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화
확인하기 위해서
노인은 찰나의 꿈처럼 사라지고, 나는 그가 남긴 말들을 곱씹는다. 계속해서 곱씹지만, 이해되지 않는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노인은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이 말을 했지만, 그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잘 알고 있는 건, 내가 아니다. 그럼에도 노인의 말이 거짓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확신에 가까운 그 이상한 기분 속에서, 노인이 떠나간 자리에 새겨진 글씨를 다시 바라봤다.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럽다면, 너의 눈으로 판단하거라.」
나의 눈으로 판단하라.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며, 오늘 내가 했던 행동들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을 나의 약혼자라고 소개한 여인의 말을, 다크엘프와 어울린 자라는 이유로 무시했다. 타락한 자라고 일축했다.
그 사실과 노인이 남긴 말이 뒤섞여, 한숨이 되어 흘러나왔다.
내가 실수를 한 것인가?
그 물음에 답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니, 노인의 말대로 나의 눈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 생각에, 왔던 길을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적막한 숲을 걷고 있으니, 나를 인도해주었던 작은 빛이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다시 찾아온 빛은 나의 주위를 맴돌고, 다시 나의 앞길을 인도해 주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빛을 따라갔다.
빛을 따라가니, 빠져나왔던 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 건물이 보이자, 빛은 나의 주위를 잠시 맴돌다가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날아가는 빛을 보며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건물에 들어오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흐느끼는 소리에, 슬픔과 아픔이 밀려왔다.
또다시 밀려오는 이유 모를 감정과 아픔을 느끼며, 흐느낌이 들려오는 문틈 너머를 바라봤다.
피가 떨어진 바닥 앞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여인과 그런 여인을 다독이고 있는 다크엘프가 보였다.
“자매님, 형제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도망치기는 하셨지만, 증표가 없으면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해요. 그리고 위협이 될만한 존재도 없어요.”
다크엘프의 말에도, 여인의 흐느낌은 멈추지 않았다.
형제님이라면, 나를 칭했던 말인데. 저 여인은 내가 사라진 것 때문에, 저렇게 구슬프게 흐느끼고 있는 것인가? 저 여인에게 내가 무슨 의미였기에 저러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여인의 감정에, 혼란스러움이 밀려왔다.
“그런 이유가 아니다.”
물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여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면 왜 그러시는 거예요?”
“또 나 때문에 그가 다쳤다.”
“이게 왜 자매님 잘못이에요? 형제님이 멋대로 오해하신 거잖아요.”
여인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잘 설명하지 못해서, 그가 오해한 거다. 내가 조금 더 잘 설명하고, 진득하게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내 잘못이다.”
“에휴. 그렇게 따지면, 제 잘못이죠. 제가 기절시켜서, 진득하게 이야기하지 못한 거잖아요.”
여인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널 말리지 못했으니, 내 잘못이다.”
“자매님, 그렇게 전부 자기 잘못으로 몰아가는 것도 병이에요.”
“하지만, 전부 사실인 것을 어떡하느냐.”
여인의 말에, 다크엘프는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으으. 대체 형제님은 왜 도망쳐서, 일이 이렇게 만든 거냐고! 대사제님이라도 계셨으면 금방 찾았을 텐데. 왜 이럴 때 자리를 비우셔서.”
답답함이 담긴 말이 흩어지고, 다크엘프는 여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자매님, 울고 있는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잖아요. 일단 찾으러 가요.”
다크엘프의 말에, 여인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들의 눈이 이쪽으로 향했다.
그들과 시선이 마주치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여인이 깨트렸다.
“알릭!”
여인은 나의 이름을 부르며, 나에게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다. 여인의 우악스러운 힘이 나를 감싸고, 가슴팍에는 차가운 감각이 느껴졌다.
“미안하네. 미안하네. 내가 그대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서, 그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네. 정말 미안하네.”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여인의 횡설수설한 말이 마음에 스며들어, 말에 담긴 감정이 전해졌다. 전해진 감정에 혼란스러움이 밀려오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있기에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제가 멋대로 생각하고, 멋대로 판단한 일입니다.”
“아닐세. 그대는 기억을 잃었으니, 그러게 행하는 것이 당연하네. 그런 그대를 내가 잘 설명했어야 했는데.”
가슴팍에 느껴지는 차가움이 진해졌다. 계속해서 진해지는 차가움에, 당혹스러워서 다크엘프를 쳐다봤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다크엘프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 말대로 기억을 잃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지금의 모든 상황이 당혹스럽습니다.”
“미안하네. 미안하네.”
여인은 젖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런 당혹스러움에 판단을 할 수 없어, 제가 아는 알량한 지식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래서, 당신들을 타락한 자들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다크엘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망쳤습니다. 그렇게 도망치던 중 한 노인을 만났습니다.”
다크엘프의 찡그려진 눈썹이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가고, 의아함이 스며들었다.
“그 노인은 이런 말씀을 해주셨죠. 타인에게 너의 짊을 맡기는 법을 배우거라. 그 말이, 저보다는 당신에게 더 필요해 보입니다.”
차가움을 흘려보내던 여인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나를 봤다.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기억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나를 위로해주는구나.”
여인의 목소리에서 진하게 담겨있던 슬픔이 옅어졌다.
“그 말을 해주신 분은 이런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죠.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럽다면, 너의 눈으로 판단하거라.”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던 다크엘프의 눈이 커졌다.
“그 말에 오늘 제 행동들이 기억나고, 그리고 저에게 물음을 던졌습니다. 내가 한 행동들이 실수였는가? 그 물음에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질문에 답을, 제 눈으로 찾기 위해서 돌아왔습니다.”
나의 말이 끝나고, 여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 그러면 나는 그대에게 답을 보여주어야 하겠군.”
“그렇습니다.”
여인은 나를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그대가 답을 찾는 동안 잘 부탁하겠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며, 여인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잊고 있던 따끔한 통증이 다시 느껴졌다. 그 통증에, 상처 난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여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의 손을 봤다.
“괜찮나?”
“이정도야 괜찮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피가 제법 많던데, 정말 괜찮은 것 맞나?”
“이미 다 지혈돼서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여인의 표정에 서린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자매님, 걱정하는 마음을 알겠지만, 계속 그러시면 형제님 입장에서는 피곤하실 거예요.”
“정말인가?”
직설적으로 답을 하고 싶지 않아, 침묵을 선택했다.
여인은 침묵의 의미를 이해하고,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네.”
“자매님, 미안하단 말도 금지에요.”
다크엘프는 그렇게 말하며, 여인의 입을 막았다. 여인의 입을 막은 다크엘프는 나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매님의 행동이 부담스럽기는 하겠지만 이해해주세요. 누구 씨가 너무 오랫동안 쓰러져 있던 바람에 생긴 증상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비꼬는 듯한 느낌이 서려 있어, 누구 씨가 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군. 그렇다면 이해해보겠네.”
“기억을 잃어도, 형제님은 여전히 착해서 편하네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보니 제 소개를 안 했네요. 저는 레이첼이고 나이는 비밀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나도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을 잡자, 우악스러운 힘이 느껴지며 통증이 밀려왔다.
“형제님이 오늘 한 행동들이 실수였는지 확인하러 오셨다고 하셨죠?”
“그렇네.”
“제가 반드시 실수였다는 걸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타락한 자라고 했던 말, 반드시 사과받을 거예요.”
“알,알겠네.”
다크엘프의 미소와 말에서 전해져 오는 음습한 기세에, 소름이 돋았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편하게 물어보게.”
“그 이야기하신 노인분을 어디서 보신 거예요?”
“꽃밭에 둘러싸인 비석이 있는 곳에서 봤네.”
“그렇군요.”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노려봤다. 그렇게 나를 보다가, 그녀의 눈길이 허리춤에 있는 검으로 향했다.
“그리고 보니 못 보던 검도 생기셨네요.”
“아까 말한 곳에 꽂혀 있던 검인데, 노인이 주셨네.”
“정말요?”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렇네.”
그녀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설마? 에이, 설마 그러겠어.”
“왜 그러는가?”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다시 돌아오신 거 환영해요!”
“나도 진심으로 환영하네.”
“고맙습니다.”
“이제 형제님도 돌아오셨으니, 슬슬 떠날까요?”
“그러는 게 좋겠군.”
둘의 말에, 의문이 들어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북부에서 가져와야 할 것이 있어서, 일단 영지로 돌아갈 생각이네.”
영지라는 말에, 잠시 잊고 있던 여인의 성이 떠올랐다. 그 사실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말씀 하시는 영지가 브란트 공작령입니까?”
“당연한 말을 하는군. 아, 혹시 내가 성을 빼먹고 이름만 밝혔었나?”
“아닙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물어본 것입니다.”
“그렇군.”
그렇게 말하는 여인. 아니, 브란트 공녀님의 뒤에서 후광이 보였다.
“그 혹시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대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겠네.”
그 말에, 두근거리는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브란트 공작님을 뵙고 싶습니다!”
“아버님을?”
“네!”
브란트 공녀님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나를 쳐다보셨다.
“상관은 없네만, 갑자기 왜 그런 부탁을 하는가?”
“평소에 공작님을 동경하고 있어서 부탁드린 겁니다.”
“그렇군...”
브란트 공녀님은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대가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중에 말해주겠네.”
“알겠습니다.”
동경하던 기사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쁜 마음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팀플 활동 때문에 늦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tmi) 주인공이 공작을 대면하기 전까지는, 공작을 가장 동경했습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