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최고의 남자2021.06.29.
오늘은 태용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채 여사는 잡혀 있던 일정을 전부 취소하고 태용의 곁을 지켰다. 침대 위, 베개에 몸을 기댄 태용이 채 여사가 건넨 인삼차를 받아든다.
“그래, 나린이가 태준이랑 더 만나보기로 했다고?”
“네, 아버님.”
시집온 이래 단 한 번도 시아버지를 실망시킨 적 없는 채 여사가 단정히 대답했다.
“잘 됐구만.”
태용은 빙그레 웃었다. 채 여사는 갑자기 나린을 불러들인 연 회장의 저의가 궁금했지만 일부러 캐묻지는 않았다. 연 회장이 그녀를 아끼는 이유가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성품 덕인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내 변덕으로 네가 고생이 많구나.”
“아닙니다. 핏덩이도 아니고 다 큰 애인걸요. 혼사 문제 말고는 별로 손 갈 것도 없으니까요.”
이 말은 진심이었다. 군식구가 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나린이 조용히 지내는 편이어서 크게 거슬리는 점은 없다.
“신화 화학 쪽에서 나린이 출신을 문제 삼진 않더냐.”
“다행히도 그렇진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태준이보다는 상준이 혼사를 더 신경 쓰는 눈치였습니다.”
상준은 태준의 사촌 형으로, 오래전부터 신화 그룹 후계자로 내정되었다고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태준 쪽에서 나린의 출신을 아주 문제 삼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단지 태준을 지아로부터 떨어뜨려 놓는 걸 더욱 시급한 과제로 여기고 있을 뿐. 채 여사는 소문을 들어 대강 알고 있었지만 굳이 보고하진 않았다. 말해봤자 시아버지의 심기만 어지럽힐 가십거리에 불과했다.
“세훈이는 나린이랑 좀 친해진 것 같고?”
“예. 다현이 생각이 나는지, 퍽 귀여워하는 눈치입니다.”
연 회장은 죽은 다현과 똑 닮은 나린의 눈을 되새김질 해보았다.
“네가 아들 하나는 잘 뒀다. 능력 있고 경우 바르고.”
“과찬이십니다.”
연 회장이 가느다랗게 한숨을 쉰다.
“나이가 드니 이런저런 잡생각만 느는구나.”
태용이 나린을 불러들인 건 단순히 죽은 아들과 손녀가 그리워서만은 아니었다. 그 이면엔 수년간 품고 살아온 죄책감도 작용했다. 제 손으로 인생을 망쳐 버린, 아들이 사랑했던 여자를 향한 죄책감. 아들보다도 훨씬 일찍 세상을 떠나 이젠 용서를 빌고 싶어도 빌 수가 없는 상대. ……이걸로 좀 속죄가 되려나. 태용이 회한에 잠긴 사이 채 여사가 빈 찻잔을 수습했다.
“참. 나린이는 세훈이 생일 파티 때 정식으로 선보일까 합니다.”
“그래. 그 문제는 네가 알아서 하는 게 좋겠다.”
“그럼 쉬십시오, 아버님.”
다반을 받쳐 든 채 여사는 조용히 연 회장의 방을 물러 나왔다. *** 금요일. 나린은 채 여사의 당부대로 휴가를 냈다. 세훈의 생일 파티 때 입을 드레스를 장만하러 가기로 되어 있었다. 백화점에 가나 했는데 채 여사가 나린을 데려간 곳은 어느 디자이너 숍이었다. 숍 안으로 들어서자, 텔레비전에서 본 것도 같은 중년 디자이너가 호들갑스럽게 채 여사를 맞이한다.
“어머, 사모님! 오랜만에 나오셨네요. 연락 주셨으면 저희 쪽에서 사람을 보냈을 텐데요.”
나린은 채 여사와 함께 숍 안쪽에 마련된 소파로 안내를 받았다.
“여기 이분은…….”
디자이너 한 사장은 채 여사의 낯선 동행인, 나린을 조심스레 지칭했다.
“누군지는 차차 알게 될 거고……. 이 애가 다음 주 토요일에 세훈이 생일 파티에 가게 됐는데 그때 입을 드레스가 필요해. 일주일 만에 될까?”
“아유, 사모님 부탁인데 당연히 해드려야죠. 주말 밤을 새워서라도 다음 주 화요일엔 가봉할 수 있게 할게요.”
“부탁해요. 너무 화려하게는 말고.”
채 여사는 부러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실어 강조했다.
“알죠, 사모님 취향. 걱정 마세요. 그럼, 일단 치수부터 좀 잴게요.”
한 사장의 수신호에 숍 직원이 다가와 나린을 일으켜 세운다. 그때 출입문이 열리며 도도한 표정의 젊은 여자가 들어섰다. 화려한 모피 코트. 몸에 딱 달라붙는 빨간 원피스. 굽 높은 하이힐. 귓불에서부터 늘어진 귀걸이는 금방이라도 어깨에 닿을 듯했고, 앳된 얼굴은 나린의 또래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아는 사이인지 그녀는 채 여사를 보자마자 인사부터 했다. 채 여사도 특유의 우아한 미소로 화답한다.
“오랜만이군요, 신 전무.”
이 여자가 바로 창조 일보 소유주의 외동딸이자 윤완의 정혼자인 신혜원이었다.
“어서 오세요, 신 전무님. 오늘 가봉이시죠? 이쪽으로 앉으세요.”
코트를 벗으며 자리에 앉으려던 혜원의 눈이 막 피팅룸으로 이동하려던 나린에게 닿았다.
“어머.”
혜원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두 눈을 크게 떴다. 채 여사는 곧장 이유를 알아챘다. 다현과 꼭 닮은 나린의 눈을 발견한 것이었다.
“한 사장, 미안한데 나린이 좀 직접 챙겨줄 수 있을까?”
채 여사는 주위를 물리고자 한 사장에게 일렀다. 한 사장은 시키는 대로 나린을 데리고 피팅룸으로 갔다. 채 여사와 둘만 남겨지자 혜원이 입을 뗀다.
“눈매가 정말 많이 닮았네요.”
신중한 채 여사가 혜원의 말에 대꾸하지 않자 혜원 쪽에서 재차 입을 열었다.
“드레스 맞추러 오신 거죠? 이번 세훈 오빠 생일 파티 때 선보이시려는 건가요?”
채 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고. 이대로 계속 알게 모르게 소문만 퍼지게 둘 수도 없고.”
“네, 그렇죠.”
혜원이 띤 미소는 비웃음처럼 보였다. 태생적인 도도함 때문에 혜원의 미소는 비웃음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종종 오해를 받고는 했지만 그걸로 감히 그녀에게 시비를 걸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불편할 것 또한 없다.
“그날 나린이 잘 부탁해요. 파티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서.”
채 여사는 혜원을 만난 김에 당부했다.
“이름이 나린이에요?”
“응.”
“뭘 걱정하세요? 세훈 오빠도 있고, 무엇보다 태준 오빠가 있잖아요. 그 둘이 챙기면 준우 오빠나 우리 윤완 오빠도 같이 챙길 거고……. 그럼 누가 건드릴 수나 있겠어요?”
혜원은 여전히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그려내었다. 속으로는 저런 혼외자 따위, 상종도 하기 싫다고 경멸하면서. 그런 의미에서 태준과 나린 사이에 약혼 얘기가 오간다는 소문은 의외였고 불쾌했다. 나린이 피팅룸을 나오자, 혜원의 차례가 되었다. 바통 터치하듯 서로 엇갈릴 때, 나린은 혜원의 입술이 묘하게 냉소를 띄는 걸 놓치지 않았다.
“신혜원. 창조 일보 신중호 회장 외동딸이야. 도윤완 부사장이랑 약혼할 사이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아마 사실일 거야.”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앞으로 자주 부딪히게 될 테니 기억해 두라며 채 여사가 일러주었다. 잠깐 스친 혜원에게서는 그녀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세련된 향이 났다. 나린은 어쩐지 그 향으로 그녀를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도윤완 부사장이랑 약혼할 사이라고? 윤완과 혜원을 차례로 떠올리며 어딘지 분위기가 닮았다고 생각하는 나린이었다. 오만하고 뻣뻣한 태도에 차가운 비웃음까지. 진짜 천생연분이네. 나린의 머릿속에 윤완의 얼굴이 반뜩였다가 사라진다. 나린은 뾰로통한 얼굴이 됐다. *** 테라 호텔 강남, 2501호. 네 남자가 아지트에 모였다. 윤완과 준우가 토요일 출근 예정이라서, 오늘 모임은 와인 서너 잔으로 가볍게 마무리하기로 했다. 룸서비스로 주문한 과일 안주가 쨍한 색감을 뽐내며 테이블 중앙을 장식하였다. 네 남자는 잔을 들고 건배부터 했다. 그다음 태준이 나린과의 일을 털어놓았다. 지아에 관해 이실직고한 것. 당분간 만남을 이어가는 척하기로 한 것. 얘기가 끝나기 무섭게 세훈이 펄쩍 뛴다.
“진짜? 나린이가 그렇게 한다고 했다고?”
사촌 동생의 일이라 걱정이 되는지 세훈의 표정이 어두웠다.
“응.”
“화 안 냈어?”
“아니, 안 내던데.”
“진짜?”
“응.”
세훈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집에서도 보면, 조용히 지내려고 하고 불만이 있어도 드러내지 않는 성격 같더라.”
윤완이 미간을 좁힌다.
‘아니던데. 보고서 형식 가지고 트집 잡는다고 잡아먹을 기세던데.’
나린은 원래 조용하지만 꼭 해야 할 말이 있을 땐 용기를 낼 줄도 아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연 회장의 집에 온 뒤로는 웬만해서는 참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려 했다. 세훈이 본 건 나린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는 모습. 윤완이 본 건 나린의 본 모습. 이를테면 그랬다. 딩동. 마침 울리는 벨 소리에 네 남자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린다. 세훈은 친구들을 둘러봤다.
“누구 올 사람 있냐?”
“아니, 없을걸.”
“나도 모르겠는데.”
준우와 태준이 차례로 답한 뒤 윤완도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세훈은 직접 확인해 볼 요량으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어 상대를 확인한 세훈은 금세 떫은 표정이 됐다.
“윤완 오빠 여기 있지?”
도도한 음성이 객실 안까지 카랑카랑 울려 퍼진다.
“혜원인가 본데?”
준우가 윤완을 쳐다보고, 윤완은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입문 쪽으로 가자 세훈이 막 방 안으로 들어서려는 혜원을 막아서고 있었다.
“함부로 들어오면 안 되는데.”
윤완은 세훈의 어깨에 턱 손을 올려놓았다. 그 뜻을 이해한 세훈이 윤완에게 상황을 맡기고 물러났다.
“무슨 일이야?”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시선이 혜원을 향해 내리깔린다.
“잠깐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이대로 서서 하자고? 들어가게 해주든지 오빠가 나오든지.”
윤완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복도로 나오자, 혜원은 맞은편 방에 카드 키를 접촉시켰다.
“하루 빌렸어. 오늘 여기서 자려고.”
의자에 걸터앉은 혜원이 코트를 벗었다. 뽀얀 어깨가 노출되며 매끄러운 자태를 자랑한다. 빨간 오프숄더 원피스와 하얀 피부가 조화를 이뤄 섹시한 느낌을 자아냈지만, 윤완은 무관심한 얼굴로 벽에 기대어 설 따름이었다. 그의 동작 하나하나가 오래 머물 생각이 없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했다. 역시나……. 통할 리가 없지.
“화요일에 저녁 먹으러 오라는 메시지, 왜 답장 안 했어?”
실망했지만 포기란 없었다. 혜원은 날씬한 각선미가 더욱 돋보이도록 다리를 꼬았다.
“갈 생각 없으니까.”
“그럼 그렇다고라도 답장을 해줬어야지.”
“답 없으면 안 가는 줄 알았을 거 아냐.”
혜원은 무정하기 짝이 없는 제 정혼자를 원망의 눈초리로 쳐다봤다.
“오빠는 나랑 결혼해서도 이럴 거야? 결혼해서 잘살려면 지금부터 노력을 해야지.”
“결혼해서도 이럴 건데. 나한텐 그게 잘사는 거고.”
“…….”
답답함 마음에 혜원이 두어 번 가슴을 두드린다. 이 남자는 왜 조금도 곁을 주지 않는 것일까. 나같이 완벽한 결혼 상대가 또 어디 있다고. 언론사 집안 배경만으로도 혜원은 모두가 탐내는 신붓감이었다. 거기에 보태어 예쁜 얼굴과 잘 관리된 몸매, 세련된 스타일, 예술적 재능까지. 무엇 하나 비는 부분이 없었다. 그녀의 아버지 신중호 회장은 이처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외동딸을 위해 최고의 신랑감을 선정해 주었다. 재계 1위에 빛나는 도일 그룹 차차기 후계자, 도윤완 부사장. 하지만 그는 여느 남자들과 달리 혜원의 매력을 터럭만큼도 알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마음을 줄 생각 따위 없다고, 처음부터 철저히 선을 그었다. 정략결혼으로 서로가 얻을 이득, 그 이상을 바랄 거면 시작조차 하지 말자고.
“그래, 인정해. 우리는 집안 간의 필요에 의해서 맺어진 사이라는 걸. 그치만 진짜 좋아지도록 서로 노력하면 좋잖아.”
이성적인 매력으로 어필하는 건 단념하고 애원하듯 호소해보았으나, 윤완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도리어 시리도록 냉정한 답만 되돌아왔다.
“후회되면 이제라도 없던 일로 해. 정식 약혼 전에 정리하는 게 너한테도 좋지 않겠어?”
혜원은 이를 꽉 깨물었다. 혼담을 깨자니. 말도 안 된다. 처음엔 자존심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윤완에게 진심이었으니까. 설령 마음을 갖는 게 불가능하더라도 이 남자는 놓치지 않을 거다. 반드시 손에 넣고 말겠다. 설령 껍데기뿐일지라도.
“오빠네 부모님께서 가만히 계시겠어?”
“설득할 수 있어. 나는 너 없이도 회사를 지키고 키울 자신이 있거든.”
쉽사리 마음을 열지 않는 고고함과 넘쳐흐르는 자신감. 그에 걸맞는 능력과 잘생긴 외모까지.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남자. 그런 남자를 내가 놔줄 리가 없잖아.
“고민해 보고 답 줘.”
윤완이 돌아서는 순간, 혜원은 뒤에서 와락 그를 껴안았다.
“고민할 것도 없어! 나는 오빠랑 결혼할 거니까!”
윤완은 제 허리에 감긴 혜원의 팔을 천천히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서슬 퍼런 눈빛으로 혜원을 힐끔거린 그가 냉정히 발을 돌려 친구들이 있는 옆방으로 되돌아간다. 넓디넓은 스위트룸에 덜렁 남겨진 혜원은 분에 차서 양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