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바보 같은 여자2021.07.20.
지아를 연회장 밖으로 데리고 나온 나린은 리셉션에 부탁해 룸부터 예약했다. 우선은 지아의 상태를 추스를 곳이 필요했다.
“본관 프런트로 가셔서 안내 받으시면 됩니다.”
친절한 가이드를 따라 밖으로 나왔는데 본관 건물이 생각보다 멀리 있어서 당황하고 만다. 이런 차림에 이런 신발로, 저기까지 무사히 걸어갈 수 있을까. 그때 두 사람의 옆으로 긴 그림자가 졌다. 그림자의 주인은 전혀 예상 밖의 인물. 준우였다.
“기다려요. 본관까지 태워다 줄게요.”
상상도 못한 이의 등장이었지만 시의적절하게 뻗친 도움의 손길에 나린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발렛 요원이 차를 가져오고, 나린과 지아는 준우의 차를 타고 수월하게 이동했다. 준우는 나린을 다시 연회장으로 태워갈 목적에서 룸까지 동행해주었다. 욕실로 들어간 지아가 망가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사이 나린이 준우에게 재차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마워요.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아니에요. 근데, 되게 용감하던데요.”
“……네?”
“혜원이한테 맞선 거 말이에요. 웬만해선 못 그러거든요.”
준우의 미소는 다정하면서도 아련했다. 나린은 문득 준우가 제 앞에서만 슬픈 색을 띠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착각일 수도 있지만……. 드르륵, 육중한 욕실 문이 옆으로 밀리며 지아가 나온다. 나린은 지아에게로 다가섰다.
“괜찮으세요?”
“네.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나린을 보는 지아의 눈빛이 묘했다. 아까 태준과 팔짱을 끼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던 모습을 본 것이었다.
‘이 사람이…… 언젠가 오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던 오빠에게 어울리는 사람…….’
지아는 도움을 받은 것도 잊고 질투심에 휩싸였다. 그저 집안 하나 잘 만났단 이유로 내 행복을 가로채다니. 오빠가 좋아하는 사람은 난데……. 서로 좋아하는 건 우리인데. 새삼 나린에게 구출 받았다는 사실이 속상하고 자존심 상했다.
“저기, 부탁이 있는데요.”
지아의 시선이 당돌하게 준우를 향하였다.
“……뭐죠?”
이번엔 나린을 돌아보는 지아였다.
“죄송한데 자리 좀 피해 주시겠어요?”
“아. 네.”
나린이 문 쪽으로 몸을 비트는데,
“아니요. 있어요, 나린 씨.”
지아와 단둘이 남는 게 부담스러운 준우가 걸음을 붙들었다. 나린은 준우와 지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였다. 지아는 체념하고 준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태준 오빠를 좀 만나고 싶은데요.”
준우는 나린을 쳐다봤다. 나린에게 결정을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아.”
준우의 뜻을 알아차린 나린은 어떻게 할지 고심했다. 근데 내가 두 사람이 만나는 데 가타부타할 권리가 있을까. 어차피 형식적으로 만나는 척할 뿐인 사이인데……. 결론은 단숨에 지어졌다. 나린은 지아와 준우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러면 제가 연회장으로 가서 태준 씨를 여기로 보낼게요.”
“여긴 위험할걸요. 더군다나 파티 중간에 태준이만 사라지면 어른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실 텐데.”
지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준우가 관여하여 작전의 엉성함을 짚어준다.
“음, 그러면…….”
나린이 다시 고민에 빠지고.
“이건 어때요? 파티 끝나면 제가 태준 씨한테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지아 씨가 태준 씨랑 만나고, 저는 다른 데서 시간 때우다가 집에 들어가면 될 것 같은데…….”
스스로 세운 보완책이 마음에 드는지 나린은 뿌듯한 얼굴로 준우를 쳐다봤다. 준우는 자신이 알리바이가 되어서라도 태준과 지아를 도우려는 나린이 기가 막혔다. 자기한테 득이 될 게 하나도 없는 일에 이렇게까지 적극적이라니. 연다현. 네 동생은 아무래도 바보인 것 같다…….
“알아서 해요.”
그런 뒤 볼일이 끝났다는 듯 밖으로 나가 버린다.
“그럼 지아 씨, 잠깐 여기 있어요. 파티 끝날 때쯤 연락할게요.”
나린은 빠르게 당부하고 졸래졸래 준우를 뒤따랐다. 룸을 나서는 나린을 보던 지아의 눈이 이내 그렁그렁해졌다. 다른 여자가 약혼할 사람과 따로 만나고 싶다는데, 화를 내기는커녕 나서서 도와주다니. 어째서…… 저런 여자인 거지. 어째서 저토록 바보같이 착한 여자인 거야. 못된 사람이면 마음껏 미워하기라도 할 텐데. 지아는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 로비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중에 준우가 나린을 향해 살포시 고개를 내려뜨렸다.
“세훈이가 말 안 했죠?”
핵심이 쏙 빠진 질문에 나린의 고개가 기우뚱해졌다.
“……네? 뭐를요?”
무구하게 올려다보는 나린의 눈빛에 대고 준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나린 씨 언니랑 약혼한 사이였다는 거요.”
“아…….”
나린의 오른손이 제 입술 위를 덮는다. 그제야 자신의 앞에서만 아련해지고 슬퍼지던 그 얼굴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따금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 눈빛을 모조리 이해하게 되었다.
“……네. 얘기 못 들었어요.”
“오늘 나린 씨 도와준 건 그래서예요. 다현이 동생이니까.”
밝은 어조를 유지하는 준우를 보며 나린은 어쩐지 죄책감이 앞섰다. 언니가 살아 있었더라면 나를 흔연히 받아들여 주었을까. 언니와 같은 해에 잉태된 배다른 동생을……. 언니의 엄마를 슬프게 했을 혼외자의 존재를……. 살다 보면 잘못한 것 없이 죄책감을 가져야 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단 걸 이런 식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런 얼굴 할 거 없어요.”
눈치 빠른 준우는 그런 나린의 마음을 읽어냈다.
“다현이가 나린 씨를 봤으면 동생 생겼다고 좋아했을 거예요. 아마 세훈이보다 훨씬 예뻐했을걸요.”
확신에 찬 준우의 음성이 위로처럼 나린의 귓전을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그럴 리가요. 저는 언니에게 달가운 존재가 아닌걸요.”
한껏 풀이 죽은 나린은 이미 준우에게 들켜버린 속내를 담담히 풀어놓았다. 테라 그룹으로 들어온 뒤 줄곧 마음 한구석에 쌓여가고 있던 불편함이기도 한……. 어느 누구에게도 속 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었던 미안함의 감정.
“아뇨.”
그럼에도 준우는 단호했다.
“다현이는 이 상황이 나린 씨 잘못이 아니란 걸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좀 더 당당해져도 돼요.”
“…….”
위로 차 꾸며낸 말인지 진심인지 헷갈려서 나린이 물끄러미 준우를 쳐다본다.
“세상에서 다현이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하는 말이니까 믿어도 돼요.”
준우는 나린의 눈을 들여다보며 웃어주었다. 그 표정에서, 그 말투에서 준우가 얼마나 다현을 사랑했는지 여실히 느껴져 왔다. 가슴이 뭉클해지며 나린의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차가 도착하면서 대화가 중단되었다. 준우와 함께 연회장으로 되돌아온 나린은 그 길로 채 여사에게 끌려갔다.
“왜 이제 오니? 소개해야 할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
나린이 채 여사와 떠나고 혼자가 된 준우는 곧장 친구들을 찾아 나린의 계획을 공유해주었다.
“진짜……?”
태준은 나린이 기꺼이 알리바이를 자처했다는 말을 듣고 믿을 수 없어 했다. 지아를 구해준 것만으로도 이미 빚을 진 기분인데……. 역시 좋은 여자라고, 말할수록 느껴지던 호감이 틀린 게 아니었다고 속으로 감탄한다. 반면 윤완의 얼굴엔 한껏 불만이 서렸다. 채 여사를 따라다니며 여기저기 인사를 하고 있는 나린을 주시하다가 자그맣게 한숨을 뱉는다. 저 차림을 하고 어디에서 혼자 시간을 때우겠다는 걸까. 정말이지, 바보 같은 여자.
“오빠. 나 어때?”
어느 틈에 새 옷을 구했는지 바뀐 드레스 차림의 혜원이 다가와 윤완의 팔에 들러붙었다. 윤완은 귀찮은 기색으로 혜원을 떼어내고 자리를 피해버렸다. 세훈은 속상해하는 혜원을 동정하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하필 걸려도 제일 어려운 상대한테 걸려선.’
연회장 깊숙한 곳, 구석진 귀퉁이에선 호기심 어린 두 개의 눈동자가 나린의 움직임을 열심히 좇고 있다. 방금 전 나린에게 파트너를 빼앗긴 재오였다. 재오는 태준을 괴롭힐 기회가 허무하게 사라진 게 짜증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린에게 관심이 갔다. 자신을 경멸했던 연다현과 똑 닮은 눈매. 그럼에도 지아를 구해주는, 다현과는 전혀 다른 대범함. 나린은 꼭 다현의 대체재 같았다. 재오는 저를 경시하던 다현에게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었다. 이젠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상대를 여전히 놓지 못한 건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분풀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현의 살아생전, 다현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굴었던 저 네 사람 탓에 분풀이는커녕 접근조차 어려웠으니. 그런 재오에게 다현을 닮은 누군가의 등장은 반갑고도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저 여잘 잘 이용하면 어떻게, 저 녀석들 속을 긁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재오는 묘안을 짜내려 인상을 찌푸렸다. *** 파티가 끝날 무렵 나린은 지아를 위해 수립해둔 작전을 개시했다.
“저, 끝나고 태준 씨가 바래다주기로 했는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채 여사는 반색하며 나린의 요청을 수락했다.
“그러렴.”
마음에 안 들면서 억지로 만나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다행이지 싶었다. 제법 가까워지고 있나 보다, 단단한 착각이 똬리를 튼다.
“좀 늦을 수도 있어요.”
“11시 전에는 들어올 거지?”
“네.”
나린은 한시바삐 자리를 떴다. 거짓말을 하고 나니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 탓이었다. 그다음엔 본관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지아가 있는 룸으로 연결했다.
“호텔에서 만나면 눈에 띌 수도 있을 테니 근처 카페에 가 있는 게 좋겠어요. 태준 씨한테 카페 이름 알려주고요.”
[알겠어요.]
전화를 끊기 전 지아는 짤막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파티가 막을 내린 후 나린은 태준의 차를 타고 호텔을 빠져나왔다.
“이렇게까지 도와주지 않아도 되는데.”
운전대를 쥔 태준이 조수석을 힐끔거리며 머쓱해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정말 고마워요, 나린 씨.”
나린은 이왕 돕게 된 김에 더 확실히 도와주고 싶을 뿐이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 커플 같은, 이 안쓰러운 연인을. 지아가 기다리고 있다는 카페는 그리 멀지 않았다. 10분도 채 안 되어 목적지 주차장에 도착한 태준은 네모 칸에 맞춰 바르게 차를 댔다.
“지아 보내고 연락할게요. 어디 따뜻한 데 가 있어요.”
태준은 내릴 채비를 하는 나린을 보며 일렀다.
“괜찮아요. 그냥 시간 맞춰서 혼자 들어가면 돼요.”
“안 돼요. 택시에서 내리는 거 누가 보면 곤란해질 수도 있고…….”
아. 배려가 아니라 들통 날까 봐.
“그렇겠네요. 그럼 전화주세요.”
지아가 주차장으로 내려오기 전에 자리를 뜰 심산으로 서둘러 차에서 멀어진다. 높아도 너무 높은 힐 탓에 한 걸음 뗄 때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듯 발이 너무 아팠다. 지이잉. 통증을 참아가며 겨우 1층으로 올라왔는데 클러치백 안에서 폰이 진동했다. 나린은 발신자를 확인했다. 액정 위에 떠올라 있는 ‘도윤완’, 세 글자를 보자 머릿속이 의문 부호로 가득 찼다.
“여보세요?”
[어디야?]
윤완은 다짜고짜 나린의 소재부터 캐물었다.
“여기요?”
[…….]
“여기, 별 카페 앞인데…….”
[호텔 나가서 좌회전 하면 한 블록 뒤에 있는 거?]
“맞아요. 그런데 왜요?”
나린은 순순히 위치를 일러주면서도 어리둥절해했다.
[데리러 갈게. 있어.]
“네……?”
나린의 반응은 철저히 무시된 채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기고 말았다.
‘하여간 제멋대로 구는 건 일등이지.’
입 끝을 실그러뜨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고마운 마음이 생겨났다. 누가 봐도 한껏 차려 입은 모양새에 걷기 힘든 신발까지. 시내를 쏘다니기에 가장 최악의 상태에서 데리러 온다니 은인처럼 여겨진다. 윤완의 차가 도착한 뒤 나린은 냉큼 옆자리에 올라탔다.
“감사합니다.”
그가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감사 인사를 했다. 어쩌면 세훈이 부탁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페퍼’ 때 윤완을 대신 내보냈던 것처럼.
“바보야? 어디서 시간 때운다고 이런 일에 협조해.”
윤완은 참지 못하고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바보 같은 여자. 거리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던 모습을 보고 나니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대체 왜.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왜요, 007 작전 수행하는 것 같고……. 나름 재밌었어요.”
나린은 장난스레 대꾸했다. 윤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근데 어디 가는 거예요?”
화제를 전환할 겸 나린이 창밖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잠깐 차 세워두고 있을 만한 데.”
“그런 데가 있어요?”
“…….”
윤완은 답을 해주지 않았지만 나린도 적응이 되었는지 별로 기분상해 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쯤이야. 기껏 사다준 커피도 싸구려라고 무시하던 사람이니까. 불현듯 차 안 공기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린은 상체를 흔들어 어깨에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 동그란 어깨가 드러나며 윤완의 시야 끝에 희끄무레 걸린다. 교차로 빨간 신호등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은 윤완은 본능적으로 나린을 돌아보았다. 하얗게 빛나는 자그만 어깨를 마주하고 나니 윤완의 두 볼이 붉게 물들었다.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 확, 온몸에 열이 오르는 느낌과 함께. 똑같은 드레스인데도 연회장에서 보던 것과 전혀 다른 감상이었다. 열기를 느낀 윤완은 히터부터 껐다. 나린은 자신이 코트를 벗자마자 히터를 끄는 윤완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도와주겠다는 건지, 괴롭히겠다는 건지. 코트를 끌어안으며 속으로 나직이 툴툴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