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휘둘리지 않도록 (7/101)

#7. 휘둘리지 않도록2021.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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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802573632.jpg“이게 어떻게 된 거야?”

‘페퍼’에 도착한 세훈은 서로 대치 중인 윤완과 나린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해 했다.

16558025736325.jpg“몰라. 아까부터 저렇게 노려보네.”

팔짱을 풀며 윤완이 대답했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을 지탱하느라 나린은 본의 아니게 윤완을 노려보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1655802573632.jpg“나린아, 괜찮아?”

나린의 어깨에 세훈의 손이 얹어졌다. 윤완의 눈썹이 신경질적으로 굽어진다.

16558025736325.jpg‘아무리 사촌 오빠라지만 저렇게 막 만져도 되는 건가? 여태껏 남남으로 살았으면서.’

16558025736342.jpg“괜찮아요…….”

1655802573632.jpg“집에 가자.”

16558025736342.jpg“네…….”

세훈이 손을 내밀고, 나린은 그의 팔에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자그만 손이 세훈의 팔을 감싸는 걸 본 윤완은 탐탁지 않은 표정이 됐다. 방금 전 똑같이 붙잡아 주려던 그의 팔은 기어이 거부하던 모습과 겹쳐졌다. ……그러니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윤완은 다정한 사촌 남매를 등지고 카운터로 향했다. 계산을 마친 뒤 엘리베이터로 나오자, 이젠 거의 세훈에게 안기다시피 기대어 있는 나린이 보였다. 어쩐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아서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리고 마는 윤완이었다. *** 삐- 삐- 요란한 알람 소리에 놀란 나린이 잠에서 깬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지만 본능적으로 출근을 해야 하는 평일임을 기억해내고 침대 밖으로 기어 나왔다. 아직 가시지 않은 숙취 때문에 두통이 몰려왔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시계를 확인하니 새벽 다섯 시. 세훈의 차로 출근하는 걸 포기하면 더 잘 수 있는 시간이지만 경황이 없어서 미리 말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달랑 메시지로 통보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 단념하고 출근 준비에 착수하였다. 세훈과의 약속에 늦지 않게 방을 나서는데, 코트 호주머니 안에서 지이잉, 폰이 진동한다.

16558025736359.jpg[나린 씨, 오늘 시간 되면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말풍선 위에 새겨진 이름은 태준의 것이었다. 아, 그렇지. 완전 잊고 있었네. 그 제의에 응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해야 하는데.

16558025736342.jpg[언제 퇴근할지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결정한 게 없는 나린은 시간을 벌 요량으로 회피성 답을 보냈다. 결산 보고가 막 끝난 터라 많이 늦을 것 같지 않았는데도. 그러나 태준은 몰랐던 계획을 앞세워, 나린이 빠져나려는 시도를 차단했다.

16558025736359.jpg[저녁에 나린 씨네 갈 거거든요. 늦게까지 있을 것 같으니 천천히 와요.]

  이제 보니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넌 대답만 하라’는 질문이었다.

16558025736342.jpg[알겠어요.]

  폰을 끄고 나자 두통이 재발한 것 같다. 숙취보다 더 핑글핑글 도는 어지럼증이 나린의 뇌리를 장악하였다. 업무 중간중간에라도 열심히 생각해봐야겠다.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내가 이 연극을 감당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

1655802575386.png“나린아, 저녁에 늦니?”

현관을 나서는 나린의 등 뒤에서, 채 여사가 물었다.

16558025736342.jpg“아, 아뇨.”

그러고 보면 CFO가 윤완으로 바뀌고 야근 일색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아주 악질 상사인 것만은 아닌가.

1655802575386.png“퇴근하는 대로 곧장 집으로 오렴. 할 얘기가 있어.”

16558025736342.jpg“네. 다녀오겠습니다.”

채 여사를 향해 단정히 허리를 숙여 보인 나린은 현관문을 잡고 저를 기다리는 세훈에게 한 번 더 꾸벅, 고개를 숙였다.

16558025736342.jpg“감사합니다.”

1655802573632.jpg“뭘, 이 정도 가지고.”

뜰을 지나 대문 밖에 대기 중인 승용차에 올라타자 세훈이 불쑥 입을 열었다.

1655802573632.jpg“어머니가 하실 얘기, 아마 내 생일 파티일 거야.”

16558025736342.jpg“네?”

대뜸 고지된 생일 일정에 나린의 고개가 갸우듬해진다.

1655802573632.jpg“그 파티에서 너를 정식으로 소개하시려는 것 같아.”

16558025736342.jpg“아.”

방점은 ‘생일’이 아니라 ‘파티’에 찍혀 있었다. 나린이 공식적으로 그들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는, 이를테면 선포식 같은 걸 하려나 보다. 세훈의 생일 파티라면 그만큼 적절하고 자연스러운 명분이 없을 것이었다.

1655802573632.jpg“그 뒤엔 기사가 나가겠지. 그러니 개명 관련된 건 그 전에 마무리 지어 두는 게 좋아. 가족관계등록부는 다 정리됐다고 했지?”

16558025736342.jpg“네.”

1655802573632.jpg“그럼 슬슬 회사에도 알려야겠네.”

나린은 쓸쓸히 고개를 끄덕이며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알고 있었지만……. 언젠가는 닥칠 일이라는걸. 문득 수정이가 보고 싶어진다. 지옥 같은 만원 지하철을 뚫고 퇴근하면 부산스레 그녀를 맞아주던 동갑내기 외사촌 수정은 나린의 해피 바이러스였다. 짜증 나는 일도, 화나는 일도, 스트레스 받는 일도, 수정이랑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 보면 금세 풀어지고는 했는데. 수정아……. 나는 이대로 우리가 살던 세상과 영영 안녕인 걸까. 앞으로는 쭉 이 호화스런 감옥에 갇혀서 조용히…… 그렇게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1655802573632.jpg“근데 어제 그렇게 취해 놓고 잘 일어나네.”

나린의 감상을 흩어놓으며, 세훈이 잊고 있던 어제의 기억을 들추었다.

16558025736342.jpg“월급 받는데 당연한 거죠.”

1655802573632.jpg“오. 나린이 같은 직원이 많아야 하는데……. 윤완인 좋겠다.”

글쎄.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1655802573632.jpg“어제 일은 다 기억나?”

나린은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16558025736342.jpg“네.”

안 그래도 그래서, 윤완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다. 보고서 줄 간격이 어떻고, 반올림 합계 차이가 어떻고, 그런 얘기들을 마구잡이로 꺼내놓았던 게 죄 기억이 나서. 이럴 땐 웬만해선 CFO에게 직보고할 일이 없는 대리라는 게 참 다행이었다. 빨리 승진하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1655802573632.jpg“술 마시니까 용감하더라. 겁도 없이 부사장님을 노려보던데?”

16558025736342.jpg“아, 그건 눈 안 감으려고……. 노려보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나린은 홧홧한 볼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1655802573632.jpg“그래도 윤완이는 처음이었을걸. 부하 직원이 자길 똑바로 노려본 건. 그것도 잡아먹을 듯이.”

16558025736342.jpg“……그렇게 심했어요?”

1655802573632.jpg“완전.”

세훈은 재밌다는 듯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 들렸다.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 잔과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양손에 들고, 팔로 유리문을 밀어 빠져나온다. 차디찬 아침 공기에 몸을 떨면서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에 꽂힌 빨대를 쏙 물었다. 입술을 오므리자, 시린 공기만큼이나 차가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흐르며 묵은 갈증을 씻어주었다.

16558025736342.jpg‘이제 좀 살 것 같네.’

커피를 반쯤 들이켠 나린은 한층 상쾌한 표정이 되어 회사 건물로 들어갔다. 따뜻한 커피는 윤완의 몫이었다. 어제저녁의 무례를 조금이라도 용서받으려면 말을 걸 구실이 필요했다. 컵이 조금이라도 지저분해질까 봐 흘리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사이 사무실에 도착했다. CFO실에 불이 켜져 있는 걸 확인한 나린은 가방과 코트와 제 몫의 찬 커피를 자리에 올려두고 곧장 CFO실로 향했다. 똑똑.

16558025736325.jpg“네.”

문을 밀고 그의 소굴로 용기 있는 걸음을 내딛는다.

16558025736342.jpg“안녕하세요, 부사장님.”

정중하게 허리를 접은 나린이 소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책상 위에 커피를 올려놓았다.

16558025736325.jpg“뭐지?”

힐끗, 커피에 시선을 준 윤완이 삐딱선을 탔다.

16558025736342.jpg“아, 제 거 사면서 같이 샀어요. 어제 감사했다는 의미로…….”

나린을 가만히 쳐다보던 윤완은 커피는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16558025736325.jpg“이런 커피 안 먹는데.”

이런…… 커피? 최소한 고맙다는 말이라도 들을 줄 알았던 나린은 황당함에 말문이 막혔다. 빈말이지만 ‘고마워.’라는 말을 듣고, 그 뒤엔 ‘어제 죄송했습니다.’라고 답하려던 시나리오가 첫 단추부터 어긋나는 순간. 하지만 그가 패스트푸드점 커피와는 어울리지 않는 재벌이란 걸 깜빡한 실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558025736342.jpg“죄송합니다. 이 시간엔 문을 연 카페가 없어서요.”

16558025736325.jpg“금방 정 대리 출근 시간이야. 괜히 눈에 띄었다간 좋을 게 없을 텐데.”

사과의 말은 깡그리 무시된 채, 비서 눈에 띄기 전에 빨리 나가라는 매정한 경고만이 날아들었다. 뭐야, 그러니까……. 싸구려 커피 따위 성의 표시로도 생각 못 해주겠다, 이거야? 나린이 윤완을 쏘아본다. 당연히, 그가 저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들키지 않을 거란 계산 정도는 끝낸 뒤였다. 싫으면 말라지. 누군 예뻐서 사 온 줄 알고.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나린은 묵례만 남긴 채 그대로 CFO실을 빠져나왔다. 홀대받은 커피를 회수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나린이 나간 후, 모니터에 의미 없이 두었던 시선을 거둔 윤완은 의자 등받이를 한껏 뒤로 젖혔다. 어제 술에 취한 나린이 ‘페퍼’의 종업원이나 세훈에게 안기는 걸 본 뒤 느꼈던 감정들은 윤완으로선 꽤나 당혹스러운 것들이었다. 다시는 그런 생경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이 애와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렇게 결심을 했더랬다. 아직까지는 결심대로 흘러가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구멍이 뻥 뚫린 듯한 공허함이 그를 덮쳤다. 금방 괜찮아지겠지. 쓴웃음을 머금은 윤완은 애써 제 속을 다독거렸다. *** 세훈의 추리가 적중했다. 나린이 퇴근해서 돌아오자마자, 채 여사는 세훈의 생일 파티 얘기를 꺼냈다.

1655802575386.png‘다음 주 토요일에 세훈이 생일 파티가 있는데, 그 자리에서 널 정식으로 소개하려고 해. 웬만한 사람들은 다 초청받아서 오니까.’

  동시에 유의사항을 주지시키는 것 또한 잊지 않는다.

1655802575386.png‘유일하게 남은, 돌아가신 서방님의 핏줄. 거기에만 주안점을 둘 거야. 그러니까 엄마 쪽 얘긴 가능한 한 하지 마. 누가 물어도 미소로 넘기고.’

  그리고 마지막은 명령으로 끝맺음 되었다.

1655802575386.png‘파티 드레스 맞추러 가게 내일모레는 휴가 내고.’

  옷이 이렇게 많은데 또 산다고? 이 저택의 사치스러운 생활양식엔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똑똑. 이곳에 온 뒤 노크 소리는 언제나 나린을 긴장시켰다. 외삼촌네와 다르게 누가 어떤 용건으로 들이닥칠지 몰랐으니까.

16558025736342.jpg“네.”

나린은 큰소리로 응답하며 직접 문을 열었다. 방문자는 미옥이었다.

16558025736342.jpg“안녕하세요.”

아직도 미옥에게 예의를 다하는 나린이다.

16558025800319.jpg“부사장님께서 부르세요. 응접실에 손님 와 계시다고.”

부사장님이라는 호칭에 공연히 뜨끔했다. 이 부사장님은 그 부사장님이 아닌데.

16558025736342.jpg“손님이면, 이태준 씨요?”

낮에 주고받은 메시지를 기억하며 물었는데, 미옥의 답은 뜻밖이었다.

16558025800319.jpg“아뇨. 이태준 전무님은 안 오셨어요.”

16558025736342.jpg“그럼요?”

예상과 다른 전개.

16558025800319.jpg“명준우 전무님이랑…….”

16558025736342.jpg“…….”

16558025800319.jpg“도윤완 부사장님이요.”

예상과 다른 등장인물. 나린의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 달음박질친다. *** 응접실 앞에 당도한 나린은 쉽사리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잠시 서성이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1655802573632.jpg“왜 안 들어오고 있어?”

기다리다 지쳐 직접 나린을 데리러 가려던 세훈이었다.

16558025736342.jpg“아. 막 노크하려던 참이었어요.”

대충 둘러댄 나린은 세훈을 따라 쭈뼛쭈뼛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1655802573632.jpg“명준우. 케이콤 통신 마케팅팀 전무야. 우리 밴드 멤버.”

세훈은 응접실 안의 낯선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죽은 네 언니가 너무너무 사랑했던 사람. 차마 덧붙일 수 없는 또 하나의 신분은 처연한 미소로 갈음한다.

16558025736342.jpg“안녕하세요.”

나린은 최대한 윤완과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준우에게 인사를 건넸다. 회장님과 한집에 살고 부사장님과 단둘이 술을 마시고. 그러다 보니 전무쯤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나 보다. 별로 긴장이 되지 않는 걸 보면.

16558025821269.jpg“반가워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

준우도 살짝 고개 숙여 답례하였다. 무표정할 땐 윤완 못지않게 차가워 보였는데, 미소를 지으니 태준처럼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서글퍼 보이는 눈빛에 마음이 쓰였다. 사연이 담긴 듯한 눈빛.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나. 뚫어져라 쳐다보는 준우가 부담스러워진 나린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16558025736342.jpg“태준 씨는요?”

어색함을 이기려 아무 말이나 찾아 던졌는데 하필 태준 얘기였다.

1655802573632.jpg“오. 벌써 태준이랑 그런 사이야?”

짓궂은 세훈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놀려댄다.

16558025736342.jpg“그런 거 아니에요.”

1655802573632.jpg“잘 된 거지. 선봐서 좋은 사람 만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데.”

16558025736342.jpg“아니라니까요.”

1655802573632.jpg“괜찮아. 쑥스러워할 거 없어.”

진짜로 그런 거 아닌데……. 아니라고 해봤자 들을 것 같지가 않아 더 이상의 맞대응은 포기하기로 했다. 입을 다문 나린은 세훈을 피해서 좀 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끝에, 그가 있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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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고히 정면만 응시하고 있는 그.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잔뜩 찌푸린 얼굴이다. 내가 부사장님처럼 다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으면 감사해서라도 웃고 살 텐데. 실없는 생각이 떠오른 나린은 자그맣게 미소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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