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강렬한 데뷔2021.07.16.
파티가 열릴 테라 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세훈은 아까의 그 의미 모를 전화 통화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지아 얘기 태준이한테 들었지?”
“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세훈은 한숨부터 쉬었다.
“걔가 오늘 파티에 오는 것 같아. 아까 참석자 명단에 윤재오 파트너로 기재돼 있더라고.”
“아.”
나린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뱉었다. 이건 곧 있을 파티에서 태준의 가짜 연인 행세를 하며 진짜 연인을 맞닥뜨려야 한다는 얘기.
“어른들께서 이런 유치한 짓을 꾸몄을 리는 없고, 상준이 형이랑 재희 누나가 쿵짝쿵짝했겠지. 그런 데 있어서는 손발이 잘 맞는 사람들이니.”
“…….”
“근데 왜 하필 윤재오냐. 그게 걸리네.”
“윤재오……가 누군데요?”
“PK 백화점 전무인데, 우리랑 좀 안 맞아.”
세훈이 미간을 좁히며 답하고 나린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라 함은 윤완, 태준, 세훈, 준우 이 넷을 가리킬 것이었다. 그나저나 세훈 오빠와 안 맞는 사람이라니. 세훈 오빠는 도윤완 부사장 같은 사람이랑도 친구 하는 보살님인데. 그런 사람과 선을 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등골이 선뜩해졌다. 태준과의 연극이 감수할 만한 위험처럼 느껴진다. *** 테라 호텔로 향하는 또 다른 차 안. 까무잡잡한 피부에 짙은 쌍꺼풀을 가진 남자가 뒷좌석에 앉아 있다. 남자는 어딘지 비정한 기운을 풍겼다. PK 백화점 강남점장, 윤재오 전무. 조소 어린 그의 표정이 가리키는 곳에는 가냘픈 지아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명색이 파트넌데 표정이 그게 뭐야?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네.”
지아는 히죽히죽 웃는 재오의 표정에 소름이 끼쳤다.
‘한지아 씨, 이번 주말에 윤재오 전무님 일정 좀 수행해줘야겠어. 휴일 근무 상신하고.’
상사로부터 하달된 명령은 사실상 거부권이 없는 것이었다. 지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재오의 일정에 동행하게 됐다. 하지만 이 부당한 업무 지시에도 가슴 한구석에는 작은 희망이 싹텄다. 그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 억울하게 이별을 당해야만 했던……, 그럼에도 결코 놓아 버릴 수만은 없는 그. 지아가 재오를 외면하는 가운데, 재오는 지아를 쳐다보며 연신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사실 재오도 처음부터 지아와 동행할 생각은 아니었다. 애당초 회사에 한지아라는 직원이 존재한단 사실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일주일 전 친누나 재희가 이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너네 회사에 한지아라고 있지? 걔, 이번 연세훈 생일 파티 때 좀 데려와라.’
왜냐고 시큰둥해하는 재오에게, 재희는 그녀가 태준의 연인이었으며 집안의 반대로 헤어진 사이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상준이가 이번에야말로 싹을 밟아버리고 싶어 해. 마침 이태준이랑 선본 그, 연다현 동생도 온다니까 절호의 찬스 아냐?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제 주제를 알겠지.’
태준의 사촌 형이자 신화 그룹 후계자로 알려진 상준은 재희와 절친한 사이였다. 윤완을 싫어하는 재오는 재희의 말을 듣고 구미가 당겼다. 재오는 어릴 적부터 윤완에게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세월을 따라 무럭무럭 자라난 열등감은 윤완과 혜원 사이에 혼담이 오가는 걸 안 뒤로 걷잡을 수 없이 팽창했다. 그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여신 혜원이 윤완의 상대로 낙점되다니. 제일 좋은 건 언제나 도윤완의 차지다. 거기에다 자신을 경멸했던 죽은 연다현과 그녀의 약혼자 명준우, 사촌 오빠 연세훈까지. 태준에게는 그나마 악감정이 덜 했지만 어쨌든 그들과 한패이니 적은 적이었다.
‘그 패거리를 골려줄 기회인데 안 할 이유가 없지.’
태준의 표정이 벌써부터 기대가 돼서 재오는 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섬뜩한 웃음소리에 지아는 안 그래도 움츠러든 어깨를 더욱 움츠러뜨렸다. *** 하이힐이 익숙지 않은 나린이 세훈의 에스코트를 받아 전통 한옥 양식의 연회장 건물로 들어선다. 연회장 초입 리셉션 홀에서 태준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훈은 태준을 보자마자 나린의 팔을 넘겨주었다. 집안 어른들도 참석하시는 자리. 이 가짜 연인이 열연을 펼쳐야 할 시간이 임박했다.
“너…… 잘할 수 있겠냐?”
지아가 온단 사실이 못내 불안한 세훈이 태준에게 물었다.
“걱정 마.”
당당히 대답한 태준은 나린을 쳐다보았다.
“나린 씨. 괜찮겠어요?”
“네.”
나린은 꼴깍, 침을 한번 삼켰다. 이렇게 하면 혹시나 긴장이 풀어질까 봐. 세훈이 앞장서고 나린도 태준의 팔짱을 낀 채로 그 뒤를 따른다. 세 사람은 리셉션 뒤편 정원을 지나 연회장이 위치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태준은 세훈에게 장담한 것과 달리 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지아부터 찾았다. 지아를 발견해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재오와 함께인 지아를 보자 태준의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태준은 나린과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지아에게 보일까 초조해졌다. 나린은 영민하게도 이 모든 낌새를 알아챘다. 저 멀리 어느 어여쁜 여자에게 고정된 시선도, 움찔거리는 팔짓도 전부 알아채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으니.
“저 도윤완 부사장님한테 인사하고 올게요.”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윤완이 있어서 나린은 되는 대로 핑계를 대며 먼저 팔짱을 풀었다.
‘그래도 그렇지. 하필이면 도윤완 부사장을.’
속으로는 한껏 당황해 버렸지만.
“아. 같이 가요.”
“아니에요. 회사 일로 뭐 말할 것도 있고.”
임기응변으로 둘러댄 나린은 붙잡힐세라 바삐 윤완 쪽으로 향하였다. 윤완의 시선이 어느새 두어 발짝 앞으로 다가온 나린을 향해 내리깔렸다. 가슴은 마구 요동쳐대고 있었지만 애써 덤덤하게. 하얀색이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더 예쁠 거다. 하……. 미친 게 분명해, 도윤완.
“부사장님,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야.”
삐딱하게 대꾸한 건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태준과 다정하게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던 모습. 그걸 본 순간 몸 안의 창자가 요동을 쳐대는 것 같던 불쾌한 감각. 윤완의 삐딱함을 마주한 나린은 후회막급이었다. 아무리 급했어도 도윤완 부사장 쪽으로 오는 건 아니었는데.
“그냥…….”
나린이 애써 변명을 짜내려던 그때였다. 와장창! 요란한 파열음이 들려오며 홀 안의 이목을 휩쓸어 간다. 윤완과 나린도 동시에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그곳엔 분노에 차서 부들거리는 혜원과 고개를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지아가 있었다. *** 고의는 아니었다. 재오가 불시에 팔을 뻗었고 지아는 그걸 피하려 했을 뿐이다. 그 뒤로 마침 와인잔을 든 혜원이 다가오고 있었던 건 정말이지,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지아의 등이 혜원의 팔과 부딪혔고, 와인잔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그 바람에 사방으로 튀어 오른 레드 와인이 혜원의 연분홍 드레스 자락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악! 이게 무슨 짓이야?!”
비명에 가까운 혜원의 고함에 지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상체를 굽혔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못 보고 그만……. 정말 죄송해요.”
“재오 오빠, 얘 뭐야?!”
짜증 가득한 혜원의 얼굴이 자신을 향하자, 재오는 재밌는 생각이 났는지 능글맞은 미소를 띄웠다.
“아, 미안. 심심풀이로 데려왔는데, 꼭 이렇게 티를 내네.”
말을 마친 재오의 시선은 짧게 태준을 스치고.
‘혜원이 네가 함부로 분풀이해도 되는 상대야.’
재오가 건넨 말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었다. 재오와 죽이 잘 맞는 혜원이 그걸 놓칠 리 없었다. ‘심심풀이’로 규정된 지아의 신분을 확인한 혜원은 망설임 없이 지아의 뺨을 내갈겼다. 짝! 강한 마찰음과 함께 고개가 돌아가며, 지아가 맥없이 널브러진다. 동시에 태준의 눈에선 불꽃이 튀었다. 태준이 지아 쪽으로 달려가려는 순간, 세훈이 태준을 꽉 붙들어 맸다.
“안 돼. 지금 나서면 지아만 더 곤란해져.”
그랬다. 여기서 공개적으로 나서면 이후 지아가 당하게 될 모욕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미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는 태준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태준은 힘없이 양팔을 떨어뜨렸다. 분노를 참느라 온몸이 덜덜 떨려온다.
‘젠장!’
‘젠장!’
스스로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인지 지아를 만난 후로 수도 없이 깨달았다. 집안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래서 집안에 맞설 수도 없는……. 사랑하는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 허수아비. 참담한 패배감이 그를 덮쳤다. 그때 하얀 스커트 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온 누군가가 지아를 붙잡아 일으켰다. 군중 속에서 유일하게 내밀어진 도움의 손길에 지아는 물기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괜찮으세요?”
“……네.”
지아가 울먹였다. 혜원의 날카로운 시선이 ‘감히’ 저에게 맞서 지아를 도운 그녀에게로 향한다. 눈썰미가 좋은 혜원은 드레스 숍에서 딱 한 번 본 적이 있는 그 얼굴을 단박에 기억해냈다. 테라 호텔 고(故) 연성환 부회장의 혼외자.
‘연나린……이라고 했었나?’
“뭐 하는 거죠?”
혜원의 어조가 조금 누그러졌다. 아무리 혼외자라지만 명색이 테라 호텔 손녀고 오늘 파티의 숨은 주인공이니 함부로 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윤완의 절친인 태준과 약혼 얘기가 오가는 사이란 점 역시 부담으로 작용했지만.
“사람들이 봐요. 그만하시는 게 좋겠어요.”
나린은 차분하게 혜원을 얼렀다. 어디서 이런 용기가 샘솟았는지 모르겠다.
“내 드레스를 봐요. 진정하게 생겼어요?”
“고의가 아니었잖아요. 사과도 했고.”
“…….”
혜원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사과하면 다야? 이게 얼마짜린 줄 알고? 오늘 내 기분을 망친 건 어떻게 배상할 건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짜증들은 대외적인 이미지를 의식해서 꾹 참는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서는 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좋아요, 그럼. 사과는 받았으니 넘어간다 치고…….”
“…….”
“거기, 내 드레스는 어떻게 배상할 거죠?”
혜원은 지아가 현실적으로 가장 두려워할 질문을 찾아 던졌다. 저런 부류의 사람들에겐 금전적인 타격만큼 효과적인 게 없다는 걸, 평생에 걸쳐 아주 잘 체득하고 있는 혜원이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지아도, 나린도 아닌 더 뒤쪽에서 들려왔다.
“내가 하지.”
그것도 남자 목소리로.
“……윤완 오빠.”
윤완을 발견한 혜원의 얼굴이 억지 미소로 일그러진다. 윤완이 남 일에 나서다니 제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비싼 걸로 사줄게. 그럼 됐지?”
“그, 그래.”
윤완이 한 번 더 못 박아 말하자 혜원도 얼결에 수용했다. 그러다가 너무 많은 시선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혜원은 성질대로 다 분풀이를 하지 못한 게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이 물러나기로 했다.
“오빠가 이렇게 나오는데 내가 참아야지. 테라 호텔 손녀분 체면도 있고.”
혜원이 애교스러운 몸짓으로 윤완의 팔에 매달리자 나린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혜원은 전형적으로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타입처럼 보였다. 누구에게나 그런 면이 있겠지만, 강자에게 강할 용기는 없어도 최소한 약자에겐 약해야 한다. 나린은 적어도 그렇게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떤 식이든 일이 더 커지지 않고 일단락된 건 다행이다. 혜원이 물러난 뒤, 나린은 아직 울먹이고 있는 지아를 살폈다. 그때 재오가 끼어들어 덥석 지아의 손목을 붙잡고,
“내 파트너가 파티를 망칠 뻔했네. 미안해서 어쩌죠?”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이 이번에는 나린에게로 향하였다. 재오의 시야각 정중앙에 나린이 자리하는 걸 본 윤완은 슬그머니 주먹을 감아쥐었다.
‘대답하지 마. 저 녀석이랑은 말도 섞지 말라고.’
하지만 윤완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한 나린은 예의를 갖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근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파트너분을 잠시 빌려 가도 될까요?”
“네?”
뜻밖의 요구에 재오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감사합니다.”
그의 손아귀에서 지아를 빼낸 나린이 서둘러 연회장 밖으로 달아난다. 태준의 옆을 스칠 때, 안심하라는 의미의 눈짓을 하는 걸 잊지 않으면서. 나린이 떠난 후, 홀 안은 그녀에 대한 이런저런 말들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연 회장 뒤에서 채 여사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나린은 의도치 않은, 아주 강렬한 데뷔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