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무서워서2021.06.18.
“오래 기다렸습니까?”
알고 있다. 의미 없는 인사치레인걸.
“아뇨.”
나린은 영혼을 싣지 않은 단답으로 응수하였다. 서늘하도록 무표정한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숨이 턱 막혔다. 업무 연장과도 같은 저녁식사. 한시라도 빨리 해치우고 집에 가고픈 심정이었다.
“배고플 테니 주문부터 하죠.”
자리에 앉은 윤완은 메뉴를 보지도 않고 손을 들어 종업원부터 불렀다. 서두르는 걸 보니 그도 같은 심정인 모양이다.
“맥캘란 레어캐스크랑…….”
나린의 차례라는 듯 윤완이 눈짓을 하자,
“아, 저도 같은 걸로요.”
메뉴를 볼 새가 없었던 나린은 윤완의 주문을 흘려듣고 말했다. 외계 생명체라도 만난 것처럼, 윤완의 눈꼬리가 길어졌다.
“왜요?”
나린이 뭐가 잘못됐냐는 듯 묻고,
“해산물 플래터 둘.”
윤완은 대답 대신 종업원을 향해 마저 주문을 했다. 둘만 남겨지기 무섭게 윤완의 시선이 나린을 관통한다.
“위스키 좋아하나 봐.”
비스듬한 시선만큼이나 말투도 비스듬하게. 심지어는 반말이었다.
“잘 못 마시는데요.”
역대 CFO들도 모두 반말을 해왔으니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한 나린은 그러려니 했다. 사촌 오빠 친구에, 직속 상사에, 그걸로도 모자라서 회사의 주인, 대주주시니까.
“방금 같은 거 달랬잖아.”
“네……?”
그러니까 윤완이 처음 말한 게 음식 종류가 아니라 위스키 이름이었나 보다. 상황을 파악한 나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당황해서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종업원이 위스키부터 내왔다. 윤완은 위스키 두 병을 각자의 영역에 칼같이 구분지어 놓았다. 한 병은 제 가까이. 또 한 병은 나린 가까이. 그러더니 온더락 잔에 얼음을 넣고, 마치 ‘이 한 병은 온전히 네 몫이야.’라고 압박하듯 나린 쪽 병을 들어 기울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린은 어쩔 수 없이 윤완이 내민 잔을 받아 들었다. 잔을 입술 가까이로 당겨와서 단박에 털어 넣는다. 어쩐지 오기가 치밀었다. 독한 알코올이 목구멍을 태우고, 호기롭던 기세와 다르게 콜록콜록 기침이 났다. 그 반응이 재밌는지 윤완의 입 끝이 씰룩대었다. 나린의 눈엔 그저 치사하게 보일 뿐인 비소. 한 시간 전만 해도 평화롭기 이를 데 없던 하루였는데 꼭 위스키를 뒤집어쓴 기분이 되고 말았다. 딱 위스키 같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너무 독해서 인상이 찌푸려지는.
“보기와 다르게 지는 걸 싫어하나 보군.”
“아닌데요…….”
잘 지는 편인데……. 도윤완 부사장, 당신 앞에서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당신한테만. 아직 할 말 못 할 말 구분은 되는 걸 보니, 한 잔 정도는 끄떡없는 듯하다.
“…….”
“…….”
앙다문 나린의 입술에 윤완의 눈길이 닿았다. 퍼붓고 싶은 말이 한 바가지인데도 꾹 참고 있는 표정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참을 거면 표정도 같이 참든지.
“세훈 오빠 부탁받고 귀찮으셨겠어요……. 거절하셨어도 되는데…….”
혈액을 타고 도는 알코올의 힘을 빌려 나린은 솔직함의 가시를 세웠다.
“어차피 저녁은 먹어야 하니까.”
별일 아니라는 듯 받아치는 윤완을 보니 어쩐지 약이 오른다. 무심결에 제 몫의 위스키병을 향해 팔을 뻗는데, 한발 빨리 움직인 윤완이 위스키병을 멀찍이 옮겨놓았다. 목표물을 잃은 나린의 손이 허무하게 공중을 갈랐다.
“……왜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혼자 다 마셔야 할 것처럼 굴더니, 그새 마음이 바뀐 건가.
“취하면 데려다줘야 하잖아.”
혹시나 싶었던 게 무안하리만치 무심한 답이 되돌아왔다. 그럼 그렇지. 그냥 봐줄 리가 없지.
“걱정 마세요. 이 정도론 취하지도 않을 거고, 취해도 혼자 택시 타고 갈 거예요.”
신세 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나린은 상체를 세워 우악스레 병을 집었다. 어이가 없어서 윤완의 입술 새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저러고도 지는 게 싫지 않다고……? 보기 드문 오기. 그럼에도 밉지가 않다. 어쩐지 좀 더 오래, 이대로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업원이 해산물 플래터를 내오면서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
“우리 회사 다니는 거 고집하는 이유가 뭐야?”
이제 돈이 아쉬울 것도 없고, 자아실현을 원한다면 테라 호텔에 더 높은 자리가 수두룩할 텐데. 왜 도일 전자 대리냐고……. 다시 입을 연 윤완은 그걸 물었다. 아까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부터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질문이기도 했다.
“힘들게 노력해서 들어간 회사니까요.”
돌발질문에 답하는 나린의 음성이 겨울 바다를 닮은 듯 쓸쓸하다.
“……그게 다야?”
“네…….”
윤완은 전혀 공감을 못하는 것 같았다. 나린은 짤막한 해설을 덧붙이기로 했다.
“다른 건 다 제 게 아니지만, 이것만큼은 제 힘으로 얻은 제 거거든요.”
처음부터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난 당신은 모르겠죠. 그런 간절함을……. 말을 마친 뒤, 깔라마리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입 안에 넣었다. 그게 유일하게 껍질을 벗기거나 나이프를 쓰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음식을 봤다가, 위스키를 봤다가, 창밖을 봤다가,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나린의 눈을 윤완의 눈동자도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대체 어딜 봐서 다현일 닮았다는 거지. 이렇게 다른데……. 전혀 다른 사람인데.
“그러는 부사장님은 제가 도일 전자에 다니는 게 불편하세요?”
사촌 오빠 친구와 직장 상사, 그 경계에서 미련 없이 직장 상사를 택한 건 그 편이 의지를 전달하는 데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다른 부서도 아니고 경영지원실이잖아. 민감한 정보가 많으니 달갑진 않지.”
“완전 스파이 취급이네요.”
나린의 입술 새로 픽, 공기가 새고, 분홍빛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술 때문인지 발그레한 볼이 싱그러운 미소와 참 잘 어울린다. 나린이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거였다. 윤완의 심장 소리가 쿵쿵, 넓게 깊게 공명하였다. 눈앞의 남자가 속이 시끄러워진 줄도 모른 채, 나린은 연거푸 잔을 비웠다. 윤완이 고른 위스키가 마음에 드는지 홀짝홀짝 잘도 마셨다.
“먹다 보니까 중독되네요. 맛있어요.”
“…….”
음식을 먹었다가 술을 마셨다가 하는 나린의 모습을, 윤완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도일 전자를 고집하는 이유에 대한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다음엔 무슨 수를 써서든 회사에서 내보냈을 거다. 하지만 나린은 도일 전자 일개 대리 자리를 매우 소중한 자산인 양 말했다. 제 힘으로 얻은, 온전한 제 것이라고. ‘테라 호텔 손녀’라는 타이틀에 비하면 한량 보잘것없는 것인데도. 어쩌면 자신이 속한 세계를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지도 모르지. 그래서일까. 말이나 행동에서 묻어나는 순수함이 날 때부터 잘 벼려진 그의 뾰족함을 무디게 만들었다. 주변에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윤완이라서 무의식중에 이런 만남을 갈구해왔는지도 몰랐다.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아도 되는 상대.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되는 대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을 간질이는 사람. 윤완이 생각에 잠긴 사이, 나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 드세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윤완의 어깨가 움찔하였다. 그러면서도 태연하게 포크를 움직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나린은 취기로 풀어져 가던 눈을 부릅떴다.
“부사장님, 저도 궁금한 게 있어요…….”
취하지 않을 거라더니. 인형처럼 동그랗게 뜬 눈이 귀여워 보인다. 눈앞의 상대를 귀엽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었나, 내가.
“뭔데.”
윤완은 당혹감을 삼키며 대꾸했다. 그러나 이어진 나린의 말에 윤완의 당혹감이 증폭되었다.
“보고서 줄 간격 안 맞는 게 왜 그렇게 싫어요……? 반올림한 표 합계 맞추는 건 또 왜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어물어물 발음도 부정확한 푸념에 윤완의 미간이 지렁이 모양을 그렸다.
“줄 간격이 좀 안 맞아도 내용만 괜찮으면 의사결정 하는 데 아무 지장 없는 거 아니에요……?”
“…….”
“표 합계도 그래요……. 틀린 게 아니라 반올림하다 보니 그런 건데……. 합계를 맞추려면 오히려 숫자를 왜곡해야 한다고요…….”
구구절절, 왜 사소한 문제로 걸고넘어지냐는 항의. 쪼. 잔. 하. 게. 직속 부하 직원이 들이받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서 윤완도 답지 않게 발끈하고 만다.
“경영지원실에서 올린 보고서니까.”
“…….”
“현장에서 올린 보고서면 적당히 넘어갔을 거야. 하지만 경영지원실은 달라야지. 경영진에 올리는 보고서도 제대로 못 쓰면 경영지원실이 존재하는 의미가 있나?”
장황한 훈계에도 나린은 아랑곳 않았다.
“조 부사장님은 그런 거 지적 안 하시고도 의사결정 잘만 하셨는데…….”
“뭐?”
윤완의 얼굴이 있는 대로 구겨졌다. 겁도 없이 전임 CFO와 비교하다니. 취해서 보이는 게 없나 보네. [급한 일 끝났으면 와서 사촌 동생 데려가.]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윤완은 세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폰을 코트 안에 넣어두는데, 별안간 나린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린은 휘적휘적 팔을 내저으며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테이블 담당 종업원에게로 걸어갔다. 그 몸짓이 아찔하리만치 위태로워 보여서, 윤완도 따라 일어났다. 한 발 한 발, 나린이 ‘남자’ 종업원에게 가까워질 때마다 윤완의 마음도 어수선해졌다. 당장이라도 붙들어 자리로 돌려놓고 싶은 충동에 맥박이 겅중겅중 뛰었다.
“화장실이 어디예요……?”
“저쪽입니다.”
종업원이 공손하게 가리킨 쪽으로 몸을 트는 순간 나린이 휘청 균형을 잃고. 손쓸 새도 없이 종업원의 가슴에 콕 박히는 나린의 얼굴. 그 광경을 본 윤완의 눈에 섬광이 번쩍였다. 윤완은 냉큼 달려가서 나린을 종업원으로부터 떼어놓았다. 거친 손동작에 나린의 상체가 또 한 번 휘청인다.
“정신 좀 차리지?”
잠시 일직선을 이루는가 싶던 나린의 몸이 이번엔 윤완 쪽으로 기울어졌다.
“연나린 대리.”
얼결에 나린의 어깨를 붙든 윤완은 그녀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직책까지 붙여 부른 건 나린이 그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위치에 있음을 상기시켜 줄 의도에서였다. 나린이 휙, 고개를 들고. 순식간에 얽히는 눈빛. 저를 올려다보는 눈에 뜻밖의 서러움이 가득하여서 윤완의 동공에 지진이 인다.
“전 강 대리인데요……. 강나린 대리.”
“…….”
“아직 사내 시스템엔 그렇게 되어 있을 거예요……. 바꾸긴 해야 하는데…….”
연 회장의 저택으로 들어가기 전 나린은 유전자 검사와 친자 소송을 거쳐 정식으로 할아버지의 성을 따르게 되었다. 이제 개명에 따른 후속 절차만이 남았는데,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건 두려움 때문이었다. 원래 속해 있던 세계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와야 한다는 두려움. 다시는 예전에 살던 집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있죠…… 무서워서 바꿀 수가 없어요……. 이름을 바꿨다가는 진짜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다시는……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
“아무리 생각해도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은데…….”
나린의 눈 끝에 물기가 어리는 걸 본 윤완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세훈이 동생이라서 그런 거야. 세훈이랑 다현이 동생이라서. 그렇게 이유를 끌어다 붙인 윤완은 나린을 부축해 화장실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린을 안으로 들여보낸 뒤 벽에 기대어 선다. 그는 이마 위로 툭, 제 손등을 얹었다. 어쩐지 혼이 다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하루아침에 재벌가 손녀가 됐으면 기쁘게 누릴 법도 한데, 대체 뭐가 무섭다는 걸까. 이래저래 이해할 수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잠시 뒤 나린이 문을 열고 나왔다. 이리저리 비틀거리면서도, 붙잡아주려는 윤완의 손길만은 꿋꿋이 거부한다. 아슬아슬한 걸음걸이에, 보고 있는 윤완의 심장이 쫄깃해졌다. 모르는 남자 품엔 잘도 안기더니. 기가 막혔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바투 붙어서며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 대비했다. 취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나린은 제 자리를 잘도 찾아갔다.
‘정신력 하나만큼은 칭찬할 만하네.’
윤완은 들키지 않게 미소를 띄웠다. 시종일관 하늘을 향해 있던 눈썹 끝은 아래로 단정히 떨어뜨려진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