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괜찮은 사람2021.07.06.
병원에 가라는 직원들의 성화를 물리친 윤완은 나린을 부축해서 제 차에 태웠다. 보통은 기사를 대동하지만 오늘처럼 퇴근이 늦어지는 날에는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따라서 차 안에는 윤완과 나린 둘뿐이었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나린은 멍한 눈을 하고 있었다.
“집으로 가도 괜찮겠어?”
윤완이 안전벨트를 채워주며 묻는다.
“네…….”
윤완의 얼굴이 코앞에 이르렀을 때 나린은 긴장하며 호흡을 멈추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다니……. 인간적인 면이 아주 없는 사람은 아니구나.
“정말 괜찮은 거지?”
뭐가 그리 안심이 안 되는지 윤완이 질문을 거듭했다. 대답할 기운도 없는 나린은 자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출발하면서 타이어가 지면을 긁었다. 듣기 싫은 마찰음이 일며 공포스럽던 추락 순간이 되살아난다. 나린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삽시간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괜찮아. 아무 일 없었잖아. 괜찮아. 괜찮아, 강나린. 그러고 보면 똑같은 일을 겪었는데도 윤완은 놀랍도록 침착했다.
“부사장님은 괜찮으세요?”
“…….”
윤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나린을 향해 짧게 눈길을 주었다 거둘 뿐이었다. 속으로는 그도 낯모를 감정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괜찮지 않아야 하는데. 괜찮지 않아야 하는 게 맞는데……. 지키고 싶은 게 있을 때 신기하도록 강해지는 생경한 경험.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그에겐 너무도 생경한 일이었다. 목적지에 다다라 윤완의 차가 정지하고, 나린은 지체 없이 딸각, 안전벨트를 풀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
윤완은 작은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나린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윤완도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고 따라 내린다. 이성적인 판단을 할 새도 없이 몸이 저절로 움직인 거였다. 대문을 향해 선 나린은 언제 보아도 으리으리한 저택을 느리게 치훑었다. 시선이 닿은 담장 위, 녹음을 잃은 한겨울의 나뭇가지 틈새로 제 방 창문이 보였다. 오늘만큼은 원래 집으로, 외삼촌네로 가고 싶다. 외숙모 품에 안겨서 마음 놓고 울 수 있었으면. 수정이에게 같이 자자고 투정 부릴 수 있었으면. 쉬이 발길이 옮겨지지 않아서 한참을 머뭇거리는 나린이었다.
“왜?”
윤완이 묻지 않았더라면 까만 시간을 그렇게 한참, 찬 기운 속에서 흘려보냈을지도 몰랐다. 나린은 그제야 윤완이 뒤따라 내린 걸 알았다. 빙글 돌아서서 한 번 더 작별 인사를 되풀이한다.
“아니에요. 안녕히 가세요.”
나린은 도망치듯 대문 쪽으로 달아났다. 뒤쫓아 가고픈 충동을 억누르느라 윤완이 잠시 그 자리에 뿌리를 박고 섰다. 손끝엔, 나린을 품에 안았을 때 함께 안았던 가냘픈 떨림이 남아 있었다. 너무 생생해서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던 순간보다 더 짙은 잔상을 남긴, 그 설은 감촉은 그를 꼼짝 못 하게 옭아맸다. 미쳤지. 그래, 미친 게 분명해, 도윤완. 윤완은 고개를 들어 올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살면서 이처럼 애가 닳았던 적이 없었다. 한번 뿌리를 내린 두 다리는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윤완은 나린이 사라지고도 오래도록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었다. *** 언젠가 놀이공원에 갔을 때 딱 한 번 타본 적 있는 자이로드롭. 그 아찔함을 능가하는 속도로 한도 끝도 없이 추락하는 느낌. 몸이 공중에 붕 뜬 착각에 나린은 순간적으로 빠르게 다리를 휘저어댔다.
“헉.”
누가 등을 떠민 것처럼 몸을 일으킨다. 저도 모르게 외마디 신음이 터져 나오고 목 뒷덜미엔 식은땀이 흥건했다.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칠흑 같고, 완전히 닫히지 않은 암막 커튼 틈새로 한 가닥 불빛이 고단히 떨어져 내리는 중이었다. 커튼을 걷어 빛을 좀 더 들인 뒤 인지해낸 풍경은 아직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그녀의 방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어른들은 모두 잠자리에 든 후였다. 나린도 씻고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에 눕자마자 거짓말처럼 잠이 들었는데 악몽을 꾸고 말았나 보다.
‘그래. 그런 일을 겪고 아무렇지 않게 잘 수 있을 리가 없지.’
어둠이 싫어서 불부터 켠다. 스위치를 누르자 너른 공간이 환한 빛으로 함빡 들어찼다. 헤먹은 공간은 오싹한 기분을 배가시켰다. 순간, 꼭 불이 켜지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지이잉, 폰이 진동하였다. 노상 듣던 소리인데도 자지러지게 놀란 나린은 침대 위로 폴싹 주저앉고 말았다.
“하아.”
한숨 돌린 뒤 폰을 들여다보자 이 새벽에 너무나 어울리지 않게 ‘도윤완’ 이름 석 자가 떠 있었다. 사적으로 폰 번호를 교환한 적 없었기에 사내 포털 모바일 앱이 아니었다면 누군지도 몰랐을 것이다.
‘이 시간에 부사장님이 웬일이지.’
의문을 품은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 자면 좀 나와.]
다짜고짜 용건부터 내뱉는 화법은 딱 그다웠다.
“네?”
[너희 집 앞이니까 나오라고.]
“……네?”
윤완은 나린이 뭐라 더 물을 새도 없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자, 잠깐만요……!”
뒤늦게 외쳐 보지만 폰 액정은 이미 빈 배경화면만 띄우고 있다. 뭐야, 이 사람……. 이해하기 힘든 요구에 시간부터 확인했다. 새벽 한 시. ……이 시간에 여길 다시 왔다고? 아무리 하는 행동마다 물음표가 뒤따르는 사람이라지만 이렇게까지 큰 물음표를 그린 건 처음. 뭘까, 이건. 평범하지 않은 일을 같이 겪어서일까. 입씨름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아서 묵묵히 외출 준비를 했다.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고, 적당한 옷을 골라 입은 뒤 갖고 있는 중 가장 두툼하고 긴 패딩으로 몸을 감싼다. 평소 같으면 이 무리한 요구를 묵살하고 말았을 테지만 오늘은 달랐다. 누구라도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이 몸서리치는 기억도 흐릿해지지 않을까 하는 소망 때문에. 뜰을 가로지르고 돌계단 밟아 내려가서 대문 밖에 다다른다. 몇 시간 전 집 앞에 고이 내려주었던 까만 차가 한 번도 그 자리를 떠난 적 없는 것처럼 반듯이 정차되어 있었다. 나린은 운전석 쪽으로 직행해서 똑똑 창문을 두드렸다.
“안 타고 뭐 해?”
차창을 빠끔 내린 윤완이 물었다. 이 새벽에 부사장님 차에……? 지난번, 같이 술을 마셨을 때의 매너로 봐서는 별일이야 있겠냐 싶었지만 그래도 경계심이 아예 안 들 수는 없었다. ……괜찮을까. 하지만 이런 고민은 나오기 전에 했어야 했다. 이미 나온 이상 거부하는 것도 이상해 보일 거라 생각한 나린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어쩐 일이에요?”
“괜찮아?”
“네?”
“괜찮냐고.”
“아…….”
나린의 사고회로는 이 단순한 물음의 의미를 이해하기까지 평소보다 더 오래 작동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걱정돼서 온 거란 말이야……? 부사장님이…… 일개 부하 직원이 걱정돼서?
“괜찮……아요.”
나린은 아리송해 하며 답을 해주었다.
“왜 깼는데?”
“네……?”
“자다가 깬 거 아냐?”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요?”
윤완이 하는 말들이 죄다 수수께끼 같다. 그녀가 아는 그와는 조금도 연결되지 않는 언어들.
“방금 불 켜지는 거 봤어.”
불 켜지는 걸 봤다고? 어떻게……?
“어떻…….”
그러다가 깨달음에 입을 다물었다. 설마, 집에 안 가고 계속 여기 있었다는 건가……? 아니, 왜? 대체, 왜……?
“계속 여기 있었던 거예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는데 되돌아온 건 믿을 수 없는 확인사살이었다.
“응.”
“왜……요?”
잘도 말하던 윤완이 이 질문에는 입을 닫았다. 나린은 윤완을 빤히 들여다봤다. 그 시선을 감지한 윤완의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사람 눈동자에 흑백이 저렇게도 분명했던가. 고작 차창 밖 가로등 불빛이 전부인데도 이렇게나 선명히 보이다니. 그만 봐. 그런 눈으로 그만 쳐다보란 말이야. 속내가 어질러진 윤완은 나린을 외면한 채 물끄러미 정면을 향했다.
“걱정돼서.”
들릴 듯 말 듯 윤완의 어조가 새벽 한 시의 고요함에 녹아들고,
“……네?”
다시 한번 믿을 수가 없어서 나린이 두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걱정’이라고,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윤완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뭐지……? 내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직원이었나……?’
“그냥, 운전대가 손에 안 잡히기도 하고.”
윤완은 에두를 것 없이 사실을 말했다. 다만 왜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너를 두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어.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말. 하지만 나린은 윤완이 덧붙인 말을 제 식대로 해석하고 멋대로 수긍했다. 그렇지. 사고를 겪은 건 나 혼자만이 아닌데. 무서우셨을 거야, 부사장님도. 운전대가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그런데도 날 데려다주겠다고 여기까지 오시고……. 오롯이 저를 걱정해서 떠나지 못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앞서 말한 ‘걱정’은 약해 보이기 싫어서 한 빈말이고 진실은 사고의 후유증 때문이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나린으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훨씬 쉬웠다.
“내일 출근하셔야 하는데 피곤해서 어떡해요?”
나린은 윤완이 걱정되었다. 방금 전 나린을 깨웠던 무서운 악몽은 기억에서 싹 잊힌 뒤였다.
“아.”
그러자 중요한 게 생각났다는 듯 윤완이 홀연 감탄사를 뱉었다.
“내일 넌 출근 안 해도 돼. 팀장한테 말해놨으니까 하루 쉬어. 연차 말고 외근 처리 하라고 했어.”
“네?”
“왜 계속 두 번씩 말하게 하는데? 내일 출근 안 해도 되니까 쉬라고.”
“그치만…….”
“사옥 관리 부실이었잖아. 회사 차원의 배려라고 생각해.”
아무리 그래도 다친 데도 없고 멀쩡한데, 이렇게까지……. 나린은 점점 더 윤완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동병상련인 건지, 정말 배려인 건지 헷갈려서…….
“부사장님은요……?”
“나는 나가야지. 밀린 결재가 산더미인데.”
“……부사장님도 같이 겪었잖아요.”
윤완을 살피는 나린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 얼굴에 닿은 윤완의 눈이 이해할 수 없게 자꾸만 입술 쪽으로 떨어진다.
처음 경험해 보는 충동에 당혹감이 엄습해 왔다. 무디어질 대로 무디어진 가슴이 왜 이 애한테만 이런 충동을 느끼는 건지. 도무지 설명 불가였다. 모르긴 몰라도 지난번 같이 술을 마셨던 때부터 무언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윤완은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납득시킬 핑곗거리를 찾았다. 시간. 그래, 시간 때문이야. 새벽이라서. 이 시간에, 이런 폐쇄된 공간에 단둘이 있으면 누구라도 이럴 테니까. 그래, 그런 것일 뿐. 단지 그것뿐……. 느슨해진 이성의 끈을 단단히 매듭지은 윤완은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뽑아 나린에게 내밀었다. 일단 침묵부터 깨야겠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통제를 벗어난 무의식이 나린에게 손을 뻗치기 전에. 내 손이 멋대로 이 앨, 안아버리기 전에.
“뭔데요?”
얼결에 명함을 받아든 나린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다.
“거기 정신과, 내일 연락해둘 테니 가서 상담받아.”
생각지도 못한 세심함은 불의의 일격과도 같았다. 나린은 이제껏 그에게 툴툴댔던 게 미안해졌다. 속으로만 삭였던 툴툴거림이라 그는 일절 모르고 있겠지만. 이렇게까지 세심한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사람의 진면목이 큰일을 당했을 때 나오는 거라면, 윤완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러야 했다. 그리고 그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결론이었다. 까칠 대마왕, VIP 도윤완 부사장이 괜찮은 사람이라니. 민하 과장님이 들으면 사무실이 떠나가라 비웃을 일이야.
“부사장님은요……?”
휴가에 정신과 상담까지, 이렇게나 받은 게 많은데 나는 고작 몇 마디 말로 걱정을 표현하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없구나. 어쩐지 무기력한 기분을 느끼며 되물었다.
“신경 쓰지 마. 알아서 할 테니까.”
이 이상은 위험하다. 이 이상 같이 있으면 팔이 멋대로 움직여서 이 애를 안아버릴 것만 같다. 위기감을 느낀 윤완은 이만 나린을 제 공간에서 내보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슴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다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옆에 있고만 싶다고. 이대로 날이 샐 때까지. 그렇게 아우성을 쳐댔지만 애써 무시한다.
“그럼 들어가 봐.”
꼭 내쫓는 것 같은 말투에도 나린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곧장 차에서 내렸다. 나린의 몸이 차 문밖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윤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연나린. 가지 마. 가지 말고 있어. 조금만 더 이대로……. 그러다가 제 모습에 기가 막혀서 이마를 짚었다.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사람은 나린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혼자 남겨진 윤완은 실소를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