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너무 놀라면2021.07.02.
윤완이 혜원을 뒤로하고 2501호로 돌아왔을 때, 태준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린이.”
묻지도 않았는데 세훈이 속삭였다. 무던한 척해보지만 윤완의 신경은 태준의 폰을 향해 바짝 곤두섰다.
“알겠어요. 그럼 또 연락할게요.”
이 문장을 끝으로 태준이 전화를 끊었다. 세훈이 득달같이 목을 뻗는다.
“만나기로 했어?”
“응.”
“언제?”
세훈이 호들갑을 떨자 준우가 옆에서 핀잔을 했다.
“너는 사촌 오빠가 돼가지고 걱정도 안 되냐?”
“나린이도 자기한테 득이 되는 게 있으니까 그런 결정을 했겠지.”
“그래도 그렇지. 얼굴도 모르고 자란 사촌 동생보다는 친구가 우선이다, 이거지?”
“그런 게 어딨어? 나는 둘 다 응원한다고.”
준우와 세훈이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태준은 나린과의 통화를 복기해 보았다.
[큰엄마께서 언제 또 만나는지 물으셔서요. 바쁘실 텐데 적당히 둘러댈까요?]
[아뇨. 그렇게 허술하게는 안 되죠.]
이 세계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데.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어요. 다음 주중에 한번 봐요. 저녁 시간 될 때 맞춰서. 어때요?]
나린 입장에서는 황금 같은 주말에 보자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제안이었다.
[좋아요.]
[그럼 다음 주에 또 연락해요.]
나린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태준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얘기해 볼수록 좋은 여자 같아.”
무심결에 이렇게 중얼거리고 만 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세훈은 장난기를 거두었다.
“그럼 진지하게 임해 봐.”
“…….”
“어쩌면 지아를 잊게 해 줄지도 모르잖아. 너한텐 그게 더 좋은 거고.”
세훈의 조언에 태준은 쓰라린 미소를 머금었다.
“어디까지나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
들풀처럼 하늘하늘한 그녀, 한지아. 그런 아이가 둘일 리 없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손끝을 저릿하게 하는 존재가 또 있을 리 없었다.
“다현이 생각이 나서 그런 걸 수도 있고.”
태준의 첨언에, 탐스러운 샤인머스캣을 훑으며 머드러기를 골라내던 준우가 동작을 그쳤다.
“다현이?”
사무치도록 그리운 이름을 듣고 심장이 무조건 반응한 탓이었다.
“그래. 다현이. 닮았단 생각 안 들어?”
우수에 찬 얼굴을 한 준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더라.”
“…….”
“……특히 눈이 정말 닮았더라.”
청록빛깔 큼지막한 알갱이를 입 안에 던져 넣은 준우는 톡 터지는 과즙을 음미하며 중얼거렸다. 윤완은 친구들의 대화에서 한발 물러서서 관망하는 중이었다. 그의 표정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었다. 거짓 만남 제의에 순순히 응하다니. 그것도 다른 여자를 잊지 못했다고 털어놓은 남자랑. 보기보다 더 바보 같은 여자였네.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하는데, 왜 자꾸 마음에 걸리는지 모르겠다.
“너희 할아버지랑 어머니껜 비밀이다.”
태준이 돌연 세훈을 입단속 했다.
“당연하지.”
“당분간은 너희들만 알고 있어.”
태준은 준우와 윤완을 향해서도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알았어.”
준우가 대답하고,
“도윤완, 넌?”
태준은 말이 없는 윤완을 채근했다.
“…….”
“쟤야 남 일에는 전혀 관심 없지. 무슨 걱정이야.”
윤완이 계속 무반응이자 세훈이 대변인인 양 나서서 대답을 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남의 속도 모르면서. *** 월요일 아침. 출근도 퇴근처럼 택시를 이용하기로 한 나린은 오랜만에 단잠을 잤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다가 일곱 시에 일어나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었다. 맑은 정신, 가뿐한 컨디션으로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에 도착했다. 하지만 기나긴 일주일의 시작부터 야근이 기다리고 있었다. 민하가 잔뜩 미안한 얼굴을 한다.
“미안해, 나린 씨. 그치만 그룹 보고 대상이라 알다시피 납기가 오늘까지야.”
그룹 컨트롤 타워에서 내려오는 업무는 당일 지시, 당일 보고가 기본이었다. 그래서 그룹 지시사항이 내려오면 경영지원실 모두가 자기 담당 업무와 무관한 주제이기만을 바랐다. 운이 없게도 이번 지시사항은 나린이 담당하고 있는 동남아 법인에 관한 것이었다.
“해야죠. 어떡해요.”
나린은 의연하게 웃었지만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12월, 한 해를 마무리하고 내년 계획 달성을 고민해야 하는 시점에 이런 건 대체 왜 궁금한 걸까. 민하가 재전송한, 그룹 컨트롤 타워의 지시사항이 적힌 메일을 보며 사춘기 같은 반항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체념하고 현실에 순응하기로 한다. 높으신 분들의 뜻을 일개 대리 따위가 어찌 다 헤아리겠어. [저 오늘 야근이라 늦게 들어간다고 말씀드려 주세요.] 나린은 채 여사의 비서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채 여사는 급한 용건이 있을 땐 직접 연락을 해도 좋지만, 일상적인 용무는 모두 비서실을 통하라고 당부한 바 있었다. 원래 해야 하는 업무에다 갑자기 떨어진 그룹 지시사항까지 더해져서, 나린의 월요일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최종 보고 메일을 보내고 나니 시각은 아홉 시 반을 훌쩍 넘겼다. 경영지원실이 있는 29층에는 오로지 나린만 남아 있었고, 다만 CFO실에서 하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나린은 짐을 챙겨 나가는 길에 불 켜진 윤완의 방에 시선을 주었다. 아직 퇴근 못 한 건가. 그 순간, 거짓말처럼 어둠으로 뒤덮이는 그의 공간. 나린이 우왕좌왕하는데 문이 열리고 윤완이 나왔다. 어둠을 뚫고 나타난 윤완의 시선은 곧바로 나린에게로 떨어졌다. 그를 향해 멈춰 있는 그녀에게로.
“아, 퇴근하려고 하는데 아직 불이 켜져 있길래…….”
왜 변명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의 방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얘기해 볼수록 좋은 여자 같아.’
나린을 본 순간 태준이 했던 말이 윤완의 머릿속에 되살아난다. 기분이 나빠진 윤완은 나린에게 대꾸해 줄 마음이 사라졌다. 바보 같은 여자. 윤완이 가타부타 답이 없자 나린도 빈정이 상했다.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해주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인데. 대주주씩이나 되니까 사람들이 아무 말 못 하는 거지, 아니면 사회생활이나 제대로 할 수 있었으려나 몰라. 운도 좋다! 다이아몬드 수저! 차마 소리 낼 수 없는 말들을 속으로만 퍼부어 주었다. 두 사람은 대화가 단절된 채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나린 입장에서는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는 침묵이 이어진다. 띵! 엘리베이터의 도착을 알리는 효과음이 경쾌하게 울려 적막을 부서뜨렸다. 늦은 시각이라서 타고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경영지원실은 대표이사실 바로 아래층인 29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말인즉 엘리베이터 안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도 29개 층만큼 길다는 뜻이었다. 윤완과 단둘이 좁은 공간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게 싫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뭘 두고 온 척 사무실로 돌아가 볼까도 했지만 발 연기로 괜히 망신이나 당할 것 같고……. 그래도 조금만 버티면 된다. 엘리베이터까지만 버텨내면 이 어색함도 끝이다. 나린은 입술을 깨물며 비장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고 공중에 붕 뜬 것 같은 느낌이 나더니 세상이 아래로, 아래로 하강했다. 순간 덜컹하며, 엘리베이터가 정지했다. 윤완과 나린의 눈빛이 동시에 흔들렸다. 나린은 본능적으로 벽에 둘러진 손잡이를 꽉 움켜잡았다. 고장인가. 윤완이 비상벨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데, 엘리베이터가 한 번 더 덜컹거렸다. 곧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꺄악!”
나린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손은 있는 힘껏 손잡이를 붙든 채. 윤완 역시 긴장했는지 벽에 바짝 붙어 섰다. 그의 긴 손가락이 엘리베이터 손잡이를 세게 감아쥐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무언가에 걸린 듯 허공에 멈추었다. 추락하던 공간이 정지하자 이성을 되찾은 윤완은 침착하게 비상벨부터 눌렀다. 비상벨 너머의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나니 곧바로 나린의 존재가 기억이 났다. 나린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벌벌 떨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가려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있는 대로 겁을 집어먹은 것만은 분명했다.
“괜찮아?”
윤완은 몸을 낮춰 나린을 살폈다. 나린은 입도 뻥끗하지 못하였다. 바들바들 떨며 고개만 겨우 끄덕거렸다. 움츠린 채 떨고 있는 나린을 보니 속에서 알 수 없는 불길이 일었다. 그 불길은 금방이라도 윤완의 심장을 집어삼킬 것처럼 거세어졌다. 불길이 심장을 집어삼키기 전에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윤완은 홀린 듯 손을 뻗었다. 나린의 동그랗고 작은 어깨를 당겨 제 품 안에 집어넣는다. ‘페퍼’에서 한사코 거부했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나린도 고분고분 몸을 맡겼다.
윤완의 손이 찬찬히 나린의 등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늘 냉정하던 그가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만, 정말 이상한 순간.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안 하던 짓을 하기도 한다더니. 나린을 다독이면서 윤완은 그렇게 합리화를 해보았다. 나린을 품에 안자 어쩐지 그의 마음도 한결 평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놓아주고 싶지 않다. 이대로 오래오래 안아주고 싶다. 한 번도 이런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나린과 함께 있을 때면 오만가지의 처음이 찾아온다. 품 안의 떨림이 잦아드는 걸 느낀 윤완은 자그맣게 안도했다. 이제 정신을 좀 차리겠는지 나린이 조심스레 그의 품을 벗어났다.
“죄송……합니다.”
윤완은 안타까운 눈으로 나린을 훑었다. 죄송하긴 뭐가. 대체 네가 죄송할 게 뭔데. 안은 건 난데. 내 의지로, 내가 안은 건데. 무서운 일을 당한 와중에도 자신이 직장 상사라는 사실을 신경 쓰고 예의를 차리는 것 같아 그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곧 밖에서 소란이 일더니 엘리베이터 문이 힘겹게 갈라졌다. 사색이 된 보안 직원들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부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작업복 차림의 보안 직원들은 건물 바닥과 반쯤 맞춰진 문틈으로 윤완과 나린을 잡아당겨 꺼내주었다. 드디어, 마침내, 단단한 땅을 밟고 섰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린은 무릎이 꺾여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직원들은 일제히 윤완을 에워쌀 뿐 나린은 안중에도 없었다.
“부사장님, 괜찮으십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 어디 다치신 데는 없는지…….”
“차량 대기해두었으니 병원으로 가시지요.”
윤완은 짜증이 묻어난 얼굴로 그들의 권유를 뿌리쳤다. 장애물 같은 이들의 틈을 비집어서 뚜벅뚜벅, 나린에게로 걸어간다. 그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앞에 뻗어진 긴 팔을 따라 나린이 고개를 들었다. 나린의 눈 끝에는 대롱대롱 투명 구슬방울들이 매달려 있었다. 윤완은 흠칫하며 내밀었던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
윤완의 심장이 방금 전 타고 있던 엘리베이터보다 더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나린의 눈에서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물방울들이 톡톡 미끄러져 내리고. 윤완은 온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울지 마. 제발 울지 마. 그러나 소리 없는 외침이 닿을 리 없었다. 점점 불어난 나린의 눈물은 통곡이 되었다. 나린은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이토록 가슴 아픈 적도 처음이라서 윤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토록 서럽게 우는데 해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니. 손발이 꽁꽁 묶인 것 같은 답답함. 통제 불가능한 눈물,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짜증이 솟구쳤다. 당장 저 애의 울음을 그치게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 다시 안아주면 좀 그치려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떠올라서 사고로 뇌가 다친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