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재벌가에서의 첫날2021.06.08.
직장인 한정, 황금 같은 주말에 상사를 맞닥뜨리는 일보다 더한 불행이 또 어디 있을까. 나린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단 사실도 잊고 멀뚱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도윤완 부사장님이 왜 여기에. 그러다가 그가 세훈과 친구라고 했던 것이 뇌리를 스쳤다. 아, 세훈 오빠를 만나러 온 건가.
“혼자 못 일어납니까?”
나린이 엉덩방아를 찧은 자세 그대로 얼음이 되어 있자, 윤완이 귀찮다는 듯 물었다.
“아, 아뇨.”
잽싸게 몸을 일으킨 나린은 손바닥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윤완이 곁눈질로 슬쩍 나린을 훑어본다. 그러자 엉뚱하게도 나린이 했던 말이 귓전에 되살아났다.
‘저기, 뭘 잘못 아신 모양인데, 전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 없습니다.’
윤완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린으로부터 시선을 거둔 그가 다시 성큼성큼, 가던 길을 걸어 나아가고. 나린은 기가 막힌단 표정으로 그의 등을 쏘아보았다.
“아니, 눈앞에서 사람이 넘어졌는데 괜찮냐고 물어보는 건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그것도 자기가 갑자기 문을 열어서 그렇게 된 건데.”
볼멘소리는 딱 그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웅얼거림이 되어 공중으로 흩어졌다. 마음 같아선 다 들리게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어디까지나 회사에서 그는 갑, 저는 을이란 사실을 간과할 수 없었다. 그렇지. 세상 물정 모르고 큰 재벌 3세가 인성이 좋을 수가 없지. 나린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깐딱거렸다. 그나저나 저런 직속 상사라니.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 이왕에 밖으로 나온 김에 나린은 수정에게 전화를 하기로 했다. 통화 연결음 세 번 만에 수정이 전화를 받았다.
“수정아, 나 잘 도착했어.”
[강나린! 새 집은 어때?]
밝은 수정의 음성과 달리 나린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좋지, 뭐.”
[너무 부럽다. 궁금해! 사진 보내줄 거지?]
“응.”
나린이 오른발을 세워 앞꿈치로 톡톡 땅을 두드린다.
“삼촌이랑 숙모는 좀 어떠셔?”
[엄만 너 간 뒤로 계속 부엌에만 있고, 아빠는 담배 피우러 나가신 것 같아.]
태용이 찾아온 후, 승태는 끊었던 담배에 다시 손을 댔다. 태용의 등장으로 가장 마음이 복잡한 사람은 어쩌면 승태일지도 몰랐다. 25년 전, 동생의 유언에 따라 엉겁결에 나린을 떠맡게 된 그는 깜깜히 몰랐던 나린의 출생 배경을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지만, 서운하신 거지, 뭐.]
“당분간 네가 신경 좀 써드려. 일찍 일찍 퇴근하고.”
[걱정 마. 어쩔 때 보면 네가 더 친딸 같다니까.]
“조만간 눈치 봐서 들를게.”
[무리하지 말고 당분간은 거기에 적응하는 데 집중해. 할아버지 말고 다른 분들은 다 잘해주셔? 큰아빠네 식구들 같이 산다며.]
“응. 아직까지는.”
[안 좋은 일 생기면 나한테 꼭 털어놔야 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알겠어.”
친자매라 한들 이렇게 다정할 수 있을까. 뭉클한 감동이 나린의 마음을 따스하게 물들인다.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나린은 굳게 잠긴 도어락을 마주하고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나올 땐 미처 생각 못 했는데 들어가려고 보니 현관 비밀번호를 몰랐다. 하. 그냥 얌전히 방에 있을걸. 최대한 눈에 안 띄게 지내고 싶었는데……. 달리 방법이 없어서 초인종을 누르자, 딩동, 청아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구세요?]
인터폰 너머에서 세훈의 음성이 들려온다.
“저, 나린이에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하고, 거의 동시에 삐비빅, 잠금 해제되는 소리가 났다. 나린은 손잡이를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소파로 되돌아가던 세훈이 멈춰 서서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어디 나갔다 왔어?”
몇 번 식사 자리에서 얼굴을 익혔다고, 세훈은 제법 친근하게 말을 붙여 왔다.
“아, 바람 쐬러 정원에요.”
뻘쭘히 대답하던 나린의 시선이 세훈의 어깨너머 어느 지점에 고정되었다. 소파 위, 찻잔을 들고 그림같이 앉아 있는 남자.
……아직 안 갔나 보구나.
“윤완이 알지? 너네 회사 CFO님. 인사들 해. 서로 모른 척하지 말고."
나린의 시선을 알아차린 세훈이 킬킬거리자,
“아까 정원에서 봤어.”
윤완이 건조한 투로 답하였다. 어이가 없어서 나린의 입이 헤벌어졌다. 본 건 맞지만 인사는 안 하지 않았나요. 모르는 척하느니만 못했던 만남 같은데.
“드럼 치고 오는 길에?”
“…….”
세훈의 물음에 이번엔 묵언으로 답을 대신하는 윤완이다. 드럼……? 저 사람이 드럼을 친단 말이야? 나린은 눈을 찡긋거렸다. 어쩐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음악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말이지.
“우리 밴드 모임 하는데 연습실이 여기 별채 지하에 있거든. 다음에 다른 멤버들도 소개해줄게.”
나린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세훈이 친절한 설명을 곁들인다.
“아, 네.”
밴드라니, 부잣집 도련님들답지 않네. 재벌들은 다 골프, 승마, 요트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었나. 떠오르는 잡념들은 목 안에 꾹꾹 눌러 담아두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지내려는 목표를 이루려면 말수를 줄이는 편이 도움이 됐다. 대화가 끊기자 도망가기 딱 좋은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나린은 2층 계단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 시도가 무색하도록 세훈이 손바닥으로 옆자리를 탁탁 두들겼다.
“너도 이리 와서 앉아.”
“아, 아뇨. 괜찮아요.”
“할아버지 오실 시간 됐으니까 기다렸다 인사드리고 올라가. 계단 오르락내리락하는 거 피곤해.”
……여기 있는 게 더 피곤할 것 같은데. 그럼에도 배려를 해주는 상대에게 뾰족한 반응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린은 하릴없이 세훈이 가리킨 자리로 갔다. 맞은편에 사람이 앉는데도 윤완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만난 지 겨우 이틀째인데도 참 한결같아서, 이젠 저 무례함이 당연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내가 윤완이한테 네 얘기 했거든. 회사에서 만나거든 잘해주라고. 잘해줄 거지, 도윤완?”
세훈의 채근에 윤완이 고개를 든다. 시선은 여전히 나린에게서 빗겨난 채.
“회사 일 관련해서 사적인 부탁은 안 받는다고 했는데.”
“하여튼. 융통성이 없어요, 융통성이.”
세훈은 혀를 끌끌 차며 나린에게로 슬쩍 몸을 기울였다.
“앞으로 고생 좀 할 거야. 역대급으로 깐깐하신 경영진이시거든.”
그러더니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나린도 세훈을 따라 자그맣게 소리 내어 웃었다. 새 가족들 중 적어도 한 사람은 친절하고 싹싹해 보여 운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벌 3세라고 전부 무례한 건 아닌가 보네. 아까 정원에서 했던 성급한 일반화는 취소하는 걸로 할까.
“간다.”
그 사이 찻잔을 비운 윤완이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잘 가.”
친구의 인사에도 손을 한 번 들어 보이는 게 고작일 만큼 냉기로 꽁꽁 무장한 남자. 성격만 보면 완전 상극일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친구가 된 거지? 나린은 신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였다. 저토록 쌀쌀맞은 태도에도 아무 타격이 없는 세훈이 대인배처럼 생각되었다. *** 태용의 귀가 후 저녁 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삼대가 함께하는 식사 시간은 나린의 예상과 달리 정적 그 자체였다. 연태용 회장은 지나치게 근엄했고, 연주환 부회장 내외는 한없이 무뚝뚝했으며, 잘만 떠들던 세훈도 쏙 입을 닫았다. 대화가 끊이지 않던 외삼촌 댁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나린은 체할 것 같은 갑갑함을 느꼈다.
“그래, 방은 마음에 들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 태용이 침묵을 깬다. 물음표의 끝은 나린을 향하였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다감한 말투에, 주환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스쳤다. 한때는 동생 성환의 전유물이었고, 이후에는 조카 다현의 전유물이 되었던 다정함. 혼외자가 됐든 뭐가 됐든, 일단은 핏줄이라 이건가……. 꼬장꼬장한 태용이 나린을 데려오겠노라 선언한 것 자체가 주환에게는 기함할 일이었다. 동생이 그 오래전에 바람을 피웠다는 것도 놀라웠고, 아버지가 이제 와서 나린을 찾았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분명 감춰진 내막이 있을 텐데, 아버지는 굳게 입을 닫고만 있다.
“네, 할아버지. 마음에 들어요.”
“허허. 다행이구나.”
나린의 답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태용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에미, 네가 신경을 많이 써준 덕분이다.”
공치사를 들은 채 여사는 짐짓 쑥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아닙니다, 아버님.”
“할아버지, 아까 윤완이 왔었어요.”
식탁 위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얘기하길 좋아하는 세훈이 목소리를 높였다.
“별채 연습실에 왔던 게냐?”
태용은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윤완의 방문 목적이라면 뻔했다.
“네.”
“그 밴드는 대체 언제까지 할 생각이냐.”
태용이 밴드 모임을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아서, 나린은 슬쩍 세훈의 안색을 살폈다.
“어차피 바빠서 자주는 못 해요. 윤완이 녀석이 유일하게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니까 봐주세요.”
“흠.”
2년 반 전, 마스코트와도 같던 보컬을 잃게 된 밴드. 밴드 얘길 들을 때마다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노래하던 다현이 떠올라서, 태용은 가슴이 저몄다. 울적해진 할아버지의 기분을 읽은 세훈은 냉큼 말머리를 돌렸다.
“윤완이 도일 전자 CFO로 발령 난 건 아세요?”
“CFO? 모바일 부문 사업부장이 아니라?”
“예. 주요 경영 현황도 익히고, 경험도 쌓을 겸 경영지원실로 가기로 했대요.”
나린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CFO 자리를 경험 삼아……? 회사의 자산이 제 것이라도 되는 양 꼼꼼하게 투자, 경비 집행을 검토하던 재무팀장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누군 그 자리에 오르려고 휴일도 없이 매진하는데. 역시나, 세상은 불공평한 거였어.
“그럼 나린이랑 같은 부서겠구나.”
“네? 아, 네.”
딴생각 중이던 나린은 뜨끔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녀석, 업무적으로는 꽤 까다로울 텐데.”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걱정하듯 태용이 한탄한다.
“그래서 제가 나린이 잘 부탁한다고 했어요. 잘했죠?”
“그런 게 통하겠느냐. 내가 그놈을 봐온 세월이 얼만데.”
“하긴. 윤완인 융통성이 없어도 너무 없죠. 완전 로봇 같다니까요.”
“그런 면은 너도 좀 배울 필요가 있다.”
“저, 저요?”
화살은 엉뚱하게 세훈에게로 돌아갔다. 태용은 윤완의 능력을 찬탄하며 세훈을 압박했다.
“너는 다 좋은데 너무 물러. 윤완이 녀석처럼 끊임없이 의심하고 대비해야 위기가 왔을 때 버텨낼 수 있는 거다. 때로는 과감한 의사 결정도 할 줄도 알아야 하고.”
“저도 그렇게 안 물러요.”
“상반기 도일 소프트웨어 M&A 건, 그것도 윤완이 작품이라면서? 우리 테라 그룹도 글로벌 기업이 되려면 그런 인오가닉(Inorganic) 성장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
“그, 그렇죠. 하하.”
세훈은 말 한 번 잘못 꺼냈다가 괜한 불똥을 맞고 진땀을 흘렸다. 이후로도 윤완을 향한 태용의 찬사가 이어졌지만, 나린의 귀에는 전부 미래의 업무량이 늘어나는 소리로만 들릴 따름이었다. ***
“후우.”
방에 돌아온 나린은 길게 심호흡을 했다. 무슨 회식 자리도 아니고, 숨 막혀 죽을 뻔했네. 그러다가 제풀에 실소했다. 아니지. 팀 회식보다 더하잖아. 회장님에, 부회장님에, 부사장님에, 완전 초 고위직들만. 똑똑.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네, 들어오세요.”
나린은 풀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문이 열리고 등장한 사람은 채 여사였다.
“드레스룸에 옷들은 마음에 드니? 취향을 몰라서 내가 적당히 골라봤는데.”
“아, 네. 그럼요. 감사합니다.”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나요. 손 떨려서 입지도 못할 것 같은데……. 나린이 어색한 미소를 선보이는 사이, 채 여사는 무심히 드레스룸으로 향하였다.
“내일 뭐 입을지 골라보렴. 봐줄 테니까.”
“네?”
맥락을 알 수 없는 명령에 나린이 멀거니 보고만 있자, 채 여사가 멈칫하며 돌아보았다.
“내일 입고 나갈 옷 말이야.”
아무래도 두 사람 사이엔 정보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듯했다. 나린은 저도 모르는 제 스케줄 얘기에 두 눈만 끔뻑거렸다.
“……저 내일 어디 가나요?”
채 여사가 한쪽 눈썹 끝을 치켜올리자 조금은 신경질적인 표정이 스쳐 지난다.
“아직 얘기 못 들었나 보구나.”
“……무슨 얘기요?”
“너 내일 선 보잖니.”
아, 그렇구나.
“네에…….”
내가 선을……. ……이 아니잖아! 선? 선이라고?! 상황을 인지한 나린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선이요?!”
전혀 몰랐단 나린의 외침에 채 여사는 슬며시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이 아이에겐 상황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옷은 알아서 골라두렴. 내일 와서 확인할 테니.”
일방적으로 할 말을 마친 채 여사는 굳어 있는 나린을 뒤로 한 채 방을 나갔다. 딸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무정하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