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생각해볼게요.2021.06.11.
나린을 태운 고급 세단은 ‘테라 호텔 강남’이라고 적힌 입구를 향해 속도를 줄이며 나아갔다. 선보기로 한 장소가 여기인가 보다. 이때까진 호캉스 후보로 삼았던 무수한 호텔들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친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호텔이라니. 기분이 오묘했다. 어젯밤 다짜고짜 선을 봐야 한다고 날벼락을 맞은 나린은 잠을 설쳤다. 날이 밝는 대로 채 여사를 찾아가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버님께서 깜빡하고 말씀 못 하셨나 본데, 약속이 잡혔으니 깰 순 없어. 좋든 싫든 일단 만나본 다음에 얘기하자.”
나린에게는 날벼락이었지만 채 여사는 대수롭지 않게 치부했다. 나린은 허탈한 얼굴로 방으로 되돌아왔다. 이게 드라마에서만 보던 재벌가 정략결혼인 건가. 그러니까 나……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랑 결혼해야 하는 거야?! 그러다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냐. 큰엄마께서 분명 ‘좋든 싫든’이라고 했어. 그러니까 ‘싫든’도 선택지에 있는 거야. 그런 거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집을 나섰지만 막상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수심이 깊어졌다. 나린이 머뭇대는 사이, 도어맨이 차 문을 열어 준다. 나린은 하릴없이 차에서 내렸다. 어쩌면 그쪽에서 먼저 거절할지도 몰라. 겉보기엔 그럴듯하게 꾸며놨어도 난 아직 완전히 이 세계 사람인 건 아니니까. 호텔 직원의 에스코트를 받아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쉼 없이 긍정 회로가 돌아갔다. 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스카이라운지에 도착한다.
“예약돼 있다고 들었는데요. 강나린, 아니, 연나린이라고…….”
직각이 되도록 허리를 꺾는 직원을 보며 횡설수설하고 말았다. 과할 정도로 공손한 인사에 이질감이 든 탓이었다.
“코트랑 가방, 보관하시겠습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십시오.”
순순히 코트와 가방을 넘겨준 나린은 안내하는 직원의 뒤를 따랐다. 직원의 발끝이 향하는 곳엔 물끄러미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딱 봐도 이견의 여지가 없는 정석 미남이었다. 저 사람인가 보다. 선보기로 한 상대가. 도윤완도 그렇고, 저 사람도 그렇고. 돈 많은데 잘생기기까지. 다 가졌네……. 그러다가 속으로 황당해했다. 여기서 도윤완 부사장이 왜 튀어나오는 거야. 그 싸늘한 분위기가 생각보다 더 강렬한 인상을 남겼나 보다. 그래도 이 남자는 윤완과 달리 온화한 기운을 풍겨 다행이었다. 남자의 선한 인상에 용기를 얻은 나린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안녕하세요.”
“아.”
상념에서 깨어난 남자가 짧게 탄성을 뱉는다.
“안녕하세요.”
그는 어설프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태준입니다.”
“아, 네. 연나린이라고 합니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새 이름. 이 남자는 내가 혼외자라는 사실을 알고 나왔을까. 두 사람이 착석하자, 메뉴판이 놓였다. 메뉴를 열어본 나린은 슬그머니 긴장을 했다. 주문하는 과정에서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싶어 조바심이 난다.
“D 코스 괜찮습니까?”
당황스러워하는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태준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네.”
나린은 그가 주문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도일 전자 다닌다고 들었는데……. 곧 테라 그룹으로 옮기시나요?”
주문을 받은 직원이 떠난 뒤, 태준이 깜짝 질문을 던졌다.
“아, 아뇨. 지금 회사 계속 다닐 거예요.”
물을 마시려던 나린은 황급히 잔에서 손을 떼며 대답했다. 이 남자는 나에 대해 듣고 나왔나 보구나.
“거기서 무슨 일 하세요?”
이어지는 질문엔, 나린도 조금 망설였다. 경영지원실 대리라는 얘길 해도 되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뭐 어떠냐는 생각이 들었다.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잖아. 이상해 보일수록 좋은 거니까.
“경영지원실 재무팀에서 대리예요. 공채로 입사해서 대리 1년 차인데, 다음 달이면 2년 차 되겠네요.”
예상대로 태준은 흥미롭다는 눈을 했다.
“특이하네요.”
각오는 했지만 단박에 특이하다는 반응이 나오자, 나린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이전 세상에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던 신분이 여기선 특이한 신분이 되었다.
“거기 새 CFO가 제 친구예요. 나린 씨 사촌오빠, 세훈이도요.”
태준은 아차 싶었는지 슬그머니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요?”
나린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세훈도 그렇고, 이 남자, 태준도 그렇고, 도윤완 부사장이랑은 상극처럼 보이는데……. 그 사이 애피타이저가 서빙되었다. 나린은 세훈으로부터 밴드 얘길 들은 걸 기억해냈다.
“혹시, 밴드 멤버세요?”
“네. 세훈이한테 들었어요?”
“그냥, 밴드를 한다는 정도만요. 세션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키보드예요.”
접시를 비울 때마다 차례로 음식이 나오고, 식사를 하는 내내 시시콜콜한 대화가 이어졌다. 태준은 대기업 공개 채용 과정에 관심을 보였다. 나린은 선보는 자리라는 것도 잊고, 서류전형, 인·적성 시험, 면접 과정을 세세히 설명해주었다. 꼭 취업 상담을 해주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자신이야말로 태준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근데 태준 씨는 어느 회사 다니세요?”
“신화 화학에서 일합니다. 글로벌사업본부요.”
신화 화학이면 신화 그룹 주요 관계사 중 하나였다. 유통업계를 주름잡는 신화 백화점이 그룹의 시초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기는 했으나, 실질적인 캐시카우(cash cow)는 화학 부문이었다.
“직책은요?”
보나 마나 높겠지? 어마어마하게.
“본부장이요.”
본부장이면 최소 전무에서 부사장급은 될 텐데. 무의식중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긴장하는 겁니까.”
“네.”
“왜요?”
“높으신 분이니까요.”
태준은 쿡 소리 내어 웃었다.
“나린 씨는 정말 특이하네요.”
두 번이나, 태준은 나린을 특이하다고 평했다. 칭찬은 아닐 테니, 이걸로 목적 달성인 건가. 특이한 여자랑 결혼하고 싶진 않을 테니까.
“나린 씨.”
“네?”
“얘기할 게 있어요.”
“아, 네. 말씀하세요.”
뭐지, 이 남자. 한순간에 분위기를 바꾸어선. 순식간에 진지해진 분위기에 나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나린 씨는 믿을 만한 사람인 것 같아서 솔직하게 말할게요.”
어느 포인트가 믿을 만한 사람인 건진 모르겠지만……. 곤란한데. 좋은 인상을 준 거라면……. 테이블 아래에서 손을 꽉 맞잡으면서도, 표정만큼은 덤덤히 하려 노력한다.
“저는 이 약혼 진행 안 했으면 합니다.”
약혼?
“약혼이요?”
잠깐의 버퍼링이 있은 후, 나린이 되물었다.
“네.”
그러니까, 지금 이게 단순한 선 자리가 아니었던 거야?
“우리가 약혼하기로 정해진 사이라 이건가요?”
나린은 뇌리에 떠오른 의문을 고스란히 육성으로 옮겼다.
“설마, 모르고 나왔습니까?”
“네. 저는 그냥 선보는 자리라고…….”
태준은 나린의 순진함이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는 짧은 시간 안에 다양한 종류의 웃음을 잘도 선보이는 남자였다.
“선은 집안끼리 약혼하기로 정했으니 너희는 만나서 얼굴이나 봐라, 뭐 그런 의미입니다.”
태준은 나린이 알고 있는 ‘선’의 의미를 이 세계에서 통용되는 뜻으로 정정해줬다. 약혼이라니. 그렇게까지 심각한 자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럼에도 그가 먼저 거절해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풀어진 긴장감을 따라, 꽉 맞물려 있던 나린의 양손도 스르르 풀렸다. 그러나 다시 입을 연 태준은 뜻밖의 말을 뱉었다.
“하지만 몇 달간은 이렇게 만남을 유지했으면 합니다.”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 건지.
“……어째서요?”
낯선 세계. 나린으로서는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 약혼할 생각이 없다면서 대체 왜…….
“그렇지 않으면 이런 자리가 반복될 거라서요. 우리가 싫다고 하면 어른들은 또 다른 상대를 찾아 만나보라고 하시겠죠. 전 그게 싫은 거고요.”
“하지만 만나다 보면 약혼이 진행될 텐데요.”
“그래서 딱 약혼 얘기가 구체화되기 직전까지만입니다. 임시방편이라도 몇 달은 평화로울 수 있으니까요.”
“…….”
“물론 어디까지나 나린 씨가 동의했을 때 얘기이니 거절하고 싶으면 거절해도 괜찮습니다. 부담 가지지 마세요.”
나린은 고민에 잠겼다. 약혼 직전까지 만남을 유지한다. 거짓말이지만 곧 약혼할 것처럼 연기하며. 결국엔 어른들을 속이자는 건데……. 연극은 자신 없지만 태준이 한 말이 걸렸다. 여기서 거절해도 또 다른 상대를 찾아 선을 보게 할 거라는 말이. 나린은 태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는 대담한 제안을 한 사람답지 않게 초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알 수 없는 동정심이 샘솟았다. 얼마나 지쳤으면……. 이런 자리가 얼마나 지겨웠으면……. 곧 자신의 미래가 될지 모른단 위기감과 함께 동병상련이 느껴진다. 긴 침묵 끝에, 나린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생각해볼게요.”
“…….”
“시간을 좀 주세요.”
*** 태준과 나린이 선을 볼 시각. 두 층 아래, 2501호 스위트룸에 세 남자가 모였다. 윤완과 세훈, 그리고 또 한 명의 밴드 모임 멤버인 준우는 객실에 둘러앉아 위스키를 마시는 중이었다. 이곳은 태준까지 포함하여 동갑내기 네 남자의 아지트였다.
“연나린이라고 했나?”
준우가 관심을 표하자 세훈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어때? 많이 닮았냐?”
“그렇더라. 특히 눈이.”
세훈에 답에 윤완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글쎄. 난 모르겠던데.
“신기하네. 유전자가 반만 섞였는데도.”
“응. 나도 처음 봤을 때 놀랐어.”
그럼에도 윤완은 세훈과 준우의 대화에 끼지 않고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남 얘기에 왈가왈부하는 데엔 흥미가 전혀 없었다.
“성격은 어때?”
“성격은 좀 다른 것 같아. 그래도 왠지 정이 가더라. 어찌 됐든 다현이 동생이라 그런가.”
말을 마친 세훈은 픽 실소를 터뜨렸다.
“……다현이가 서운해하려나.”
촉촉해진 세훈의 눈동자를 따라 준우의 눈빛도 흠뻑 그리움에 젖어 들었다.
“아니. 그 앤 너보다 더 좋아했을걸. 여동생 생겼다고.”
“하긴.”
네 남자 모두에게 특별했던 아이, 연다현. 특히, 결혼할 사이였던 준우에겐 더더욱……. 애당초 이 네 남자의 출발점도 다현이었다. 다현과 준우의 약혼을 계기로 세훈과 준우가 가까워졌고, 세훈의 친구였던 윤완과 준우의 친구였던 태준도 자연스레 어울리게 됐다. 밴드 모임 또한 다현의 제안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연태용 회장은 사랑해 마지않는 손녀를 위해 별채 지하실에 연습실까지 꾸려주었었다.
“돌아가신 연 부회장님께 배신감을 느꼈을지는 몰라도, 그 감정을 죄 없는 동생에게 전가하진 않았을 거야. 우리 다현이라면.”
준우는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러네. 다현이만큼 착하고 사리 분별이 확실한 애가 없었으니까.”
세훈 역시 친동생처럼 아꼈던 사촌 동생을 떠올리며 맞장구를 친다.
“한번 보고 싶다, 그 나린이라는 애.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준우의 읊조림에, 윤완은 들고 있던 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청승 떨지 마라. 안 어울려.”
세훈과 준우는 별로 놀랄 것도 없단 얼굴로 윤완을 쳐다봤다. 하여간. 공감 능력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녀석. 하지만 덕분에 무거워져 가던 공기가 활력을 되찾았다.
“아직 태준이랑 만나고 있으려나?”
준우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그렇지 않을까. 이제 저녁 먹고 차 마시고 있겠지.”
빈 잔을 집어 올리던 윤완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무슨 소리야?”
술을 채워달란 뜻으로 이해한 세훈이 위스키병을 들고 잔 위로 기울인다.
“얘기 못 들었어? 나린이랑 태준이 선보잖아. 요 위, 스카이라운지에서.”
선? 윤완의 시선이 천장에 고정되었다.
“왜? 걱정 돼?”
세훈이 묻자, 윤완은 흠칫하며 시선을 바로 했다.
“내가 왜.”
“아니, 태준이 요새 선보는 거 힘들어하니까.”
아. 그 여자가 아니라, 태준이……. 윤완은 특유의 무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알아서 하겠지.”
그러나 속마음은 이해할 수 없게 시끄러워졌다. 엊그제 나린과 처음 맞닥뜨렸을 때가 기억이 난다. 제가 점유하고 있던 엘리베이터 안으로 당당히 발을 들어놓으려 했던 여자. 경영 대시보드를 세팅해주겠다며 쳐들어와서는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 없다고 맞받아치던 여자. 그런 여자와 태준이라니. 안 어울려……. 하나도 안 어울려. 단숨에 잔을 비우는 윤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