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걸치고 가2021.06.25.
오랜만에 네 남자의 시간이 맞았다. 저녁에 모여 합주를 하기로 했는데, 두어 시간 전 태준이 늦을 거라고 알려왔다.
[미안한데, 좀 늦겠다. 먼저 하고 있어.]
호시탐탐 준우에게 나린을 보여줄 타이밍만 재던 세훈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키보드 없이 우리끼리 무슨 재미야. 그냥 응접실에서 좀 기다리자.’
세훈의 의도를 눈치챈 준우가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섰고 윤완은 다수결에서 졌다. 그러나 한 시간이 넘도록 태준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윤완은 슬슬 기다리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가게?”
말없이 코트를 챙기는 윤완을 보며 세훈이 묻는다.
“어.”
나린은 지금이 이 자리를 벗어날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도윤완 부사장의 행보에 편승해서.
“저도 이만 올라가 볼게요.”
“왜? 더 놀다 가지.”
서운한 표정이 된 세훈은 앙탈 아닌 앙탈을 부렸다.
“내일 출근 준비도 해야 하고…….”
급히 변명할 말을 찾았는데 궁색하기 짝이 없다.
“출근 준비? 학교도 아니고 준비할 게 뭐가 있어.”
“…….”
“도윤완, 혹시 너네 부서는 숙제도 내주냐?”
“말이 되는 소릴 해.”
윤완이 대응할 가치도 없다는 투로 내쏘았다.
“가서 쉬게 둬. 피곤할 텐데.”
처음 인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말이 없던 준우가 모처럼 입을 떼어 나린을 거들었다. 나린은 힐긋 그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부닥치는 순간, 준우의 얼굴이 또다시 서글픈 빛으로 물들었다. 너무 말수가 적길래 낯을 가리나 싶었는데, 그건 아닌가 보다. 저렇게 사람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걸 보면.
“안 가?”
서늘한 음성이 멍하니 있던 나린을 깨우고.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틀자, 응접실 문고리를 붙든 채로, 윤완이 나린을 기다려주고 있다.
“아, 가야죠.”
나린은 빠른 걸음을 옮겨 윤완이 잡아준 문을 통과했다. 이건 또 무슨 친절이람. 머릿속으로는 잔뜩 의아한 물음표를 그리면서. *** 윤완과 나린이 응접실을 빠져나오는데, 태준이 마침 거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너른 거실 한복판에서, 세 사람의 발걸음이 일시에 멈추었다.
“어디 가?”
태준이 윤완을 향해 묻고,
“시간 좀 지켜.”
윤완이 차갑게 대꾸했다.
“미안해. 갑자기 지아가…….”
그러다가 태준은 나린을 의식하고 제풀에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그러나 쏟아진 언어들은 이미 나린의 청각에 남김없이 감지된 뒤였다. 지아……? 낯선 여자의 이름. 내막을 알고 있는 윤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직도 그 여자냐. 이해하기 어려운 순애보에 반감이 들었지만 굳이 소리로 옮기진 않는다. 다만 나린을 걱정했다. 맞선 본 상대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튀어나왔는데 괜찮을까.
‘하아……. 내가 이런 걸로 누굴 걱정할 사람이 아닌데.’
‘페퍼’에서부터 자꾸 왜 이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그러다가 윤완은 문득 두 사람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계속 만나보기로 한 건지. 나린은, 태준을. 생각이 여기에 이르렀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타인의 일엔 좀처럼 관심이 없는 그로선 너무도 당황스러운 감정. 왜,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건데. 왜, 계속 마음이 쓰이는 건데. 대체 왜.
“…….”
“…….”
“…….”
이상한 데서 중단되어 버린 대화에 나린의 눈이 태준과 윤완을 한 번씩 번갈았다. 스스로 엎지른 물에 안절부절못하던 태준은 이내 결연한 빛을 띄웠다.
“나린 씨, 오늘 할 얘기 있다고 했었죠?”
“네.”
“밖에서 잠깐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그래요.”
태준이 먼저 발길을 돌리고 나린이 뒤따라 나서려는 찰나. 나린의 어깨 위로 묵직한 무언가가 툭 하고 내려앉는다. 동시에 코끝을 간질이는 낯선 향과, 누군가의 체온을 닮은 따스함.
“걸치고 가.”
윤완의 코트가 어느새 나린의 어깨 위로 옮겨와 있다. 요술을 부린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정신 좀 봐. 한겨울에 겉옷도 없이 나가려고 했다니.
“……감사합니다.”
나린의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윤완은 대답 대신 고개만 까딱여 주었다. 희미하게 엿보이는 미소가 오늘 아침 매몰차게 커피를 거절하던 모습과 대조를 이루었다.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야. 나린은 코트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단단히 움켜잡았다. *** 제 몸보다 두 배는 더 큼직한 코트를 망토처럼 두른 나린이 태준을 따라 뜰 한쪽 벤치에 걸터앉는다. 자리를 잡고도 한참이 지나도록 태준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였다. 어려운 얘기인가 보지……. 괜찮으니 하라고 종용하려는데, 나직한 음성이 불쑥, 흘러나왔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어요.”
깜짝 발언이었음에도, 나린은 동요하지 않았다. 아까 ‘지아’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
“평범한 여자예요. 2년 전에 그 애가 내 비서로 오면서 처음 만났어요.”
나린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태준은 알아서 지아에 관한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로 마음을 주게 됐고……. 작년 초부터 정식으로 만나게 됐죠.”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냥 애틋한지 태준의 얼굴이 처음 보는 색으로 물들었다. 나린은 가만히 태준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헤어졌어요. 서로 싫어져서가 아니라 드라마에 단골 소재로 나오는 그런 이유로.”
“…….”
드라마 단골 소재라면 필연처럼 따라붙는 재벌가 집안의 반대……. 그걸 말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어른들께선 내가 집안에 어울리는 배경을 가진 사람을 만나길 바라셨던 거죠.”
역시나.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잔인해서, 난 결국 그 애의 손을 놓고 말았어요. 어떻게 지켜줘야 할지 알 수 없었거든요.”
태준의 말대로라면 이 관계에서 나린은 악역이나 다름없었다. 태준의 그녀는 비운의 여주인공. 나린은 집안 간의 약속을 무기로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 끼어들고 만 부잣집 아가씨 역할. 정말 아침 드라마가 따로 없네. 씁쓸한 미소가 나린의 입매를 우그러뜨렸다.
“그 앨 떼어 놓았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 없으셨는지, 어른들은 이후 내게 약혼자를 만들어 주려고 혈안이 되었어요.”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나린이 아무 반응도 내놓지 못하는 사이, 태준은 독백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나린 씨를 만났고, 나린 씨가 이해해 준다면 잠시나마 어른들의 압박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이기적인 생각을 했던 거예요.”
“…….”
“미안해요, 나린 씨. 처음부터 솔직했어야 했는데.”
고해성사를 마친 태준은 고개를 떨구었다. 나린의 처분만을 기다린다는 듯 축 처진 어깨가 한없이 작아 보였다.
“오늘 늦은 것도 그분…… 때문이에요?”
“네. 갑자기 전화가 와서…….”
헤어졌다면서, 그게 무슨 헤어진 건가요.
“아주 헤어진 건 아닌가 봐요.”
나린은 타박 대신 부드러운 어조를 하여 말했다.
“내 쪽에서 먼저 연락하진 않지만, 그 애가 찾으면 어쩔 수 없이 가게 돼요, 난.”
어쩔 수 없이. 진짜 사랑인가 보다. 진짜로 사랑하면 그렇게 된다고 들었다. 그 상대에 관한 거라면, 그게 뭐든 어쩔 수 없게.
“기분 나빴죠?”
나린은 도리질을 쳤지만 태준은 거듭 사과를 했다.
“미안해요. 약혼 전까지 만나는 척하자고 부탁했던 거 없던 일로 해도 좋아요.”
얘기를 하는 내내 태준은 나린과 눈을 맞추지 못하였다. 그러니 그가 미안해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라는 걸 나린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복잡한 관계에 얽혀서 좋을 게 없는데……. 만나는 척 연극하자고 한 거, 안 되겠다고 딱 자르는 게 맞는 건데. 그러나 결론은 이미 다른 쪽으로 지어져 있다. 온종일 골머리를 썩어가며 고민했던 게 무색하리만큼 즉흥적으로 도달한 결론이었다. 오늘 퇴근할 때까지만 해도 나린은 당연히 그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몇 마디 해 본 게 다인 사람과 연극을 하기에는 위험부담이 커도 너무 컸다. 그러나 이 결심은 불과 몇 시간 전, 오델로 게임판처럼 홱 뒤집히고 말았다. 퇴근 직후, 채 여사로부터 세훈의 생일 파티 얘길 듣고 난 나린이 방으로 올라가려던 찰나였다.
“아 참. 이태준 전무랑은 어떻게 하기로 했니?”
채 여사가 나린의 걸음을 붙잡는다.
“아, 그게요…….”
아직 거절 의사를 전하지 못한 나린은 답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태준과의 약혼이 무산되면 그다음엔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건지.
“저, 큰엄마.”
“응?”
“……혹시 제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나린은 용기를 내어 질문을 던져 보았다.
“그럼 얼른 다른 상대를 찾아봐야지.”
가정법으로 주어진 상황에 영문을 몰라 하긴 했지만, 채 여사는 질문에 충실한 답을 해주었다. 태준이 말한 것처럼 이런 선 자리는 성사될 때까지 무한 반복될 예정인가 보다. 그럼에도 나린은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선보는 거 자체를 안 할 수는 없는 거예요?”
채 여사는 단칼에 싹둑, 그 끈을 끊어놓았다.
“그건 안 돼. 이 집에 들어온 이상 아무하고나 결혼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하고나라니. 이 세상에 ‘아무’는 없다. 내가 사랑하게 될 사람이 ‘아무’일 리 없었다.
“혹시 사랑만 가지고 하는 결혼을 꿈꿨다면,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아.”
나린의 의중을 읽었는지 채 여사가 단호하게 일렀다.
“…….”
나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였다. 침묵이 길어지자 채 여사는 스스로 답을 내렸다.
“그래서, 태준이는 아니라는 거지?”
“…….”
맞다고도, 아니라고도 말할 수 없어서 나린이 침묵을 고수하던 그때. 채 여사가 가볍게 툭, 내뱉는다.
“그럼 다시 찾아봐야겠네. 일단 이번 주말 시간 비워두렴.”
세훈 오빠 생일 파티는 다음 주말이 아니었나.
“이번 주는 왜요?”
“안 그래도 PK 백화점 쪽에서 윤재오 전무랑 널 한번 만나게 했으면 한단 얘기가 들어왔거든. 이번 주말로 시간 맞춰볼게.”
PK 백화점 윤재오 전무는 또 누구지. 무슨 맞선 상대가 이렇게 화수분처럼 뚝딱…….
“아뇨!”
나린은 저도 모르게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커다란 진동이 나린의 성대를 울린다.
“안 그러셔도 돼요!”
“…….”
채 여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나린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좀 더 만나보기로 했거든요.”
“…….”
“……태준 씨랑요.”
시간을 벌자. 이곳 사정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채 여사가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지만 나린은 얼른 채 여사의 방을 도망쳐 나왔다. 그렇게 급박한 상황에 내몰려 최종 결정이 뒤바뀌게 된 것이었다. 설령 태준에게 잊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결정이 달라질 이유는 없다. 외려 그의 처지가 안타까운 마음에 결심은 더욱 굳어졌다. 테라 그룹 저택 뜰, 나린과 태준이 나란히 앉은 벤치 위.
“태준 씨 말대로 해요.”
시원스레 울려 퍼진 음성에 태준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뭘……요?”
“어른들 앞에서 만나는 척하는 거요.”
“정말이에요?”
태준은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
“왜요?”
“그냥, 태준 씨랑 똑같아요. 저한테도 선 자리를 피할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이미 포기 상태이던 태준의 표정이 일순 환해졌다.
“고마워요, 나린 씨. 곤란할 일은 절대 없게 할게요.”
감격에 겨운 태준과 달리 나린은 침착했다.
“근데 세훈 오빠한텐 사실대로 말했으면 좋겠는데, 괜찮을까요?”
이건 최소한의 보험 장치를 두고자 함이었다. 태준이 갑자기 돌변할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가짜’를 증명해줄 증인은 확보해둘 필요가 있어 보였다.
“네. 안 그래도 애들한텐 말할 생각이었어요.”
‘애들’이면 도윤완 부사장님도 포함이겠네. 그냥, 그런 생각이 나린의 뇌리를 스친다.
“…….”
“…….”
말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휘이잉, 겨울바람이 불어 닥쳤다. 아스스해진 나린은 어깨에 걸친 코트를 바짝 여몄다. 그냥 나왔으면 정말 추웠겠다……. 처음으로 윤완에게 고마운 마음이 생겨나는 순간.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나린은 차분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 코트를 주인에게 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