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귀검신(弓鬼劍神)제13장- 여기가 아닌가보다
“헉헉....조금만 더....끼럇...”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야밤에 그것도 넓지도 않은 산길에서 급하게말을몰며본영으로
도망가는 구유크의 마음은 조급했다.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나자신을노릴지도몰랐
고, 계속해서 추적을 피하느라 잠시의 쉴 틈도 없이 말을 몰았기에흑풍(黑風)이언제쓰
러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젠장...너무 성급했다...척후병의 말만 믿고선...아니지...그래도주의를좀더기울였
다면 이런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을....”
“히히히힝....”
“헛....”
구유크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있을 때 그의 애마인 흑풍(黑風)이더이상의고통
을 견디지 못하고 앞발을 땅에 처박으며 쓰러졌다. 입에 거품을 물고길옆에쓰러져있
는 흑풍을 보는 구유크는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어렸을때부터돌보고
타온 말이었다. 여행을 할 때도 전쟁터로 나갈 때도 항상 가장믿음직한동료가되어주
었는데....
구유크는 칼을 빼어들고는 천천히 흑풍에게 다가갔다. 흑풍은 그런자신의주인을애절
하게 바라보았다.
“미안하다....나 땜에 네가 이지경이 되었구나...절대... 너를잊지못할것이다...”
말을 하는 목소리는 크게 떨려있었다. 구유크는 칼을 높이쳐들었다.자신은움직이지
못하는 흑풍을 끌고 갈 능력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여기서흑풍의고통이나덜
어준다는 심정으로 흑풍을 벨려고 했다. 흑풍도 주인의 이런 심정을아는지미동도하
지 않고 칼을 든 구유크를 쳐다보았다.
“잘....가라...”
눈을 질끈 감고 칼을 휘둘렀다. 칼을 통해 전해오는 기분 나쁜이느낌...구유크는쓰러
져 있는 흑풍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해서 곧장 뒤로 몸을 돌려 처음 자신이가려했던길
을 재촉했다.
“멈춰랏!”
슬픔을 억누르고 뛰어가는 구유크를 막은 것은 전형적인 여진족(女眞族)의복장을한
네 명의 병사였다. 그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말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있었다.
‘지독한 놈들...젠장...’
지금까지 자신을 쫓아 달려온 적들인 것을 안 구유크는 절망을 하고말았다.조금전만
해도 이들은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흑풍을 베느라고 잠시 시간을허비하는순간이
이들에게 발각되고 말았으니...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자신을둘러싸는병사
들을 보며 재빨 리 허리춤에 매달린 칼을 빼들었다. 그런 구유크를보는병사들은하도
어이가 없어 크게 비웃었다. 정면에 있던 덩치큰 병사가 그에게 다가왔다.
“어디...그따위 칼로는 과일밖에 자르지 못하겠다. 칼이라면이정도는되어야지...”
그는 자신이 들고 있는 칼을 흔들며 웃었다. 그의 칼은 엄밀히말하자면도였는데보통
월도(月刀)라 하는 것이었다. 자루 길이 6자 4치, 날의 길이 2자 8치에이르고날등의 중
간에 기인(岐刃)이 있어 그 끝에 술을 장식한 월도는 달빛에 반사되어그자태를뽐내고
있었다.
구유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른 손에 들려있는 칼을 두 손으로맞잡으며전의를불
태웠다. 솔직히 너무 무서웠다. 아버지를 따라 많은 전쟁터를 누볐지만지금과같은위
기에 처한 적은 없었다. 항상 안전한 곳에서 경기를 관전하듯 그렇게 전쟁을해오던그
였기 때문이다.
‘섣불리 움직이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를 해도 때는 이미 늦어 버렸다.
수렵민이었던 여진족(女眞族)은 오랜 옜날부터 장백산과흑룡강(黑龍江)사이에생활
터전을 잡고 살아왔는데, 읍루(?婁), 물길(勿吉), 말갈(靺鞨)등으로불리다가송나라
이후에 여진(女眞)이라 칭해졌다. 이들은 이미 기원전 11세기주(周)무왕(武王)때부터
중원과 교역 및 조공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진족은 12세기초에이르러아골
타라는 걸출한 인물이 여진을 통일하고 금(金)나라를세우고(1115~1234)중원의북쪽
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조(元朝)가 건립된 이후로는 몽고의 지배를 받다가, 원조를축출한새로운왕
조인 명(明)의 통치하에 복속되었다. 명조를 건립한 태조주원장(朱元璋)은여진족이북
부지역을 100여 년간 점령했던 것을 기억하고 자신의아들3명을번왕(藩王)으로책봉하
여 요동지역을 통치하게 하였다.
그 뒤 영락제(榮樂帝)는 여진족의 세력을 분산시키기 위하여그들을건주(建州),해서
(海西), 야인(野人)의 3개로 분할하여 통치하였다. 건주와해서는지명이지만야인이란
말 그대로 미개인이라는 뜻임은 말할 것도 없다.
건주여진은 주로 요동과 장백산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고 해서여진은송화강유역에살
고 있었으며 야인여진은 흑룡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은 명의철저한경계로하
나의 국가를 이룩하지는 못하고 각 지역마다 세력을 지닌 족장들이통치하고있었다.
그런데 이런 통치구조에 변화가 생긴 것은 바이허족에 아비타라는족장이들어서고부
터였다. 해서여진에서 두 번째로 강성한 부족이었던 바이허족은아비타라는족장을내
세워 그 세력이 가장 강했던 포세토족을 일거에 쓸어버리고,해서여진의최고세력으로
급부상했다. 바이허족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소부족을 하나 둘굴복시키며날로
그 세력을 키우더니 급기야 금나라 이후로는 최초로 해서여진을 일통 시켰다.
명나라를 의식해 잠시 숨죽여 있던 바이허족은 그 손을점차건주여진으로확대시켜왔
다. 벌써 여러 부족들이 멸망하거나 항복했고 지금은 장백산 일대를접경으로하여구유
크의 아버지가 족장으로 있는 야우커우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해서여진을 통일한 바이허족의 힘은 실로 막강했지만 건주여진을대표하는야우커족
또한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고있는가운데야우커
족의 족장인 토타우는 잠시 건주여진의 부족회의에 참석코자아들인구유크에게전장
을 맡기고 병영을 떠나 있었다. 비록 어린 아들이 걱정이 되기는했지만아들을보필할
장수들이 실로 뛰어나서 안심을 하고 회의에 참석했다. 야우커족의장수들은그런족장
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족장인 토타우가 돌아오기만을기다리며공격보다는수비
에 치중하고 좀처럼 나가 싸우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참고 있기엔구유크가너무어
렸다.
“공격해야지요....당장 공격대를 준비하십시다...”
“그건 무리입니다...그렇게 허술하게 이동을 시킬그들이아닙니다...틀림없이무언가
가 있습니다..”
당장 습격을 하자는 구유크의 말에 대장군인 마라난타가 제동을걸었다.아버지도존중
하는 장군이었기에 구유크 또한 정중히 그를 대했다.
“그렇다면 식량이 바이허족에게 무사히 인도되는 것을그대로지켜보자는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이건 우리 부족에게 하늘이 준 기회입니다...”
어제 밤에 척후병이 알려온 바에 의하면 식량을 가득 실은수레가바이허족으로이동
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현지에서의 식량 수급에문제가생기자본
국에서 보급해 오는 모양이었다. 구유크는 당장에 공격하자고주장하였다.하지만밑에
있는 장군들은 쉽게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척후병의 말을 빌리면 그 식량을 지키는 병사들의 수가너무적습니다.수레
가 50여대가 넘는데 병사가 30여명이라니요....이건누가봐도틀림없는함정입니다...결
코 공격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서열은 마라난타보다 낮지만 나이는 장수들 중 최고인 우띠마저이번공격에반대
하자 구유크는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이처럼 좋은 기회를...알았습니다....장군들의 말을 따르지요....”
구유크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어 공격포기를 선언했다. 하지만자신의천막으로들어
온 그는 자신의 부장을 은밀히 불러들였다.
“지금 장군들은 아버지가 안 계셔서 저리 몸을 사리고 있지만이번기회는절대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요. 부장은 지금 즉시 병사들을 모으시오...적의수가30여명이니50명
으로도 충분하겠지만 혹여 모르니 100명을 차출하고....단 장군들을모르게은밀히움직
여야 할 겁니다. 공격은 오늘밤에 하도록 합시다.”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부장은 대답한대로 100여명의 병사를 준비시켰다. 구유타는그들을이끌고조심스럽게
본진을 빠져 나왔다.
“적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구유크는 어제의 그 척후병에게 질문을 했다.
“어제까지 북서쪽의 하타라는 마을을 지나고 있었으니 지금은호구빠라는마을쯤에
있을 겁니다. 여기서 북쪽으로 약 100여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백여리라...앞서 달려가 길목을 지킨다. 부장은 선두를이끌고매복지점을찾아라...”
“복명”
구유크의 명령에 부장인 테친무는 병사들을 수습하여 북쪽으로 나아갔다.두어시진을
달려 구유타 일행이 도착한 곳은 호구빠에서 60여리 떨어진 곳의 작은언덕이었다.
“수송대가 그들의 부족에게 갈려면 이길 밖에는 없습니다.이곳에서적을기다렸다가
공격하면 될 것입니다..”
“부장이 병사들을 배치하고 적이 올 때까지 푹 쉬게하시오...하지만한치의흐트러짐
이 있으면 안될 것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구유크는 부장이 병사들에게 돌아가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아시면 아시면 틀림없이 기뻐하시리라..‘
땅거미가 대지에 내려 앉자 구유크는 테친무를 다시 불렀다.
“이제 곧 적이 올것이다. 공격에 앞서 병사들을 두조로 나누고부장이한조를이끄시
오. 다른 한조는 내가 움직이겠으니... 공격은 여기서 시작할 것이고공격이시작되면그
대는 나머지 병사를 이끌고 후미를 치도록 하시오. 이렇게 동시에 앞과뒤에서공격을
하며 쉽게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어서 준비를 하시오”
“예..알겠습니다”
테친무가 병사들을 이동시키고 두개의 병사들을 두개의 조로 나누는지휴식을취하고
있던 병사들의 바삐 움직였다. 공격을 대비해 자신들의 무기를점검하고친하게지내는
동료들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일각이 지나지 않아서 구유크는 공격의준비가끝났음을
알리는 테친무의 보고를 받을 수 있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곧 적들의 보급부대가 모습을드러낼것이다.본진의
장군들은 이것이 적들의 함정이라 하였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적들은족장님이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우리가 수비에 치중하는 것을 알고 이때를 기회삼아충분한보급을통
해 전력을 공고히 하려함에 틀림없다. 우리가 비록 수비에 치중하고있으나이런기회
를 수수방관 해서는 안될것이다. 여기 모여 있는 병사의 수는비록100여명에불과하지
만 모두가 일당백(一當百)의 용사들이다. 가라. 가서 적들에게우리의무서움을보여주
라”
“와!!!”
구유크의 결의에 병사들은 자신의 무기를 들어 올리며 호응을 했다.
구유크는 그런 병사를 흐믓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테친무을바라보았다.말
투도 어느새 명령조로 변해 있었다.
“그대도 가라. 여기서 공격이 시작되면 바로 공격을 하도록하라.무운을빈다”
“몸을 보증하십시오”
테친무는 구유크에게 몸을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신에게 맡겨진병사를이끌고어둠속
으로 사라졌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구유크가 만반의 준비를 마친뒤 반시지의 시간이 흘렀다. 아주 미미하기는했지만저멀
리서 말발굽과 수레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나....’
“적이 최대한 올때까지 기달린다. 연후 나의 신호를 기해일제히공격을한다...은폐
에 만전을 기하라”
구유크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장교들에게 간단히 말한 뒤, 자신 또한 나무뒤로몸을숨
겼다. 수레의 맨 앞에는 이번 호송의 담당자인 듯한 장수가 말을 타고있었고그뒤로는
다섯 마리의 말과 기병이 따라오고 있었다. 병사들은 수레사이사이에배치되어있었는
데 그 수가 50여명에 이르렀다.
‘척후병의 보고 보다 20여 명은 많아보이는구나...허나..전력은이쪽이압도적이다..
우선 머리를 잘라야 겠지,,,’
구유크는 적들이 최대한 깊숙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옆에놓인활을
들고는 선두에 서서 다가오는 적장을 겨냥했다.
“피잉~”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화살이 날라가자 구유크의 신호만을 지켜보던장교들은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공격하라....공격”
병사들은 함성을 질러대며 무수한 화살을 날리더니 곧이어 칼을치켜들고아래로뛰어
내려 갔다.
“챙!챙!”
“죽어라...”
죽고 죽이는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행렬 뒤에서도 소란이 이는것을보니부장이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을 시작한 것 같았다. 언덕위에서 이를 지며 보던구유크는두주
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이겼다...공격은 대 성공이야...’
그때였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언덕아래에서 한명의 병사가 온몸에피칠을하고구
유크에게 뛰어왔다. 왼쪽팔은 어디로 갔는지 빈 소매만 펄럭이고 있었다.
“소족장님 피하십시오...함정입니다...”
“무슨소릴 하는 것인가? 함정이라니...겨우 50밖에 안되는적을피한단말인가?”
“첨에는 병사가 50여명에 불과 한 듯 했지만 수레를 끄는 자들과 짐을들고있던모든
이들이 사실은 적병들이 위장한 것이었습니다. 적의 수가 300이넘습니다.아래로내려
간 아군들은 이미 포위되어 거의 전멸을 당했습니다.
“뭐라고?...전멸?....”
“어서 피하십시오. 적군이 곧 몰려올 것입니다...”
허탈한 마음에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구유크에게 힘없이 소린친병사는그
자리에 쓰려져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저기다...적장을 잡아라...”
구유크의 정신을 차리게 한 것은 적병의 외침이었다. 어느새 밑의아군을전멸시킨적
군은 언덕위로 뛰어 올라오며 그를 노리고 있었다.
“이런....”
구유크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머리를 돌려 뒤로 달아났다. 정황을보니자신뿐만아
니라 후미를 공격했던 테친무도 당했음이 틀림없었다. 이제 자신을지켜줄병사는아무
도 없었다. 적병은 그런 자신을 집요하게 쫓아왔다. 구유타는 미친듯이달렸다.방향이
나 지형을 살피며 도망가기엔,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그러나 어찌된 것인지 적들은 그가 가는 길목마다 매복을 하고 있었다.만약흑풍이천
하의 명마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잡힐 뻔 한 것이 벌써 몇 번이었다.하지만아무리흑
풍이라도 잠시도 쉬지 않고 그렇게 달려대니 배겨낼 재간이없었다.게다가허벅지에는
화살도 몇 개 박혀 있었다. 결국 이렇게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너를 도와줄 병사라곤 아무도 없다. 항복을한다면목숨은살려주마...어떠냐?”
구유크의 앞으로 나온 병사는 자신보다 훨씬 큰 월도를 휘드르며항복을권유했다.
“닥쳐라. 야우커우족에게 항복이란 죽음뿐이다. 헛소리 하지 말고 덤벼라”
구유크는 그가 자신을 모욕한다고 여겼다. 용사로자부하는자신에게항복이라니...조
금전만해도 겁에 질려 있었던 구유크의 몸에서 절로 투기가 흘러 나왔다.
“음....”
덩치큰 병사는 좌우에서 달려들려 하는 병사를 고개짓으로 막더니자신의말에서내려
왔다.
“호의를 보였는데도 고집을 부리다니...할수 없지... 목을취하는수밖에....덤벼라”
사내는 월도를 치켜들더니 구유크에게 다가왔다.
“챙!”
먼저 덤벼 든 것은 구유크였다. 월도보다 칼의 길이가 훨씬 짧기때문에접근전을선택
했다. 재빠르게 파고들어 일검을 날렸지만 그 병사는 가볍게막아내고는오히려반격을
했다. 구유크는 자신의 검을 너무나 손쉽게 막아내고 순식간에 반격까지하는병사의실
력에 깜짝놀랐다. 그 병사의 월도는 어느새 구유타의 왼쪽 어깨에커다란상처를만들었
다.
“놀랐느냐? 그리 놀랄 것 없다. 나는 바이허족의 장군 타루다.일반병사라고생각했다
간 큰일 날 것이다...하하하”
구유크의 눈에서 나오는 의구심을 알았는지 그가 껄껄 웃으며 말을 했다.
‘어쩐지...병사치고는 그 풍기는 기도가 실로 무섭더니...’
구유크는 가슴이 답답했다. 만약 이들이 일반 병사라면 자신의실력으로이들을제압하
고 탈출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하고 있었는데.. 장군이라니...
두사람은 다시 무기를 맞대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약관조차 되어보이지않는구유
타의 무위는 좀처럼 보기 힘든 훌륭한 실력이었지만 타루라는 장군은그이상이었다.겨
룸이 오십여합을 넘을 때 구유크는 결국 칼을 놓치고 말았다.그러나타루는비틀거리
는 구유크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대..이름이 무엇인가? 어린 나이에 훌륭하다”
구유크는 적장의 적지않이 감탄한 듯한 목소리에 비록 싸움에선졌지만자신과부족의
명예를 지켰다는 생각에 큰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나는 야우커우족의 소족장 구유타다. 패장은 말이없는 법..죽여라”
타루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실력을 보아 어느정도 높은신분의청년이라고는생
각하고 있었지만 소족장이라니...설마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네가 정말 야우커우족의 소족장이란 말이냐?”
“그렇다...네가 장군이라면 나에게 모욕을 주지 않으리라믿는다.명예롭게죽여달라”
구유크는 생을 포기했다는 듯이 두눈을 감고 있었다. 타루는 그런구유크의모습에서
또 한번 감탄을 하였다.
“좋다. 나 또한 명예를 아는자. 그대의 명예를 지켜주지...”
구유크는 죽음을 앞두자 갑자기 아버지가 보고 싶었다.
‘아버지....’
타루는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있는 구유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월도를높이
치켜 들고는 힘차게 내리쳤다.
“잘가라”
하지만 타루는 결코 월도를 내리 칠수 없었다. 어느새 그의 어깨에는화살하나가깊숙
하게 박혀 있었다.
“누구냐?”
화살이 날라온 곳을 바라보며 타루가 소리쳤다. 세명의 병사 또한그곳을노려보고있
었다. 구유크는 의아한 심정으로 그들이 노려보는 나무 위로 시선을 가져갔다.
“부스럭...부스럭!”
나뭇가지가 마구 흔들리자 일순 긴장한 타루의 일행은 언제든지 공격을 할수있는대
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이처럼 긴장하고 있을때 무수히우거진나뭇가지를뚫
고 위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었다.
“나를 부른거냐?”
소문이었다. 제법 높은 나무지만 문지방을 넘듯 가볍게 뛰어내린사람은틀림없는을지
소문이었다.
헌데 한참 의주로 가고 있어야 하는 그가 이곳에 나타난 까닭은 무엇인가...
소문은 기분이 묘했다. 스무살이 넘도록 그가 지내온 곳은장백산일대였고만난사람이
라야 마을 사람을 포함해 50여명이 채 안됐다. 할아버지의 억지에 의해어쩔수없이집
을 나오게 됐을때만해도 짜증도 나고 만사가 귀찮기만 했지만 막상 길을나서자그런마
음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바뀌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애초에 의주로 가서 중원의 문물을 익히라고 했지만그러것은소문의성격
과 맞지 않았다. 되거나 말거나 일단 저지르고 보는게 소문인지라 그렇게질질끄는방
식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왕 중원으로 가기로 했으면 그냥 가는 것이지... 익힐건 머고배울건또머야...그때
가면 다 알아서 되겠지...’
이런 말도 안되는 자신감에 사로 잡힌 소문은 신의주를 향해 서남진 한것이아니라바
로 북서진 하여 조선과 명의 국경을 넘어 버렸다.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하고잠이오면나
무 위에서 이슬만 피하면 됐다. 이렇게 생활한지도 벌써 나흘째..저멀리평야가보이
는 것을 보니 험준했던 장백산의 줄기에서도 다 벗어난 듯 했다.내친김에마을까지내
려 갈까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미 날도 어두워지고 몸도 피곤하여잠을청하고자나무
를 물색하다가 그중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한 나무가 보이길래 냉큼올라와잠을청하
던 소문이었다.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기분나쁜 소음들이 소문의단잠을천리밖으로날
려버렸다.
“언놈들이....”
소문은 감히 어떤 인간들이 자신의 잠을 깨우는 것인가 궁금하여가지사이로고개를빼
꼼히 내밀었다.
“히히히힝....”
자신이 있는 곳으로 급하게 달려오던 말이 땅에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그말을타고있
는 놈(소문의 눈에는 자기를 깨운 것들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을보니자기또래의
청년이었다. 말과 함께 엎어졌던 그놈은 칼을 꺼내더니 말에게 다가갔다.
‘얼레...머하는 짓이랴...’
소문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동안 그놈은 칼을 들고 여전히 쓰러져있는말에게다가가더
니 칼을 휘두루려는 것이 아닌가?
‘저런 죽일놈을 보았나....암만 말에서 떨어졌다지만 지가 타던 말을...’
소문이 순간 발끈하여 당장 칼을 막을려고 했지만 그 생각은 곧바뀌고말았다.동물들
은 아무리 심하게 상처를 입었더라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은필사적으로피하려고
하는 법인데 저 말은 오히려 죽음을 바라는 듯 한 태도였다. 다시보니주인놈도영마음
에 내켜하지 않는 같았다. 결국 그놈은 자신이 타던 말의 목을베고는처음에가던길로
뛰어갔다.
‘이건 또 뭐지...’
소문은 또한번 자신이 있는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오는 말들을 보고있었다.그놈들역시
급하게 달려왔는지 말들이 모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였다.
나중에 도착한 놈들은 먼저 도착한 놈을 포위하더니 막 웃었다.그러더니이상하게생
긴 칼을 든 놈이 말에서 내리고 곧 어린 놈과 싸움을 시작했다.
‘오라...그리 된 것이었고만....’
이제야 그놈...아니지 그 청년이 한 행동이 이해가 갔다. 비록 자신의잠을깨운죄야 막
대하지만 그것도 다 저놈들이 쫓아와 그리 된 것이리라...
‘네놈들이 내 잠을 깨고도 무사할 줄 아는 모양인데...이놈들을어찌한다...’
소문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고 있는데 싸움이 끝이 났다. 나중에 온무식한놈이자신
만큼이나 무식하게 생긴 칼로 여린 청년을 쓰러뜨리더니 이제는 그목숨마저취할려고
하고 있었다.
‘안되지...내가 있는데....’
소문은 잽싸게 화살을 날렸다. 화살이래봐야 그냥 잡히는대로 아무가지나자른것이지
만 무성한 가지와 나뭇잎을 뚫고 막 칼을 휘두르려는 놈의 어깨를정확하게꽤뚫었다.
자신의 어깨에 박힌 화살을 본 그놈이 자신이 있는 나무를 보며뭐라고지껄이는게보였
다.
‘뭐라는 거야...’
그놈뿐만 아니라 같이온 다른 놈들도 자신이 있는 나무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하...나보구 나오라는 것인가? 도전? 받아줘야지 암...’
소문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나무를 뛰어내려갔다. 그리고는 자신을부른놈에게다
가갔다.
“왔다....”
타루는 갑자기 나타난 소문을 보고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나이는 저기쓰러져있는구
유크 정도로 밖에는 안보였지만 방금 날라온 화살이나 나무위에서뛰어내리는실력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조심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바이허족의 타루라 하오...소협은 누구시요?”
타루는 정중하게 소문에게 자신을 밝혔다. 하지만 소문이 그말을알아들을리없었다.
소문은 내심 당황했다. 하지만 타루는 소문보다 더 당황을 했다.
‘아니...이놈이 나를 무시하는건가....’
여진족은 상대방이 말을 하면 어떤 식이든 반응을 보인다. 욕을 하던칭찬을하건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어쨎든 자신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중요한것이었다.하지만
소문처럼 아예 무시를 하는 것은 욕을 듣는 것 보다도 더 분노했다.바로모욕을당했다
고 느끼기 때문이다. 타루의 얼굴이 싸늘히 굳어졌다. 같이 온 병사들또한살기를풀풀
풍기고 있었다.
“다시 한번 물어보겠소....소협은 누구시오?”
평소에 볼수 없는 모습이었다. 지금 타루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는 붉다못해검게변한
얼굴빛을 보면 알수 있었다. 하지만 소문은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못하고멀뚱멀뚱서
있었다.
구유크는 내심 조마조마했다. 죽다 살아난 것은 기쁘지만 자신을 구한것이겨우한명
에다 자기 또래의 청년아닌가...실망하는 마음이 적지 않게 있었는데상대에게저렇게
모욕까지 주다니...살아가기는 다 틀린 일이었다.
“소협. 나는 신경쓰지 말고 도망가시오...”
구유크는 마치 진정이 어린 듯한 목소리로 절대 마음에도 없는소리를내뱉었다.하지
만 이말 역시 알아듣지 못하는 소문이었다.
“네놈이 끝까지 그리 나온다면 할 수 없지....공격해라”
분노어린 타루의 명령이 떨어지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세명의병사가소문에게달려들
었다. 말을 몰아 순식간에 다가온 그들은 각각의 무기를 들어소문을공격했다.갑자기
공격을 당한 소문은 화가 치밀었다.
‘아니...이것들이 나를 어찌보고...’
소문은 재빨리 출행랑을 시전했다. 이미 경지에 오른 출행랑을 일게병사들이간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소문에게 공격을 했던 병사들은 깜짝놀라고말았다.방금전만해
도 앞에 있던 소문이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없었다. 놀라기는타루역시마찬가지였
다. 그때였다. 그들에게서 약 10여장이나 떨어진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건방진 놈들...이상한 말만 지껄이더니 다짜고짜 공격을해....네놈들을내가가만 둘
것 같으냐....”
소문은 주위의 나뭇가지를 꺽었다. 그리고 막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오던병사를향해
그 나뭇가지를 쏘았다. 소문의 화살대용 나뭇가지는 천천히 날아가앞서달려오던병사
의 어깨에 가서 박혔다. 소문은 연달아 나뭇가지를 날렸다.나뭇가지가날아갈때마다어
김없이 한명의 병사가 말에서 떨어졌다.
“흠...나뭇가지라 그런가...확실히 속도가 안나는데...기를 넣어볼까...”
소문은 은근히 불만이라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뜻을 타루가들었다면게거품을
물을 만한 말이었다. 타루는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이처럼 빠르고정확한활솜씨를본적
이 없었다. 어떻게 쏘는지도 모르게 세발의 화살이 모두 자신의 수하들의어깨에가서
꼿혀버렸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모두 말에서 굴러 떨어져 도저히 싸움을할수있
는 상태가 아니었다. 타루가 그처럼 놀라고 있을때 소문은 또 하나의나뭇가지를활에
재고 있었다.
“어이...두목...한번 막아보지 그래....”
역시 타루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더니 나뭇가지를 날렸다.타루는뭔가가번쩍인다
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자신의 어깨에 또 하나의 나뭇가지가 박혀있은것을볼
수 있었다.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무...섭,,군...”
소문은 타루와 그의 수하가 모두 쓰러지자 그때서야 천천히그들에게다가갔다.그리
곤 한심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그러길래...왜 함부로 공격을 하냐고....실력은 쥐뿔도 없는 것들이...”
‘조선말이다....어쩐지...’
구유크는 소문이 하는 말을 듣고 그가 조선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있었다.그때까지땅
바닥에 앉아 있던 구유크는 몸을 일으켜 소문에게 다가왔다.
“그들은...소협의...말을..잘..모릅니다”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소문은 고개를 홱 돌렸다.
“엥? 내말을 잘모르다니...뭔소리냐?”
“저들은...여진 사람...당연히 당신의 조선말은...알지 못합니다...”
“아 맞다...여기는 중원이지...근데 너는 어떻게 조선말을하지?너두조선인이야?”
소문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말을 했다. 하지만 들려오는대답은소문의생각과는
달랐다.
“아닙니다...저도 여진족입니다...”
“그래? 근데 너는 어떻게 조선말을 하지 저놈들은 못하는데...”
소문이 의아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저는 건주여진 사람으로 건주여진에는 조선인이 많이 있습니다.그들에게배워서잘
은 못하지만 어느정도 대화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저들은해서여진족이라조선인이
거의 없습니다.”
구유크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초면부터 계속 반말을 하는 것이마음에걸렸지만
어차피 다른 나라의 사람이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사람이다보니 그런것은별로신경
쓰지 않았다.
“뭐가 그리 복잡해...그냥 하면 하는거고 못하면 못하는 거지...”
소문은 이것저것 생각하기 싫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가 다시질문을했다.
“근데 저놈들이 왜 너를 죽일려는 것이지? 같은 여진사람이라며?”
“저는 건주여진 사람이고 저들은 해서여진 사람입니다. 그런데최근저희와저들간에
싸움이 벌어져서...”
“아아...알았어...무슨소린지...근데 너두 싸움을 꽤못하는구나...저런약해빠진 놈들
에게 당하다니...”
소문은 구유크를 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을 했다. 구유크는자신도건주여진족에선손
꼽히는 무사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씨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아그만두었다.소문은갑
자기 화제를 바꿔 구유크에게 말을 물었다.
“근데 여기가 중원이야?”
“예?”
“여기가 중원이냐고....?”
“아닙니다...여기는 건주지방입니다만...”
“여기가 아니라고.....?
“중원은 여기서 서쪽으로 가야 합니다”
“흠....그렇군....얼마나 가야 하지?...한 보름쯤 가면 되나?벌써나흘이나걸었는
데....”
소문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던졌다. 하지만 그런 소문을 구유크는황당하다는듯쳐다
보았다.
“보름이라뇨? 뭘 잘못아신게....”
“왜? 여기가 중원이 아니라며...그래서 서쪽으로 간다니까...”
“그게 아니라...거리가...”
그제서야 소문도 뭔가가 이상했나보다. 정색을 하고 다시 물었다.
“꽤... 먼가보지?”
“쫌 멉니다...”
“한 며칠쯤 가면 되나?
“이십여일 정도....”
“하하하 이십일 정도가 무에 대수련가....하하하”
구유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소문은 크게 웃었다. 하지만 구유크는 별반응없이말을
이었다.
“...가면 중원의 초입에 이르게 됩니다...”
“..................”
“그리고 거기서 중원의 수도인 북경을 가려면 다시 그정도의시간을가야됩니다...하
지만 북경은 중원의 최 북단에 위치한 것이라...”
“..................”
“혹 가시려는 곳이 어디신지....?
“소림사는.....”
“소림이면 북경에서 남으로 다시 20여일을 가면 됩니다..”
대답을 듣는 소문의 마음은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 이건 자신의 예상과는전혀다른방
향이었다.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흠.....혹시 사천에 있는 당가를 가려면....얼마나 걸리겠는가?”
“사천이면 중원의 남서지방입니다...만은....”
“얼마나... 걸리냐니까?”
“저두 잘은 모르지만 그쪽이 워낙 길이 안 좋아서 여기서 간다면대여섯달은족히 걸
린다고 들었습니다만....”
“........................”
구유크는 소문의 반응을 살피는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소문이 아무말을하지않
고 있었지만 소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목적지에 다 온줄아는사람에게오륙
개월을 더 가라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구유타는 그저 그불똥이자신에게만
은 떨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구유크의 생각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으아....악!!! 빌어먹을 영감탱이.....그런 말은 하나도 안해주고...”
결국 소문은 발작을 하고 말았다. 주변의 나무들을 닥치는 대로후려갈기고돌이란돌
은 다 집어 던졌다. 얼마를 그랬을까...소문이 이성을 찾고 발작을멈추었을때는이미
주변이 처참하게 폐허가 된 뒤였다. 나무란 나무는 다 부러져 가로로누워있었고땅도
곳곳이 파헤쳐져 있었다. 다만 소문이 발작을 하자마자 멀찌감치피해있던구유크만은
무사했다. 소문이 진정을 하자 구유ㅋ,는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소문에게다가왔다.
비록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소문은 여전히 분노에 가득 차있었다.아무리꼬장피길
좋아하고 괴팍한 할배지만 손자가 집을 나오는 마당에까지 이럴 수는없다는생각이들
었다. 대여섯달이라니.. 왕복으로 거의 일년에 달하는거리가아닌가....그런데할배는
봄 소풍 떠나라는 듯한 말투로 얘기를 했었다. 이건 틀림없이자신을골탕먹이려는할아
버지의 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소문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었고.....할아버지는소문이중원에대
해선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동안 자신의 선조들이기록한중원의정보
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각종 지방과 지역의 특징이며 무공을익히는세력들의분
포...또한 일반인의 생활 습관까지 총 망라해서 기록해두었는데....자신은이미소문에
게 그것을 읽으라 말을 해 두었다. 게다가 비록 헤이해져 있는정신상태를바로잡고고
생도 하며 견문을 익히라는 의도로 중원에 보내기는 했지만 그래도혹시나하는마음에
의주로 가서 충분히 준비를 하고 떠나라는 충고까지 해준 터였다.
그런 할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읽으라는 책은 배게로 쓰고 의주로 가라는말은싹무
시하고 바로 국경을 넘은 소문에게 전적으로 그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그런걸생각할
소문이 절대 아니었다.
“저기...”
“머냐?”
소문이 한참을 씩씩거리며 성질을 내는 터라 말도 못 붙이고 있던구유크는그래도용
기를 내어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날도 어둡고.....”
“동이 터 오는데 어둡기는....”
소문은 단박에 말을 잘랐다. 하지만 구유크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잠시 여행을 멈추시고 오랜 여행에 대한 준비를 하셔야 할 듯합니다만....”
“흠....그래...그말도 일리가 있어...하루 이틀도 아니고....”
소문이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구유크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중원의 말과 문물도 어느 정도는 익히셔야 여행에서 편하실겁니다.밤자리도그렇
고 식사문제도 그렇고....”
“맞아...언제까지 사냥으로 배를 채우고 길에서 잘수는 없지...”
소문은 이번에도 맞장구를 쳤다. 타루의 경우를 보고 언어의 장벽이어떤결과를가져
오는지 새삼 느끼게 된 소문이었다.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그 준비를 위해 저와함께가시는것이....어떠신지...저
희 부족에는 중원의 말과 문물에 능통한 사람도 많고 조선사람도많아소협이여행준비
를 하시는데 전혀 지장이 없으실 겁니다....”
여기까지 말을 한 구유타는 조심스럽게 소문의 반응을 살폈다.
“흠...건주뭐시기라하는 니네 부족으로?”
“건두여진은 요동과 장백산 일대의 지역을 말하는 것이고저희부족은야우커우족이
라 합니다...”
“그게 그거지 뭐....흠....좋아...그러지 뭐...”
소문이 의외로 쉽게 승낙을 하자 구유타는 크게 기뻐했다. 구유크가소문을자신의부
족으로 데려 갈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소문에게 빛을 갚자는생각도있기는했
지만 보다 큰 이유는 소문의 엄청난 실력이 지금 한창 전쟁을 하는자신의부족에게크
게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유타 또한 스스로를상당한실력자라자부하기
는 했지만 소문의 실력은 자신의 상상을 뛰어 넘는 경지였다. 비록한명에불과하지만
이런 실력자가 전쟁에 끼치는 영향은 상당했다.
“앞으로는 제가 소협을 대형으로 모시겠습니다...”
“대형으로 모시고 안모시고는 니 마음인데....내이름은 을지소문이다.소협이뭔지는모
르지만 소문이라 불러라....”
“.....”
역시 무식한 소문이었다.
“암튼...가자...맨날 고기만 먹다보니 밥이 먹고 싶다...설마 밥이없는것은아니겠
지?”
“없을 리가 없지요.....그럼 가시지요 형님”
구유크는 병사들이 타고 온 말을 끌어와 한 마리를 소문에게 인도한뒤말에올랐다.허
나 소문과 구유크가 말머리를 돌려 야우커우족이 있는 본진으로 향한것은그로부터한
시진이나 지나고였다. 앞서 달려가던 구유크는 뒤따라오는 소문을바라보며고개를갸
웃거리고 있었다.
‘내가 실수하는 것은 아닌지 몰라....’
구유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한시진이나 가르쳤지만 여전히 고삐를잡고말을달래기
에 전전긍긍하는 소문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