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VIP의 등장2021.06.01.
반년 전 세상이 뒤바뀌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린은 워드 파일 표 숫자에 맞춰 탁탁탁 계산기를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나린 씨, 조직개편 봤어?"
옆자리에 앉은 사수 민하 과장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네? 아, 아뇨. 떴어요?"
그러고 보니 곧 나린의 회사 생활도 뒤바뀔 예정이었다.
“아직 못 봤어? 그걸로 온 회사가 난린데.”
나린은 일주일 전 임원 인사 공고 직후 짐을 싼 전임 CFO를 떠올렸다. 그는 임원치고 드물게 성품이 인자하고 조직 운영이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부하 직원들의 존경을 받는 리더일수록 더 빨리 쫓겨난다는 것쯤, 입사 4년 차인 지금은 놀랍지도 않다.
“왜요? 누가 오는데요?”
임원 인사 발표 때 후임 CFO가 발표되지 않았던 걸 보면 새 CFO는 그룹 산하 다른 관계사에서 전배 오는 사람일 것이다. 그룹 차원의 인사는 미리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조직 문화는 리더가 결정한다. 전임 CFO보다 좋은 사람이 올 가능성은 극히 낮지만, 그래도 악질만은 아니기를.
“무려 그룹 VIP.”
“그룹 VIP요? VIP 누구요?”
“누구겠어? 도일현 부회장님일 리는 없고, 당연히 도윤완 부사장이지.”
민하가 한숨 섞어 뱉은 이름에 나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도윤완 부사장은 나린이 몸담고 있는 도일 전자가 속한 도일 그룹의 차차기 후계자였다. 전국구 인지도를 자랑하는 아버지 일현만큼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내에만큼은 이름을 모르는 직원이 없을 정도로 유명 인사였다.
“우린 이제 끝이야, 나린 씨. 매일매일이 살얼음판 그 자체일 거야.”
나린은 민하의 한탄에 심히 동감했다. 이제까지 직속 임원이 고용주인 적은 없었다. 회사의 주인은 주주, 그 아래 임직원들은 모두가 평등한 고용인. 무지막지한 연봉 차이는 있어도. 그런데 도윤완 부사장이라니! 직속 부서장으로 고용주가 온다니!
“그 새파랗게 젊은 CFO가 뭐 한마디 흘리기라도 해 봐. 팀장이 바로 우리부터 들들 볶아댈걸. 거기다가 어디 업무만 시키겠어? 온갖 의전하느라 정신없겠지. 아! 조 부사장님 시절이 좋았는데.”
민하는 고문으로 물러난 전임 CFO 시절을 회상하며 탄식했다. 나린은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듯 갑갑해졌다. 지난 1년, 나린이 속한 경영지원실은 업무 특성에 비해 전례 없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누렸다. 모두가 합리적인 전임 CFO 덕분이었다. 이제 호시절도 끝이구나! 매일 밤 달과 별을 벗 삼아 퇴근하겠구나! 보고서 숫자 점검을 마친 나린은 지하에 있는 사내 카페로 향했다. 카페인 보충이 시급했다.
“과장님 것도 사다 드릴까요?”
“그럴래? 그럼 부탁해. 같이 가면 좋은데 나는 이거 마무리해야 해서.”
민하의 몫까지 두 잔을 테이크 아웃 한 뒤, 사원증을 태그하여 출입 게이트를 통과한다. 시선은 땅에 고정시킨 채, 여섯 대의 엘리베이터 중 유일하게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 쪽으로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요새만큼 머리가 복잡한 때도 없는 것 같다. 자주 이렇게 생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는 했다. 비밀을 품고 산다는 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버거운 일이었다. 습관이 되어 버린 한숨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그래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그 비밀이 세상에 드러나기까지는. 그렇지만…… 과연 잘한 선택일까. 하염없이 되풀이되는 의문.
“뭐 하시는 겁니까?!”
멍한 표정을 한 나린이 막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순간, 뜻밖에도 보안 요원이 거칠게 막아 세웠다.
“아.”
반짝 고개를 들었다. 발을 들여놓기 직전인 엘리베이터 안은 나이 지긋한 임원들로 득시글거렸다. 그 한가운데 하얗다 못해 빛이 나는 것 같은 젊은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다. 임원들이 모두 칙칙한 색감의 정장 차림인 가운데, 혼자서만 눈에 딱 띄는 파란 정장 차림. 자칫하면 소화하기 어려운 색임에도 불구하고 새하얀 피부에 매우 잘 어울렸다. 넓게 뻗은 어깨는 직각으로 떨어진 채, 곧고 굵게 뻗은 목 위로 작은 얼굴이 솟아 있다. 정석 미남이라고 할 순 없지만 있어야 할 위치에 반듯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 주위 사람들과 대비되어서, 얼굴은 금방이라도 소멸될 것 같고 다리는 비현실적으로 길고……. 모델보다 더 모델 같은 남자.
아아, 그 사람이다. 도윤완 부사장. 사내 방송에서 몇 번 본 적 있어서, 한눈에 알아보았다. 나린은 본능적으로 주춤하며 물러섰다. 그러니까 이 엘리베이터는 도윤완 부사장 전용으로 점유된 모양이었다. VIP 의전을 할 때는 종종 있는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나린이 머쓱해하며 고개를 숙이자, 보안 요원은 재빨리 엘리베이터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는 틈새로 눈이 마주쳤다.
“…….”
“…….”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린은 그의 입꼬리 한쪽이 슬며시 당기어지는 걸 포착해낼 수 있었다. 분명 착각이 아니다. ……그렇지만 왜? 왜 비웃는 건데? ……한낱 평사원이 실수 좀 했기로서니, 기분 나쁘다 이건가. 그러고 보면 저 사람 같은 이들로 가득할 것이었다. 곧 나린이 살아가게 될 세상은. 도윤완 부사장의 싸늘한 미소가 뇌리에 박혀서 나린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 차가운 눈빛에 또 한 번 가슴이 철렁한다. 신임 CFO가 부서원들을 만나는 자리. 대회의실 가장자리를 빙 둘러 서 있는 직원들 틈에서 나린을 발견해낸 그의 얼굴이 묘하게 뒤틀렸다. 미세한 표정 변화였지만 나린은 확신할 수 있었다. 설마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잠깐 본 거, 그걸 기억하는 건가. 이내 단조로운 음성이 그의 입술 틈새를 비집었다.
“도윤완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저희가 잘 부탁드려야지요. 앞으로 잘 이끌어 주십시오! 부사장님. 핫하하.”
“잘 부탁드립니다, 부사장님. 하하하.”
재무팀장과 인사팀장이 연달아 아부성 멘트를 선보이고, 대회의실은 곧 형식적인 웃음소리로 들어찼다.
“그럼 바쁠 텐데 일 보시죠.”
윤완은 웃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홀로 무표정을 유지한 채, 회의실과 연결된 문을 열고 CFO실로 들어가 버렸다. 싱겁게 끝나 버린 이른바 ‘상견례’ 자리에, 기대 반 긴장 반으로 모여 있던 경영지원실 직원들은 허무한 얼굴이 되어 자리로 되돌아갔다.
“재벌은 재벌인가 봐. 되게 싸가지 없네?”
민하가 나린의 귀에 대고 툴툴댄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나린은 격한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이 편치 않았다. 찰나였지만 자신을 겨냥했던 차가운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나 벌써 찍힌 건가? 그렇지만 대 도일 그룹 후계자께서 그런 작은 실수 따위 마음에 담아둘 리 없잖아.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했으나 찝찝한 기분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강 대리.”
업무 리더, 박 부장의 호출에 쓸데없는 생각일랑 접고 빠릿빠릿하게 뛰어갔다.
“네, 부장님.”
“부사장님 대시보드 좀 세팅해 드려.”
“네.”
……가 아니라,
“……예?”
부사장님 뭘 해드려요? 도윤완 부사장님 뭐요……?
“경영 현황 대시보드 말이야. 그새 까먹었어? 시스템 쪽에 연락해서 가입 도와드리고 부사장님 자리에 가서 제대로 작동되는지 봐 드리고 해. 접속 방법도 알려드리고.”
아, 그랬지. CFO나 팀장들이 바뀔 때마다 대시보드 세팅은 나린이 담당해왔다. 임원들은 대대손손 손이 없는지 눈이 없는지 시스템 가입도 직접 할 줄 모르는 바보들이었으니까.
“네, 부장님…….”
나린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후…….”
한숨이 절로 흘렀다. 사실 대시보드 세팅 업무 자체는 어려울 게 없었다. 사내 포털에서 대상 임원의 ID를 확인한 후 시스템 담당자에게 전달해 강제 가입을 요청한다. 그다음 자리로 가서,
‘경영 대시보드 잘 접속되시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친절한 미소로 방문 목적을 밝히고,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대시보드 화면을 띄워 접속이 잘 되는지 확인하면 그걸로 임무 완수였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늘. 대시보드 접속 여부를 확인하는 것까지만이 나린의 담당 업무인데, 어김없이 내용 분석 요구가 쏟아지고는 했다.
‘여기 그래프 보면 하반기 경영계획이 미달인데 이유가 뭐지?’
‘원가 항목이 직관적이지가 않은데, 이렇게 분류한 이유가 뭔가?’
‘작년 3분기 이익률이 유독 낮네? 무슨 문제가 있었나?’
제가 그걸 다 알면 진작에 과장을 달았지, 아직 대리겠어요? 그럴 때마다 받아치고 싶은 충동을 꾹꾹 억눌러야만 했던 기억.
“대시보드 세팅?”
울상이 된 나린을 본 민하는 바로 그 이유를 추리해냈다.
“네. 확인은 부장님이나 팀장님이 해주시면 안 되나. 일개 대리가 감히 부사장님 방에 들어가다니요.”
“힘내, 나린 씨. 오늘은 그것만 하고 퇴근한다고 생각해.”
그래, 퇴근. 퇴근을 위해서면 이런 것쯤. 나린은 기운을 내기로 했다. 빨리 매 맞고 집에 가자. 시스템 가입 절차는 순식간에 끝났다. 도윤완 부사장의 ID라고 하니 시스템 담당자의 일 처리가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빨랐다. 윤완의 비서에게 메신저를 해서 자리에 있는지 확인하고, CFO실로 간다. 문을 두드리기 전 크게 심호흡을 하고, 똑똑, 노크 후에 호기롭게 문을 잡아당겼다.
“안녕하세요, 부사장님. 재무팀 강나린 대리입니다.”
윤완은 불시에 제 공간으로 침투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가슴께까지 떨어지는 까만 머리. 맑게 빛나는 눈동자. 나린. ……저 아이가. 윤완의 눈이 양옆으로 가느스름해졌다. 그냥 쳐다보는 눈빛인데도 의아함과 오싹함이 동시에 나린을 덮쳐왔다. 뭐지. 저 표정은……. 역시, 엘리베이터에서의 일을 기억하는 걸까. 아니면 원래 저런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차갑고, 무감정하고. 무의식중에 마른침이 꿀떡, 나린의 목 안을 통과했다. 정신 차려, 강나린. 할 일은 해야지. 이것만 하면 퇴근이야. 금요일이라고. 용기를 짜낸 나린은 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대시보드 접속하는 법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방문 목적을 밝힌 뒤 어색한 웃음을 웃었다. 반갑다느니, 잘 부탁한다느니 몇 마디 반응을 해줄 법한데도 그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저…….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면 프로그램 설치 후 화면 접속 잘 되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나린의 요청에 윤완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일언반구도 없었지만. 나린이 듀얼 모니터에 대시보드를 띄울 때까지 윤완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PC를 클릭하고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매 순간이 나린에게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저를 주시하는 눈길이 따갑게 느껴진다. 꼭 감시하는 것처럼. 부디 에러만 나지 말아라. 간절한 기도가 통했는지 대시보드엔 무리 없이 접속이 됐다. 나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매월 결산이 끝나면 데이터가 자동으로 인터페이스 되니 결산 D+1일에 확인하시면 됩니다.”
대시보드 접속 방법을 설명하고 이렇게 덧붙인 나린은 마침내 윤완의 책상 앞을 벗어났다. 별 질문 안 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며 이 숨 막히는 공간에서 탈출하려는 찰나,
“연나린 씨.”
그가 나린을 불러 세웠다. ‘강’나린이 아닌, ‘연’나린이라고, 아직 세상에 공표되지 않은 새로운 성을 붙여서. ……그걸 어떻게. 윤완을 돌아다보는 나린의 눈동자가 세찬 파도처럼 너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