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진짜로 잘해 봐2021.07.09.
윤완을 만나고 온 나린은 신기하게도 악몽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윤완의 배려로 하루 쉴 수 있게 되었음에도 일찍부터 눈이 떠졌다. 일어나자마자 드레스 가봉 시간부터 앞당긴다. 그러자 채 여사의 다른 일정과 시간이 겹쳤다.
“정말 혼자 갈 수 있겠니?”
혼자 보내는 게 영 미덥지 않은지 채 여사가 재차 확인을 했다.
“그럼요.”
한 사장은 채 여사 없이 홀로 숍을 찾은 나린을 친절히 챙겨주었다. 드레스는 큰 문제 없이 잘 맞았고 나린은 순탄하게 가봉을 마쳤다. 이후에는 윤완이 예약해 준 정신과에 방문했다.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끝내 가는 쪽을 택한 건 일부러 명함까지 주며 배려한 그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사고를 겪었으니 상담을 받아보는 편이 좋을 것 같기도 했고. 예상보다 길어진 상담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자, 운전기사 아저씨가 빠릿빠릿하게 뒷좌석 문을 열어준다. 나린은 그 친절에 넙죽 응하지 못하고 머뭇대었다. 오랜만의 휴가.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는 아쉬운데. 평소의 나린이라면 집에 틀어박혀 뒹굴뒹굴하는 여유도 충분히 즐겼을 테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이라면 달랐다. 여전히 중압감이 짓누르는 대저택은 아직 온전히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현재 위치가 수정의 회사와 가깝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래, 모처럼의 공짜 휴가니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자. 나린은 결심을 굳혔다.
“저, 다른 볼 일이 생겼는데……. 점심 드시고 오실래요?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쯤 걸릴 거예요.”
“어디로 가십니까? 제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바로 근처예요.”
나린의 말에 운전기사는 가벼운 고개 인사를 남긴 채 차를 몰고 떠났다. 운전기사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나린은 바로 수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나린! 웬일이야?!]
줄곧 텍스트로만 연락하다가 목소리를 듣자 반가운지 폰 저편에서 수정이 밝게 소리쳤다.
“나 오늘 휴가인데……. 점심 같이 먹을 수 있어? 마침 너네 회사 근처거든.”
[오늘……? 음…….]
망설이는 수정의 반응에 짧았던 제 판단을 탓하였다. 점심시간이 코앞인데 약속이 없을 리가 없지. 거절당하겠구나 하고 단념하려는 찰나, 수정은 시원하게 승낙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뭐, 선약이 있긴 한데 여럿이라 빠질 수 있어.]
다행이다. 오늘은 꼭 수정이를 만나고 싶었으니까. 꼭, 오늘.
[지금 정확히 어딘데?]
“여기, Y몰 맞은 편.”
[걸어서 금방이네. 점심시간이 삼십 분 후부터긴 한데 눈치 봐서 일찍 나갈게. 일단 회사 앞으로 슬슬 걸어와. 도착하면 연락하고.]
“응.”
수정은 언제나처럼 발랄하고, 긍정적이고, 시원시원했다. 잠깐 못 보았는데도, 하나도 변한 구석 없이. 나도 그럴까. 나도…… 수정이가 알던 내 모습 그대로일까. 아직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열흘 남짓밖에 안 됐지만, 너무도 빠르게 많은 것이 변했다. 어쩌면 수정일 만나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잘해나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낯선 곳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건지. 생각에 잠겨 타박타박 걷다 보니 어느덧 수정의 회사 앞. 나린이 메시지를 보내고 오래지 않아 수정이 뛰어 내려온다.
“강나린! 이게 얼마 만이야!”
수정은 다짜고짜 나린의 목을 끌어안고 방방 뛰었다.
“잘 지냈어? 삼촌이랑 숙모도 별일 없으시지? 바쁘단 핑계로 안부 전화도 제대로 못 하네.”
“그럼! 우리야 완전 잘 지내지. 네 덕분에 엊그제 새 집으로 이사도 했는데.”
‘네 덕분’은 연태용 회장이 약속대로 새 아파트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에 나온 공치사였다. 그간 나린을 키워준 데에 대한 보답이자 나린이 태용의 집으로 들어가는 데 달린 조건이기도 했다. 그렇구나. 어느새 외삼촌도 외숙모도 수정이도, 나와 함께 살던 집을 떠나 나는 모르는 새로운 곳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이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간 건 백 번을 축하해도 모자를 경사인데, 어쩐지 휑뎅그렁한 기분이 든다.
“이사 간 집 주소 보내 줘. 저장해두게.”
나린은 수정이 걱정하지 않도록 밝은 어투를 꾸며냈다.
“당연하지. 근데 뭐 먹을래? 어디 갈까?”
“아무거나. 이 근처는 네가 더 잘 알잖아.”
“음. 저기 괜찮은 중식집 있어. 거기 해물 짬뽕 괜찮은데, 어때?”
“좋아.”
“진짜 얼마 만이야, 이게! 너 사는 얘기 좀 해 봐. 방이랑 드레스룸 사진만 봐도 어마어마하던데. 부럽다!”
기대에 부응하듯 수정은 나린이 다른 우울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연신 수선을 피워댔다. 어깨에 둘러진 수정의 팔에서 무한한 애정이 전해져 온다. 나린은 오랜만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 나린은 수정과 점심식사를 하며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소상히 얘기해주었다. 그중 수정의 관심을 끈 건 단연 태준에 관한 얘기였다. 맞선을 보았다고 말하자마자 폭포수처럼 쏟아진 추궁에 나린은 전부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태준에게 잊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는 것과 집안의 반대로 헤어지기로 하고 나린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 것. 서로 만나는 척 연극하게 된 것까지. 긴 얘기를 듣고 난 수정은 걱정부터 했다.
“그러다가 들키면 어떡해?”
“글쎄……. 혼나겠지……?”
난 다시 선 자리에 끌려나갈 테고. 혼나는 것보다 이게 더 문젠데…….
“만에 하나 그 사람이 마음을 바꿔서 약혼을 밀어붙이면?”
“안 그럴 거야. 비겁한 사람처럼은 안 보였어.”
또, 아직 다른 여자를 못 잊어 하는 남자니까. 생각해 보면 이것보다 더 안전한 방어 장치는 없었다.
“그래도, 그냥 선봐서 좋은 사람 찾는 게 낫지 않아? 큰어머니께서 그 집에 들어간 이상 그렇게 결혼해야 한다고 하셨다며.”
“난 그럴 생각 없어. 여기 분위기에 적응될 때까진 태준 씨 핑계로 시간 좀 벌어 보려고. 황금 같은 주말도 지키고.”
“그럼, 그 사람이랑은 주기적으로 만나는 거야?”
“응. 안 만나고 말로 때울까 했는데 그렇게 허술하게는 안 된대.”
“다음에 또 언제 만나기로 했는데?”
“오늘 저녁에.”
뜻하지 않게 깜짝 휴가를 얻은 나린 쪽에서 먼저 태준에게 연락을 취했다. 여유로울 때 번거로운 과제나 해치우자는 마음에서였다. 마침 저녁 약속이 없던 태준 또한 흔쾌히 응하면서 두 사람의 첫 가짜 데이트가 성사되었다.
“나도 끼워줘!”
수정은 매우 비장한 어조를 하고서 난데없는 요구를 해왔다.
“……뭐?”
“오늘 약속에 나도 데려가 달라고.”
나린은 곧바로 후회를 했다. 태준 씨랑 만난다는 얘긴 하지 말걸.
“이렇게 갑자기……?”
“뭐 어때? 진짜 데이트도 아니잖아.”
언제든 수정의 고집을 당해내기란 어렵다. 나린은 한발 물러섰다.
“왜 만나려는 건데?”
“그냥! 궁금해서! 내가 한 번 봐야겠어. 네 말대로 믿을 만한 사람인지.”
“…….”
“뭐, 겸사겸사 맛있는 것도 얻어먹고. 내가 언제 재벌이랑 밥을 먹어 보겠니?”
결국 마지막 줄이 핵심인 것 같다. 나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태준 씨가 싫다고 할 거야.”
“밑져야 본전이잖아. 일단 물어나 봐봐. 안 된다면 말고.”
마지막으로 저항해 보지만 역시나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폰을 꺼내 들었다. 괜한 부담을 지우고 싶지 않은데.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태준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저, 오늘 친구를 만났는데 저녁에 데리고 가도 괜찮을까요? 불편하면 거절하셔도 돼요. 절대 부담 갖지 마세요.”
친구라고 뭉뚱그린 건 외삼촌 가족들에 대해 구구절절 부연 설명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머니 쪽 얘기는 되도록 소문나지 않도록 하라는 채 여사의 당부를 새긴 탓이기도 했다. 대놓고 거절하라고 요구하는 듯한 질문 태도에 수정은 찌릿, 나린을 쏘아보았다.
“야. 꼭 데려가고 싶다고 말해야지.”
속사포 같은 타박도 함께. 그러나 갑작스런 부탁에도 태준은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그래요. 상관없어요. 사람 많으면 더 재밌고 좋죠.]
내심 태준 쪽에서 거절해주길 바랐던 나린으로선 꼼짝없이 수정과 동행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 사람은 또 왜 이렇게 너그러운 거야. 이제 와서 아니라고 번복할 수도 없고.
“……그럼 친구랑 같이 갈게요. 고마워요.”
나린은 떼어지지 않는 입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전화 통화에 쫑긋 귀를 세우고 있던 수정이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이따가 봐요.]
“네.”
전화를 끊은 나린은 반짝반짝 빛나는 수정의 눈을 마주하고 다시 한번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
[지난번에 못 한 합주 오늘 어때?]
네 남자의 단체 메시지 창에 준우의 이름이 뾱 떠오르고, 이어서 태준의 답이 도착했다.
[나 오늘 나린 씨 만나기로 했어.]
윤완은 태준의 메시지에 박힌 ‘나린’ 두 글자에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연나린을 만난다고? 이마에 옅게 주름이 잡혔다.
[아, 오늘이었어?]
[응. 아까 오전에 연락 와서 약속 잡았어. 오늘 휴가라던데.]
태준과 준우의 대화 사이로,
[그럼 준우 너 혼자라도 와. 나도 오늘 일찍 끝날 거 같아.]
세훈의 말풍선이 둥실 떠오른다.
[그럴까. 너무 안 치니까 손이 굳는 거 같아.]
준우와 세훈의 대화가 시시콜콜하게 이어지는 가운데, 윤완은 답장을 할 생각도 없이 그저 휴대폰만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 배려로 얻어낸 휴가에 태준이를 만난다는 거지? 왠지 모를 배신감이 윤완의 분노를 들쑤셨다. *** 태준은 잘게 썬 스테이크 조각을 입안으로 밀어 넣으며,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수정의 조잘거림에 성실히 반응해주었다. 끝날 기미가 없는 수다에 나린은 이러다가 태준이 질려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을 했다. 진심인지 가심인지, 다행히도 그는 즐거워 보였다. 디저트를 먹는 중에 태준이 급한 전화로 자리를 비우자, 수정은 이때다 싶어 나린에게 귀엣말을 했다.
“저 남자 너무! 너무! 너무! 괜찮다! 얼굴도 잘생겼고 성격도 재벌답지 않게 엄청 좋아 보여. 너, 가짜로 말고 진짜로 잘해 봐. 가능성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나린은 기가 막혔다. ……다른 여자랑 아직 정리되지 않은 남자라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가능성 없어. 그리고 말 좀 적당히 해. 태준 씨 체하겠어.”
“어머, 둘 다 말수가 적어서 내가 입 다물면 바로 조용해지는데 어떡하니?”
그때 짧게 통화를 끝내고 돌아온 태준이 싹 비워진 디저트 접시를 확인하며 마무리 멘트를 했다.
“다 드셨으면 일어날까요?”
“아, 네.”
나린과 수정이 일어나자 웨이터가 엽렵하게 다가와 코트와 가방을 챙겨주었다. 레스토랑 건물 입구에 다다를 즈음, 태준이 수정을 돌아다본다.
“근데 수정 씨는 집이 어디예요?”
“아, 저는 마포예요.”
마포. 낯설어진 새 주소지에 나린은 남몰래 씁쓸해했다.
“여기 올 땐 나린 씨 차로 왔죠? 그럼 어떡하지……. 나린 씨가 데려다주면 너무 돌아가는 것 같은데.”
혼잣말인 듯 아닌 듯 태준이 중얼거렸다. 수정은 다급하게 양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지하철 타면 돼요. 나린아, 가다가 아무 역에나 떨궈줘.”
“아냐. 집까지 태워다 줄게.”
그러다가 경솔한 발언이었나 후회를 한다.
‘기사 아저씨한테 민폐인데.’
정시 퇴근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린이라서 기사 아저씨의 귀가 시간이 걱정되었다. 나린과 수정의 대화를 듣던 태준이 두 사람 사이로 슥 끼어들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수정 씨가 나린 씨 차로 가요. 나린 씨는 내가 태워다 줄게요. 동선 상 그게 제일 효율적이지 싶은데.”
토끼 눈이 된 나린이 태준을 올려다본다.
‘아니에요. 그럴 거 없어요.’
사양의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거리는데, 수정이 한발 빠르게 태준의 말을 받았다.
“아, 그럼 그래 줄래요?”
“야, 강수정…….”
나린은 눈을 부릅떠 보이며 수정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수정 딴에는 도우려는 속셈이었지만 나린에게는 어색하고 불편할 시간을 늘릴 뿐이었다. 때마침 나린의 차가 당도하고 태준은 나린에게 눈짓을 했다. 나린은 하는 수 없이 수정을 먼저 차에 태워 보냈다. 나린의 차가 떠난 뒤 이어서 태준의 차가 도착한다. 태준은 뒷좌석 문을 열어 잡고 꼿꼿이 서서 나린을 향해 웃어 보였다.
“어서 타요. 잘 모셔다드릴게요.”
나린은 어쩔 수 없이 태준의 차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반대편으로 이동한 태준이 뒷좌석에 올라타자 차가 서서히 출발했다. 금세 대로로 접어든 차는 시원스레 내달리기 시작했다. 길이 막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나린은 조용히 안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