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새로운 세상으로2021.06.04.
분명 강나린이라고 또박또박 성명을 밝혔는데, 그는 연나린이라고 불렀다.
“저를…… 아세요?”
나린은 윤완의 눈을 직시한 채 물었다. 나린의 심장이 콩닥대는 것과 반대로, 윤완의 입가엔 여유로운 미소가 흘러넘쳤다.
“테라 그룹 연태용 회장님의 손녀, 연나린 씨.”
“…….”
“……아닙니까?”
역시. 알고 있어, 이 사람. ……내 비밀을.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고자, 나린은 크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 테라 호텔 강남, 연태용 회장의 집무실. 북쪽으로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뷰가 눈을 시원하게 한다. 물비늘 반짝이는 풍경 하나에 수억이 왔다 갔다 하는 게 새삼 응당한 가치처럼 생각되었다.
“내일이던가.”
태용이 혼잣말처럼 읊조리자 황 비서가 칼각을 이루며 고개를 숙였다.
“네, 회장님. 준비는 모두 마쳤습니다.”
“음.”
마침내 품 안으로 되돌아온 손녀딸. 아니, 되돌아올 손녀딸. 사고로 죽은 손녀 다현과 눈이 꼭 닮아 있던 나린을 떠올리자 태용의 얼굴이 그리움으로 얼룩졌다.
“다시 한번 이르지만, 그 아이는 성환이의 혼외자인 걸로 해두어야 하네. 그 외의 모든 출생 배경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해.”
“알고 있습니다, 회장님.”
“특히 그 아이가 다현이와 쌍둥이였단 사실만큼은 절대 새어나가선 안 되네. 다현이는 어디까지나 다현 에미의 친딸이어야 하니까.”
“염려 놓으십시오. 과거의 일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입단속을 했습니다. 두 분이 쌍둥이이지만 한 달 간격으로 태어났으니 아무도 의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출산을 담당했던 의사 쪽도 조치한 게지?”
“예, 회장님.”
그때는 어쩔 수 없이 했던 선택이 지금에 와서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몰랐다. 한 아이라도 더 오래 품어서 살려 보고자 했던 그 벼랑 끝 선택이…….
“됐네. 물러가게.”
“예.”
황 비서가 떠난 후, 태용은 금방이라도 한강에 뛰어들 것처럼 창밖을 응시했다. 2년 전, 막내아들 성환에게 닥친 불의의 교통사고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날벼락이었다. 그 사고로 태용은 둘째 아들 성환, 며느리 민경, 손녀 다현을 한꺼번에 잃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수성가를 이룬 그의 인생에서 이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은 없었다. 이십여 년 전 아내와 사별했을 때보다 더한 충격이자 고통. 사고가 있은 지 1년 반 후, 가까스로 슬픔을 추스른 태용은 성환이 남긴 유일한 핏줄을 되찾아오기로 결심했다. 그 아이라도 곁에 두어야 여생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제가 테라 호텔 연성환 부회장님의 딸이라고요?’
사실을 전해 들은 나린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태용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친조부임을 증명한 후에야 겨우 나린의 경계심을 풀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절 데려가시려는 연유가 뭔가요.’
나린은 그리운 다현과 똑 닮은 눈을 하고 대차게 물었다. 조용하고 섬세하던 다현이와는 다르다. 쌍둥이여도 꼭 같은 성격으로 크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동안 못 해준 것들을 해주고 싶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할애비의 소원을 들어줄 수는 없겠느냐?’
태용의 호소에 나린은 잠시나마 마음이 흔들리는 듯 보였다.
‘생각해볼게요. 외삼촌, 외숙모랑 상의도 해봐야 하고요.’
그럼에도 선뜻 마음을 먹지 못하는 게 의외였다. 재벌가로 들어오라는데, 내놓고 좋아하진 못해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일 줄 알았더니. 초조해진 태용은 보다 적극적으로 설득에 나섰다. 직접 만난 나린의 외삼촌 부부는 사전에 알아본 바대로 나린을 친딸처럼 애지중지하는 티가 났다.
‘나린이, 네가 내 집에 들어오면 외삼촌 명의로 신축 아파트를 하나 선물하마.’
외삼촌 부부가 나린의 아킬레스건임을 알아차린 태용은 실리적이고 거부하기 힘든 제안을 던졌다. 외삼촌 부부는 대가를 바라고 나린을 맡은 게 아니니 필요 없다고 거절했지만, 나린은 며칠간 고심 끝에 태용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나린의 승낙이 떨어지던 날, 태용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이면 나린이 태용의 저택에 입성한다. 햇살 같던 다현이 떠난 뒤 어딘지 괴괴한 적막이 흐르는 집. 그 아이가 들어오면 좀 나아지려나. 복잡하고 가슴 아픈 과거는 모조리 잊은 채로, 태용은 그저 새 식구를 맞이할 생각에 설렜다. ***
“어떻게…… 아셨어요?”
놀란 마음을 가다듬은 나린이 묻는다. 윤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앉았다.
“연나린 씨 사촌오빠 되는 연세훈 부사장이랑 친구 사이입니다.”
“아.”
할아버지로부터 앞으로 함께 살게 될 거라며 큰아빠네 가족을 소개받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사촌 오빠, 세훈은 깍쟁이 같던 첫인상과 달리 장난기가 넘치는 유쾌한 사람이었다.
‘도일 전자 경영지원실 대리라고?’
나린의 직업을 듣고 표정에 재밌어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니, 이래서였나 보다. 이 까칠 대마왕 도윤완 부사장과 이런 식으로 맞닥뜨릴 걸 알고.
“사직서는 언제 제출할 겁니까?”
뜬금포 질문에 나린은 회상에서 깨어났다.
“네? ……사직서라니요?”
“…….”
혹시 내가 부잣집 손녀가 됐다고 회사를 때려치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저기, 뭘 잘못 아신 모양인데, 전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 없습니다.”
나린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대답하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죠?”
“그만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대화가 도돌이표를 따라 흐른다. 이 여자,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윤완은 옅은 숨을 뱉었다.
“연태용 회장님도 동의하신 일입니까?”
“네.”
윤완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대답.
“……동의……하셨다고요?”
“네.”
나린은 태용의 청을 승낙하기 전, 회사만큼은 계속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한 바 있었다. 이유는 단순하지만 절박했다. 학창 시절 전부를 바쳐 입사한 회사를 하루아침에 뚝 떨어진 화려한 배경 때문에 그만둘 수는 없다. 태용의 집에서 얼마나 버틸지도 미지수였기에 보험으로라도 꼭 필요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달렸으니까. 어떻게 설득하나 고민했는데 태용은 쾌연히 그 조건을 수용해주었다.
‘나린이 너 좋을 대로 하거라.’
“…….”
윤완이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부사장님.”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한 나린은 도망치듯 CFO실을 나왔다. 심장은 아직도 콩닥콩닥, 온 신경을 잡아먹을 듯 뛰어대는 중이었다. *** 이튿날, 나린이 연 회장의 저택으로 떠날 시각이 되었다.
“나린아,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야 해.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도 돼. 우리 걱정은 말고.”
외숙모 지숙은 훌쩍이면서 나린의 손을 꼭 붙잡았다.
“엄마. 그만해. 잘 된 거잖아, 부잣집으로 들어가는데.”
옆에서 사촌 수정이 서운한 티를 내지 않으려 틱틱댄다. 그러고는 짐짓 나린을 쏘아보았다.
“부럽다, 강나린. 아니지, 이제 연나린인가? 아무튼! 귀하신 몸 됐다고 연락 끊고 그러지 마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붉게 충혈된 수정의 눈을 보며, 나린은 울컥했다.
“안 그래. 너나 바쁘다고 내 연락 피하지 마.”
헤어지기 아쉬운 세 여자가 서로를 부둥켜안고 놓을 줄 모르는 사이, 한 걸음 뒤에선 외삼촌 승태도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황 비서는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이 신파극이 끝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나린이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차 뒷좌석에 올라탄다. 차 안으로 쏙 들어가자 깔끔한 베이지색 시트가 따뜻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외삼촌, 외숙모와 수정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나린은 하염없이 뒤돈 채 멈추어 있었다. 평범한 회사원이, 그것도 부모님을 여읜 채 외삼촌 손에 자란 고아가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재벌가의 딸이었다니. 남들이 보기엔 로또를 맞은 인생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린은 더럭 겁부터 났다. 회사 생활은 고단했지만, 나린은 더러 제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성실히 노력해서 얻어낸, 남들이 선망하는 직장. 자상한 외삼촌과 외숙모. 친자매보다 더 친한 동갑내기 사촌 수정이. 그거면 더 바랄 게 없었으니까. 잘한 결정인 걸까. 이렇게 무턱대고 낯선 곳으로 들어가는 게. 무엇보다…… ‘숨겨져 있던 혼외자’라는 꼬리표를 달고서. 나린이 그간 제 출생을 두고 알아낼 수 있었던 건 엄마가 아빠의 정식 아내가 아니었다는 사실뿐이었다. 포털 사이트에 연성환 부회장의 이름을 검색하면 연관되어 바로 아내와 딸의 이름이 뜬다. 그 이름들은 어릴 적 돌아가신 엄마의 이름도 아니었고, 나린의 이름도 아니었다. 자신이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아니라는 불편한 진실. 연태용 회장 측에서 접촉을 해왔을 때, 나린이 마냥 기뻐하지 못했던 것도 그 탓이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평화롭던 일상을 뒤로하고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렵다고들 하던데. 그럼에도 외삼촌네에 물질적 보상을 해주겠다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자가 소유 아파트가 생기면 전세금이 어떻게 될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신축 아파트라고 했다! 자고 일어나면 가치가 쑥쑥 오르는 서울 신축 아파트! 나린은 이렇게라도 외삼촌, 외숙모의 노후에 서광이 비치길 바랐다. 그것만이 제가 받은 과분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아드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뻗어가는 단상에 시간을 맡긴 새, 고급 주택가에 접어든 차는 붉은 담장 앞에 정지하였다. 몇 번 와본 적이 있어서 그 으리으리함도 처음만큼 놀랍지는 않았다. 그래도 역시 좋긴 좋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돌계단을 걸으며 이게 정말 현실인지 알 수 없어 헛웃음이 났다.
“어서 오렴.”
연태용 회장의 첫째 며느리이자 나린의 큰엄마 되는 채윤희 여사가 운동장만 한 거실에 서서 나린을 맞았다. 그녀는 지난번 만났을 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고고한 자태를 뽐내었다. 채 여사와의 대면식은 그걸로 끝이었다. 채 여사는 나린을 곧장 가정부 미옥에게 인계했다. 미옥은 나린을 2층 방으로 안내해주었다. 2층엔 제법 길고 넓은 복도가 이어져 있고 지그재그로 방문이 나 있었다. 나린의 방은 계단 바로 옆 왼쪽 방이었다.
“회장님과 부회장님 부부는 1층을 쓰십니다. 저기는 세훈 부사장님 방이니까 알아두시고요.”
미옥이 주의사항을 친절하게 일러준 뒤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혼자 차지하기에는 과분하리만치 드넓은 공간. 수정이가 봤으면 부럽다고 발을 동동 굴렀겠네. 나린은 피식 웃으며 코트를 벗어두려 드레스룸을 찾아 들어갔다.
“와.”
벽을 따라 빼곡히 진열된 화려한 옷가지들에 나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드레스룸이었다. 넋을 잃고 이리저리 둘러보던 나린은 옷에 붙은 상표를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발렌시아X, 프라X, 지방X……? 이런 덴 보너스가 터졌을 때 큰마음 먹고 가방을 지르러 가는 곳이 아니었나. 가방도 엄두를 못 내는데 옷을 산다는 생각은 더군다나 해본 적도 없다. 아무리 봐도 엄청난 곳에 들어오게 된 것 같은데……. 나, 이곳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답답함과 두려움이 엄습하였다. 바람이라도 쐬어야겠다고 생각한 나린은 코트 차림 그대로 조심조심 바깥으로 나갔다. 누가 볼세라 쏜살같이 현관을 통과한다. 거실에 아무도 없어 다행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겨울 공기가 뺨에 달라붙으며 머리를 맑게 해주었다. 나린은 발길이 닿는 대로 정원 오른편으로 향했다. 그곳엔 조그만 건물이 하나 더 있었다. 집도 그렇게 크면서 별채가 따로 있나 보지. 자꾸 헛웃음만 짓게 된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입구 쪽을 기웃기웃하는데 별안간 벌컥, 문이 열리고,
“엄마야!”
식겁한 나린은 뒤로 나자빠지며 쿵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
눈앞에 놓인 길쭉한 다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올리자, 작고 하얀 얼굴이 도도하게 저를 내려다보고 있다. 도윤완 부사장님……? 얼굴을 스치는 냉기가 겨울바람 탓인지 시린 눈빛 탓인지 분간할 수 없어서, 나린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