애, 결혼, 사랑. 그런 거엔 조금도 관심 없거든요, 도윤완은. 냉철하고, 이성적이고……. 가끔 진짜 로봇인가 싶을 정도니까요.”
“역시……. 냉혈한 맞네요.”
“하하하.”
태준은 또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어딘지 그리움에 잠긴 표정이었다.
“제 생각엔 다현이 때문일 것 같아요.”
“……언니……요?”
내놓고 언니라는 호칭으로 불러도 될지 몰라서 나린이 살짝 말을 더듬는다. 아까 준우도 그렇고, 지금 태준도 그렇고. 그들에게는 어쩌면 자신의 존재가 그리운 이를 추억하게 하는 매개체일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린 씨, 다현이랑 묘하게 닮았거든요.”
언니가 어떻게 생겼었더라. 지난번에 기사 사진으로 본 것 같은데. 나린은 기억을 헤매느라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태준은 겸연스러운 얼굴을 했다.
“혹시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나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래도 자매인데, 닮은 구석이 있겠죠.”
“윤완이 녀석이 제대로 된 대화라도 했던 여자는 다현이가 유일할 거예요. 준우랑도 천생연분이었는데…….”
다현을 떠올리자 소회에 젖었는지 태준은 묻지도 않은 얘기를 술술 늘어놓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죽은 동갑내기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나린은 잠자코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 나린 씨 봤을 때 우리 다 되게 놀랐어요. 다현이랑 많이 닮아서. 특히 눈이요.”
그렇구나……. 정말 그래서일지도. 나를 보면 죽은 언니가 떠올라서……. 나린은 그제야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윤완의 행동에 납득할 만한 근거를 갖다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작 윤완 본인은 나린을 보며 단 한 번도 다현을 떠올린 적 없었는데. 당사자는 조금 억울할지 모를, 작은 오해가 그렇게 싹을 내밀고 있었다.
“그래도 다른 점도 많아요. 특히 성격은 완전 다른 것 같아요.”
“…….”
“다현이였다면 오늘 그렇게 나서지 않았을 거예요. 조용한 걸 좋아하고 은근 예민한 성격이기도 했고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언니 얘기를 듣고 있자니 심란해진 나린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돌아가신 아빠도, 죽은 언니도. 감히 내가 그리워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어서. 아니, 무얼 그리워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어서.
“……”
“다현이는 호불호가 분명해서 싫어하는 사람은 상종을 안 했어요. 오늘 지아를 데려왔던 그 윤재오가 대표적으로 다현이가 싫어했던 사람이에요.”
태준이 운전대를 오른편으로 꺾자 차체가 서서히 좁은 골목 어귀로 진입했다.
“저도 호불호는 강한 편인데.”
무심결에 나린이 대꾸한다.
“그래요? 전혀 티 안 나는데요.”
“대학 때까진 그랬는데, 회사 들어가고 나서 바뀌었어요. 회사에선 좋은 사람만 보고 살 순 없거든요.”
태준 씨나 도윤완 부사장님 같은 사람들은 이해 못 하겠지만.
“그렇군요.”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린 씨.”
연 회장의 저택이 저 멀리서 위용을 드러낼 무렵, 태준이 진지한 어조로 나린의 이름을 불렀다.
“네……?”
“오늘 고마웠어요. 매번 도움만 받는 것 같네요.”
진심을 담은 인사가 나린의 따스한 미소를 이끌어냈다.
“아니에요. 그, 한지아 씨랑은 얘기 잘했어요?”
“네. 지아도 나린 씨한테 고맙대요.”
“지아 씨한테 저랑 진짜로 약혼할 사이 아니라는 거 잘 설명했고요?”
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린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오늘 나린이 태준을 도운 건 꼭 안쓰러운 마음에서만은 아니었다. 저 가여운 연인을 외면한다면 정말로 그들 사이에 낀 악역이 되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늦었는데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나린 씨도 조심히 들어가요.”
나린은 태준의 다정한 미소를 뒤로한 채 차에서 내렸다. 딩동. 초인종을 누르고 나자 비로소 길었던 하루의 마지막에 이르렀음을 실감했다. 요란했던 세훈의 생일 파티와 지아를 돕기 위해 감행한 비밀 작전. 뜻하지 않게 받은 준우, 윤완의 도움과 태준으로부터 들은 다현에 관한 얘기까지. 짧은 시간 안에 욱여진 많은 사건 중 잠들기 전 떠올린 건 결국 윤완과 함께 보았던 밤의 한강이었다. 차 안에서의 조곤조곤했던 대화. 달콤했던 에끌레르의 향. 다리의 인공조명을 받아 반짝이던 까만 물비늘……. 덕분에 나린은 기억나지 않는, 아주 따스하고 포근한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