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귀검신(弓鬼劍神)제12장 -출(出)
확연한 여름이었다. 아침과 저녁을 제외한 대낮에는 상당한 열기가 대지를달구어사람
들로 하여금 그늘을 찾게 만들었다. 할아버지도 기승을 부리는 더위에 잠시몸을식히고
자 그늘을 찾았다.
"저...저..우라질 놈 같으니라고....아예 찢어지는구나...."
할아버지가 대낮부터 욕을 하며 노려보는 곳에는 역시 소문이 있었다. 소문은지금그
물 침대에서 입을 있는 대로 벌리며 크게 하품을 하느라 바둥거리고 있었다.상의는풀
어헤치고 한 손에는 술병을 한 손에는 말린 육포를 안주 삼아 들고 있었다.집앞에서 자
라고 있는 커다란 고목 나무에 자신이 스스로 만든 칡덩굴 그물을 서로연결해놓고는
벌써 며칠째 이러고 있었다.
소문이 두어 달 전에 수련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할아버진 소문에게무공의성
취가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소문은 대답대신 그저 '씨익' 웃어주었다.이후로
도 몇 번이나 궁금하여 물어보았건만 그때마다 소문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울화통이 터지는데 산에서 내려온 소문은 그때부터 아예 세상에둘도없
는 게으름뱅이가 돼버렸다. 처음에는 그간 수련에 심신이 지쳤나보다 하고 밥도해먹이
며 잘 보살펴 주었건만 그게 아니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소문이 산에서 내려온지벌
써 한참이 되었지만 이건 도무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침을 먹고그그물에
기어올라가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점심때 잠시 내려왔다가 곧장 올라가서또한나
절을 보냈다. 그러면서 소문이 하는 일은 잠을 자거나...낯 술을 마시거나(늦게배운도
둑질이 무섭다고 최근에야 술을 배운 놈이 벌써 술맛을 알아버렸다)...아님그저멍하고
먼 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공수련은커녕 어렸을 때부터 해오던 호흡법(반야심경도해)도 팽개친지 오랜것같았
다. 그러니 그런 소문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심정이 오죽 답답했으랴...
곰방대로 마구 두들겨 보았지만 소문의 몸에 뭔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곰방대로는개미
가 무는 충격에도 못 미치는지 아예 무시를 해버리는 것이아닌가...그렇다고지난번처
럼 무공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번은 내공을 끌어올려 한 대 후려쳤는데 오히려 반탄력에 일장이나 뒤로나가떨어져
버렸다. 그때 소문이 한말이 '나이 드셨군요...'이던가....그 말을 하는소문의얼굴이 지
금도 생생했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무슨 망신을 당할지 두려워 소문 앞에서절대무
공을 쓰지 않았다.
"이놈아...남자 놈이 뭔 일이라도 해야지....허구헌날 먼 짓이냐?무공을익히던지...아
님 사냥을 하던지...좌우지간 몸을 움직여야 할 것 아니냐?"
".....귀..찮..아..서..요...."
귀찮다니....저 바닥 밑에서 무언가가 치고 올라왔지만 필사적으로참아낸할아버지는
소문에게 다시 말을 했다.
"네 나이 벌써 스물이 넘었다. 남자 나이 스물이면 뜻을 세울 때도되지않았느냐? 네
무공이면 관부에서 장군을 하는 것은 물론 중원에 나가 천하 무림을 호령할수도있음이
니....어떠냐?"
할아버지는 은근한 말로 소문을 달랬다. 하지만 의외로 소문은 침착하게대답을했다.
"이미 뜻을 세웠습니다...."
"그래...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느냐?"
"....안빈낙도(安貧樂道)입니다....등 따숩고 배부른데 뭐가아쉽겠습니까...."
너무나 태연스런 소문의 대답에 할아버지의 얼굴은 푸줏간에 걸린 고기 마냥벌겋게달
아올랐다. 안빈낙도라니...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그때 당했던 망신스런모습은이
미 뇌리에서 사라졌다. 두 손에 내공을 끌어올린 할아버진 철천지 원수라도 만난듯무
섭게 공격했다. 하지만 그런 매서운 공격도 소문에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소문은
그저 출행랑을 시전하며 전후좌우로 슬슬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결국 한참동안의 공격에도 소문의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못한 할아버지는숨을헐떡
이며 말을 했다.
"네놈...맘대로 해라...안빈낙도를 하던지....지랄을 하던지...난모르겠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훼훼 돌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어느새그물위
에 자리를 잡고 누운 소문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에그...그것도 움직인 거라고 피곤하네 그려..."
방으로 들어온 할아버지는 분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소문의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평생 하나만을 보며 달려오다가 그것이 이루어졌을땐성취
감보다는 허탈감이 큰 법이었다. 소문도 틀림없이 그런 상태일 것이다.그래서만사가
귀찮고 따분하게 변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십분 양보를 한다해도 이건아니었다.
"빌어먹을 놈....할애비가 그리 애쓰는데 눈 딱 감고 한 대 맞아주면 어디가덧난다
냐....괘씸한놈 같으니라고....오냐... 네놈이 정 그리 나온다면 다른방법을강구하는 수
밖에...두고보자...."
해가 서쪽 산봉우리에 걸치고 나서야 소문은 방으로 들어왔다. 할아버지는천천히방으
로 들어오는 소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예 와서 앉거라...."
'어라...갑자기 무게를....'
소문이 미적거리며 자리에 앉자 할아버지는 말을 시작했다.
"그래....너도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네 길은 네가 가는 것이지...그게 어떤길이되더
라도 이제 상관을 하진 않으마.....허나...그 이전에 네가 반드시 해야 할일이있다."
"....?"
소문이 그게 머냐는 듯 할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손이 귀하다. 내 서른이 다 되어서야 겨우 네 아비를얻을수 있
었다. 다행히 네 아비는 일찍 너를 낳았지만 더 이상의 후손은 없다. 내 이제는네가하
는 일에 왈가왈부하지 않으마...그러나...그것은 네가 가문을 이어갈 후손을얻은이후
가 될 것이다"
'이게 뭔소리여....후손이라니...'
소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서야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린지감이왔다.
"지금 저보고 혼인을 하라는 말입니까? 혹시...?"
"옳게 봤다. 네 나이가 벌써 스물을 넘었으니 오히려 늦은 감이 있느니......"
"하지만 저는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았습니다...물론 그런 마음도 없고요...."
"이유는 없다. 가문에 태어나 대를 잇지 못하는 것처럼 큰 죄악은 없다.게다가우리가
문은 손이 귀하니...하루라도 빨리 후손을 얻어야 할 것이다..."
소문은 당황했다. 할아버지의 말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너무 당연한말이었기에대꾸를
할 수 없었다.
소문이 여자에 대해 의식하게 된 것은 소문의 나이 정확하게 열 다섯 살때였다.약초
를 가지고 장씨 아저씨네 집에 갔다가 만난 귀순이...어렸을 적엔 몰랐지만제법크고 보
니 가슴도 봉긋하고 엉덩이도 토실 한 게 영 마음을 심난하게 만들었다.그때부터무려
반년동안 무공수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여자라는 화두에 매달렸지만 지금은다지난
일이었다. 혼인이라니...어림도 없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고...솔직히 이 산골엔 제 부인이 될 사람도없지않습
니까?...저 눈 높습니다...."
마을이라봐야 몇 가구 살지 않는 곳에 소문과 혼인을 올릴 수 있는 나이의여자애는거
의 없었다. 장씨 아저씨네 귀순이는 재작년 옆집의 덕호에게 시집을 갔고그나마남아
있는 계집애들은 혼처가 다 정해져 있었다. 실질적으로 마을엔 소문과 혼인을올릴수
있는 여자가 없었다. 결국 부인을 구할려면 마을 밖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인데영내키
지가 않았다.
"그건 염려 마라...네 혼처는 이미 정해져 있다."
"예? 정해졌다니요? 누구랑요?"
소문은 깜짝 놀라 급히 반문을 했다.
"네 신부 감은.... 이곳 사람이 아니다"
이곳 사람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옆이나 그 옆 마을의 누군가겠지..... 소문이막머리를
굴리기 시작할 때 들려온 할아버지의 말은 일순 소문의 사고를 정지시켜 버렸다.
"네 정혼자는 중원에 있다...."
"예?"
"네 정혼자는 중원에 있다니까..."
"헉....지금 중원이라 했습니까....?"
"그래...중원에 있다..."
황당한 것도 어느 정도가 있지...이 정도면 거의 미치고 환장 할 수준 아닌가...
"중원에 있는 여자가 뭣 땜에 저랑 혼인을 합니까...아니지...어떻게 제가중원여자와
혼인을 할 수 있다는 겁니까?"
소문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소문의 질문이 당연하다는듯고
개를 끄덕이곤 설명을 했다.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인가...중원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이곳, 장백산에들어와서약
초를 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약초를 구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길을잃고헤
매게 되었다. 특히나 그중 한사람은 다른 생활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풍토병에걸리고
말았다.
그들이 길을 찾던 중 우연히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바 나는 풍토병이 걸린이를치료해
주고 그들이 원하는 약초 또한 구해 주었다. 그들이 대가를 지불하려했지만지나가는
길손을 돕는 건 우리 나라의 고유 전통인 것...어찌 대가를 받을까...당연히거절을했
다.
왔던 이들 중 대부분이 돌아갔지만 풍토병에 걸린 사람은 아직 체력이회복되지않았
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이곳에 잠시 더 머물게 되었다. 그의아버지라는사람은
연배가 나와 비슷하여 우린 곧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네 아버지 또한나이가비슷
한 환자와 어울리게 되었고...그들이 돌아가게 되었을 때 서로가 아쉬운마음에서하나
의 약속을 하게 되었다"
'빌어먹을....안 들어도 뻔하다....'
여기까지 들은 소문은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계속해서들려오는
할아버지의 말은 그래도 혹시나 하는 소문을 천길 낭떠러지로 밀어 넣는결정타가되었
다.
".....그때가 네 나이 세 살이었고 그들의 딸이자 손녀는 갓 태어났다고했다.해서 네
가 장성하면 그 아이를 데려와 혼인을 시키고 두 가문의 인연을 이어가자고약조를한
것이다...어느덧 네가 장성을 했으니 그쪽에서도 네가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있을것이
다...."
"....................."
"알아들었느냐?"
"......................"
"알아들었느냐니까 ?
할아버지는 거듭해서 소문을 몰아 붙였다. 소문은 화가 치밀었다.
"아니 때가 어느 땐데.....부인될 사람 얼굴도 못보고 혼인을한단말입니까....혼인이
란 남녀가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하는 것인데...."
"조선시대다...."
한마디였다. 조선시대라는데 소문이 할 말이 무에가 있을까....그저꿀먹은벙어리요,..
자신의 처지만 한탄하는 도살장의 돼지인 것을...
"참...내 말을 안했구나...훗날 알았지만 그 사람들은 사천당가(四川唐家)당대가주와
소가주였더구나......사천당가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겠지...?
"......"
"이놈아...지난번 선조님들이 중원에 대해서 적어 놓은 책을 보라고하지않았느냐...."
"....."
할아버지는 대답을 못하고 있는 소문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쳐다보더니사천당가에대해
서 간단한 설명을 했다.
"사천당가는 말 그대로 중국의 사천성에 자리를 잡고 가문을 일으킨 당씨일가를말한
다. 암기와 용독술에 있어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그들을 일컬어 사천의 패자또는중
원의 오대세가라 하기도 하지...당가는 사위를 뽑을 때 데릴사위를 원칙으로하지만너
는 우리 을지가문의 후계자 아니더냐...게다가 여기는 조선이고,,,해서너에게만은그 원
칙에 예외를 두기로 했다....그러니 너는 하루라도 빨리 네 신부감을 데리고 와야할것
이다. 알았느냐?"
"........"
"알았느냐.!!!!"
"..............예.."
소문은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다른 이유라면 어찌어찌 하여 이 위기를탈출해보겠지
만 다른 것도 아니고 가문을 들먹이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중원으로 가기 전에 책을 보고 지형이나 지명을 숙지하도록 하여라"
할아버지는 염려가 된다는 듯이 말을 했지만 소문은 지금 볼 수도 들을 수도없는심리
적 공황에 빠져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엔 이처럼 좋은 날씨가 없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온도또
한 높지 않아 누구라도 좋아할 아주 쾌적한 날씨였다. 하지만 한사람소문은우거지상
을 하고는 짐을 꾸렸다. 간단한 옷가지와 약간의 엽전, 그리고 조사동에서얻은철궁을
어깨에 메는 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소문이 준비를 마치고 마당으로나가자할아버
지는 소문에게 몇 가지 당부의 말을 남겼다.
"사람들과 함부로 시비하지 말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무공을최대한자제하거라...그
리고 사천은 상당히 먼 지방이다. 말도 통하지 않는 네가 가기엔 무리가따를것인즉, 너
는 우선 의주로 가거라. 의주는 조선과 명나라를 잇는 관문과 같은 곳,이곳에는많
은 중원인 들이 항상 상주하고 있으니 이들에게 중원의 말과 풍습을익히도록하여라.
그런 연후에 본격적으로 길을 떠나야 착오가 덜고 고생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소문이 할아버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할 때 할아버지는 한권의 비급과반으로잘린
옥패를 소문에게 건네주었다.
"이 책은 반야심경도해다. 이제 우리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니소림사에전해주도록 하
고, 이 옥패는 네가 당가의 사위임을 증명하는 신패가 될 것이니 잃어버리지않도록주
의하거라...반쪽은 당가에서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떠나거라.."
소문은 할아버지가 건네준 물건을 보따리에다 집어넣고 절을 했다. 웬수같은할아버지
였지만 떠나는 마당에 인사는 해야 할 듯 싶어서 공손히 절을 하고 천천히집을나섰다.
소문이 막 비탈길을 지나 고개를 넘어갈 때였다. 아쉬움으로 손자를보내던할아버지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기쁨에 겨워 있는 죽겠다는 입을 크게 벌리고웃는할아버지
가 서 있었다.
"케케케...이놈아...고생 좀 해보거라...그러 길래 에초에 잘했으면 내가이리고생하면
서 연극을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카카카...당가에가서 몰매나맞지말아라...헐헐헐..."
이런 할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문은 아주 느린 걸음으로 장백산을벗어나
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