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너밖에 적임자가 없어.2021.06.15.
월요일, 테라 그룹에 입성한 뒤 첫 출근을 한 나린은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출근길엔 세훈이 나린을 태워다줬다. 채 여사가 출퇴근용 차량과 기사를 배정해 주었지만, 다른 직원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나린이 끝끝내 거절했다. 그러나 채 여사도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시킬 수 없다고 맞섰기 때문에 결국 세훈이 나서서 중재를 했다.
‘당분간은 제가 태워다줄게요. 마침 가는 길이기도 하고, 일찍 출근하니까 직원들 눈에 안 띌 거예요. 퇴근은 시간 맞추기 애매하니까 택시로 하면 될 거고요.’
나린과 채 여사는 한 발짝씩 양보하여 세훈의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택시비는 나린이 일요일에 받은 신용카드로 지불하기로 했다. 처음 보는 카드의 이름을 포털에 검색해본 나린은 한 달 치 결제 대금에 맞먹는 연회비를 확인하고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이 카드는 택시비 결제용도 외로는 쓰지 않을 것이다. 아직 온전히 이 집 사람이 된 것처럼 굴 순 없었다. 세훈의 출근 시간은 일러도 너무 일렀다. 이 정도면 정말 다른 사람 눈에 안 띌 시간인 건 맞는데……. 나린은 연신 하품을 해대며 내일부턴 출근길에도 택시를 타야겠다고 결심했다.
“어제 태준이랑은 어땠어?”
세훈이 불쑥 말을 걸어온다.
“아, 그냥…… 저녁만 먹었어요.”
‘제가 이런 부탁한 건 당분간은 비밀로 해주세요.’
나린은 태준의 부탁을 떠올리며 얼버무렸다.
“그 녀석 괜찮아. 후보가 몇 없다는 걸 감안하면 특히 더.”
나린이 고개를 갸웃한다.
“무슨 후보요?”
“신랑감 후보. 할아버지 눈에 찰 만한 상대는 대부분 약혼했거나 약혼하기로 한 상대가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거거든. 아니면 성격이 엄청 이상하거나.”
이로써, 이번에 거절해도 또 똑같은 선 자리가 이어질 거라던 태준의 경고가 그저 허울뿐인 경고가 아님이 확인되었다. 태준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할지……. 그렇게 해서라도 잠시 비를 피하는 게 맞는 건지 점점 더 헷갈리기 시작했다. 초조함에 입술을 깨무는데 세훈이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오늘 저녁에 뭐 해? 약속 없으면 내가 저녁 사줄게.”
“아, 바쁘실 텐데 괜찮아요.”
“너랑 저녁 먹을 시간 정도는 있어. 이제 한집에 살게 됐는데 친해져야지.”
세훈이 건네는 따스한 미소에, 굳어 있던 나린의 마음도 조금은 말랑해진다. 그의 말처럼 한집에 살게 됐는데, 너무 거리를 두는 것도 옳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상대방은 이렇게 노력하는데.
“별일 없어요.”
“잘됐네. 내가 너네 회사 앞으로 갈게. 거기 맞은편에 ‘페퍼’라고 있거든. 일곱 시. 괜찮지?”
“네.”
교차로 너머 도일 전자 본사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린은 가방끈을 거머쥐며 차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럼 저녁에 봐.”
해맑은 미소를 장착한 세훈이 나린에게 손을 흔들어준다. *** 사무실로 올라오자, 텅 빈 적막감이 나린을 에워쌌다. 결산 때문에 날을 새울 때 빼고는 혼자 있어 본 적 없었는데……. 똑같이 텅 빈 사무실이었지만 아침의 자연광은 밤의 인공조명과 색이 달라 낯설었다. 나린은 하품을 참으며 자리에 앉았다. 쏟아지는 겨울 아침 햇살이 노곤함을 배가시킨다. 잠깐 눈 좀 붙일까. 다른 직원들 출근 전까지만. 자꾸만 꺼지는 눈꺼풀을 그대로 내려뜨리며 책상 위에 양팔을 포개었다. 순간, 저벅 하는 인기척이 나고, 화들짝 놀란 나린은 소리가 난 쪽으로 의자를 빙글, 회전시켰다.
“사무실에서 뭐 하는 겁니까.”
인기척의 발원지엔, 윤완이 서 있었다.
삐딱하게 내리꽂히는 시선에 나린이 엉거주춤 일어선다.
“죄송합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나린은 푹 고개를 숙였다.
“그만둘 생각 없다고 야심차게 말하길래 근무 태도가 남다를 줄 알았는데……?”
“…….”
반말을 듣고 빈정이 상했지만, 그의 위치를 상기하며 참는다. 상사도 그냥 상사가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의 최고 수장이 아닌가. 윤완의 눈이 불현듯 나린의 눈가에 가 닿았다. 세훈과 준우는 다현을 닮았다고 말했던 눈. 하지만 윤완에겐 전혀 다르게만 보이는 눈. 불시에 나린이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의 눈빛이 공중에서 부닥친다. 별안간, 멀미라도 난 것처럼 윤완의 속이 울렁거렸다. 동시에 몰아세울 마음도 싹 달아나고 말았다. 입술을 굳게 다문 윤완은 그대로 나린을 지나쳐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매서운 타박이 쏟아질 줄 알았던 나린으로선 의외의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뭘까, 저 사람은……. 제 상식으로는 도통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나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망했어, 나린 씨.”
팀장 배석 하에 CFO 보고를 마치고 나온 민하의 얼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다. 자리로 돌아가는 팀장의 얼굴도 조금 짜증스러워 보였다.
“보고 잘 안 됐어요?”
“어……. 내용은 보지도 않으셨어.”
“왜요?”
“보고서 보자마자 대뜸 줄 간격이 안 맞는대. 그리고 표의 가로세로 합계가 안 맞는다는 거야. 숫자는 반올림 때문에 그렇다고 했더니 기초 데이터가 어떻든, 보고서상 합계가 안 맞으면 신뢰할 수 없으니 맞춰 오래.”
나린은 민하가 던져 놓은 보고서를 요리조리 넘겨보았지만, 도무지 어디가 줄 간격이 안 맞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숫자를 반올림한 상태로 더하면, 원 숫자를 더한 후 반올림한 합계랑 안 맞는 건 당연지사지. 산수도 모르나?
“다시 암흑시대야. 조 부사장님은 형식보다 내용 위주로 보셨는데…….”
민하는 괴로워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재보고는 언제예요?”
“내일 아침 여덟 시.”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새 다섯 시 반이었다. 참 쓸데없는 걸로 부서원들의 발목을 잡는 사람이구나. 나린은 그가 딱 그 싸늘한 웃음이 어울리는 만큼의 악질 상사라고 생각했다.
“과장님은 다른 데 보완할 거 없나 점검해 보세요. 표 반올림 차이는 제가 맞출게요.”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드리면 세훈과의 저녁 약속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한 나린은 민하를 돕기로 했다.
“그래 줄래? 살았다. 그럼 원본 엑셀이랑 같이 보낼 테니까 부탁해.”
“네.”
나린은 서랍에서 계산기를 꺼내며, 윤완이 있을 CFO실을 쏘아봤다. 정말 쪼잔하기 그지없다.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경영진이 이런 사소한 트집이나 잡다니.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어쩜 이렇게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을 수가 있나. 이 정도면 신기할 지경이었다. *** 약속 시간 직전, 아슬아슬하게 보고서 수정을 완료한 나린은 PC 전원 버튼을 누름과 동시에 코트와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급히 달려나가는 와중에 세훈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네. 지금 가고 있어요.”
[아, 그게 아니라, 좀 늦을 것 같아서. 차가 막히네.]
“아, 괜찮아요.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오세요.”
[그래. 고마워.]
매무새를 다듬을 시간을 번 나린은 로비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무너진 베이스를 수정하고 입술을 선명하게 덧칠한다. 세훈이 지정한 레스토랑 ‘페퍼’는 회사 건물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입사 후 4년을 매일같이 지나다녔지만, 내부에까지 들어와 본 건 처음이었다. 테이블은 모두 창가로만 빙 둘러져 있고,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크리스탈 조각이 인테리어에 고급스러움을 더해주었다. 세훈의 이름으로 된 예약을 확인한 나린은 한적한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저 도착했어요. 괜찮으니까 천천히 오세요.] 자리를 잡고 앉은 후 세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침 일찍 일어난 탓인지 그새 또 졸음이 밀려들었다. *** [오빠, 내일 우리 집으로 저녁 먹으러 와.] 윤완은 혜원의 메시지를 보고도 답을 해주지 않았다. 신혜원. 창조 일보 신중호 회장의 외동딸이자, 윤완의 정혼자. 집안의 필요에 따라 짝지어진 인연일 뿐인데 끈질기게 윤완의 진심을 갈구하는 여자다. 혜원의 질척임이 피곤한 윤완은 될 수 있는 한 그녀를 피했다. 때로는 너무 귀찮아서 정식 약혼 전에 혼담을 깨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다. 수틀리면 언제든 계약 파기가 가능한 비즈니스 상대에 불과했으니까.
‘대외적인 약혼녀 역할, 아내 역할. 딱 거기까지만이야. 더 바랄 거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
약혼 얘기가 논의되기 시작한 시점에 윤완은 이미 경고했었다. 그땐 알았다고 해놓고 입장을 바꾼 건 혜원이다. 그러니 이 냉대도 전부 자초한 셈이었다. 혜원의 연락을 무시한 윤완은 비서에게 차를 대기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모처럼 일찍 퇴근할 계획이었다. 코트를 챙겨 입는데, 지이잉, 폰이 울린다. 혜원일 거라고 짐작한 윤완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발신자를 확인했다.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예상과 다르게, 세훈이었다.
[너 오늘 저녁 약속 있냐?]
세훈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전달되어 온다.
“아니.”
[오, 잘 됐다.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하자.]
“쉬운 거면.”
[지금 바로 ‘페퍼’로 가서 나린이랑 저녁 좀 먹어 줘.]
폰을 다른 쪽 손으로 고쳐 쥔 윤완이 인상을 쓴다.
“왜 그래야 하는데?”
[일곱 시 약속이라서 거의 다 왔는데, 비서실에서 연락 왔어. 아버지 호출이래. 뭐 급한 일 터졌나 봐.]
손목시계를 체크하자, 시계 바늘은 벌써 7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을 취소하면 되잖아.”
[기다리게 했는데 너무 미안해서……. 기껏 저녁 사준다고 해놓고 공복으로 들여보내기도 그렇고.]
“…….”
[부탁해. 너네 회사 앞이니까 가깝고 좋잖아. 어차피 저녁 약속도 없다며.]
다시 말해 저 대신 사촌 동생 맛있는 거 먹이는 데 봉사하라는 얘기.
“그냥 취소하고 들여보내.”
윤완이 딱 잘라 거절하자 세훈은 섭섭하다는 티를 팍팍 냈다.
[야. 너 이러기야? 우리가 한두 해 친구 사이냐고.]
“…….”
[나도 원래는 너 말고 태준이한테 부탁하고 싶었어. 근데 걔네 회사는 너무 멀잖아.]
“…….”
[부탁한다, 도윤완. 너밖에 적임자가 없어.]
타협의 여지가 없던 윤완의 입장에 균열이 생겼다. 세훈의 입에서 태준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순간, 원인을 알 수 없게 마음이 물러졌다. 간단한 부탁이니 그냥 들어주고 말까. 계속 거절해봤자 쉽게 포기할 것 같지도 않고……. 물론 2501호 멤버의 청이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었다.
“……알았어.”
[진짜?]
“응.”
[역시. 고맙다, 친구!]
세훈이 금세 밝은 톤을 되찾는 걸 본 윤완은 카멜레온도 이처럼 변화무쌍하긴 어려울 거라고 조용히 감탄했다.
“연나린한텐 미리 양해 구해놔.”
[알겠어. 내가 전화할게.]
전화를 끊고, 차를 대기시키라는 요청부터 취소한 윤완은 곧장 ‘페퍼’로 향했다. 시간이 늦어서 이미 가버리고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
“네? 누구요?”
나린은 저도 모르게 폰에 대고 소리를 내질렀다.
[진짜 미안해. 그렇지만 윤완이가 엄청 맛있는 거 사줄 거야. 거기 있는 거 다 시켜도 돼.]
아니, 맛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퇴근을 했는데 또 누굴 만나라고요?
“아뇨, 저는 그냥 바로 집으로 가도 괜찮은데요.”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그편이 백배 천배 나은데.
[괜찮아. 전혀 부담가질 거 없어.]
“그게 아니라…….”
[아, 전화 온다. 이따 저녁 먹고 연락해. 차 보내든지 직접 데리러 가든지 할게.]
“괜찮……”
그러나 전화는 이미 끊긴 뒤였다. 나린은 다급하게 사내 포털 어플을 켰다. 도윤완, 세 글자를 검색하자 열한 자리 숫자가 뜬다. 초록색 통화 버튼 앞에서 나린의 손가락이 우뚝, 멈추었다. 부사장님한테 직접 오라 마라 하는 것보다는 그냥 한 끼 같이 먹고 끝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무엇보다 세훈 오빠가 이렇게까지 배려해줬는데.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맛있는 거나 얻어먹자.”
생각을 돌린 나린은 폰을 꺼서 가방 안에 던져 넣었다. 막 지퍼를 잠그는데, 은은한 조명 아래,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찬찬히 시선을 올려 눈앞의 남자를 응시한다. 온몸에 훅, 끼치는 서늘한 기운. 윤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