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화
노인과 옛날 이야기
“아직도 미숙하구나.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해할 수 없는 노인의 말이, 어째서인지 마음에 깊게 스며들었다.
“정신에 손상이 갔을 때, 그 빈자리에 영혼에 새겨진 것들이 흘러들어올 것을 예상했어야 했는데. 내가 부족해서 또 너를 아프게 만들었구나.”
노인의 씁쓸함이 담긴 그 말을 부정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이유는 모른다. 그저 그러고 싶다. 그래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르신이 누구신지 모르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짊어진 걸 대신 책임지지 마십시오.”
그것이 나의 마음인가. 아니면 흘러들어온 감정인가. 모르겠다. 너무 뒤섞여서 구분할 수 없다.
“다른 삶을 얻고, 다른 모습을 얻어도 너는 변함없이 올곧구나.”
노인의 여러 감정이 담긴 말에, 슬픔, 그리움, 죄송함, 따스함이 뒤엉켜서 나를 적신다. 그것들에 적셔지고, 나의 눈에서 이유 모를 눈물이 흘러내렸다.
“올곧은 마음에 비해, 눈물이 많은 것 또한 변하지 않았구나.”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나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손길이 따스하며, 그리웠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일들이 생각나는구나. 잠시만 이 늙은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나?”
“경청하겠습니다.”
노인의 미소가 엷게 피어났다.
“고맙구나. 그럼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그래, 거기서부터가 좋겠구나.”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로 땅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바람이 불어오며, 빛무리가 우리를 감쌌다.
“오래 세월을 살아가며, 모든 열정과 의욕을 잃고 지독한 실의에 빠져 있었지. 그런 덧없는 날 한 소년을 보았네.”
빛무리가 흩어지고, 앳된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소년은 부랑자들로 보이는 자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었다. 들고 있던 빵을 다 나누어주고, 빈 봉투를 들고 돌아가는 소년의 배에서 굶주린 소리가 울렸다. 배의 아우성에도 소년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진 것을 모두 베푸는 바보 같은 놈이었지. 그런 행동이 바보 같아서, 지켜보았네.”
소년의 올곧은 행위들이 스쳐 지나가며, 소년은 성장하여 청년이 되었다. 청년이 된 모습이 나오고, 마을을 둘러싼 몬스터 무리와 뼈로 이루어진 골렘이 보였다.
“태어나서는 안 될 자가, 세상에 장난을 친 날. 그 장난이 자네가 사는 곳에도 닿았지.”
뼈로 이루어진 골렘의 입에서, 듣기 싫을 정도로 찢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명을 제물로 바치면, 나머지 사람은 살려주마.」
그 말에,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저 말에 속으면 안 된다는 외침과 어차피 싸우면 다 죽는데, 한번 속아보자는 외침이 뒤엉켰다.
그렇게 마을이 시끄러워졌을 때, 소년에게 도움을 받았던 자가, 청년이 된 소년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나서주면 안 되겠나? 자네 한 명이면 모두 살 수 있네.”
그 말에, 마을에 잠시 정적이 찾아오고 다시 시끄러워졌다.
그렇게 도움을 받고도 양심이 있냐는 비난의 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입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추악함을 담은 눈빛으로 청년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모이고, 청년의 등을 떠밀었다.
청년은 그런 그들의 눈빛에,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저분은 제 고민을 덜어주셨을 뿐이에요.”
그 말에, 사람들은 걱정의 말을 보냈지만, 그를 대신하여 나서는 자는 없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그러기를 바라던 사람들처럼 눈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역겹게 느껴졌다.
“다시 봐도 역겹구나. 저런 역겨운 모습들 때문에, 세상에 가치를 두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 것이지.”
노기가 다분히 담긴 노인의 말이 흩어지고, 골렘 앞으로 가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네가 제물인가?」
“그렇습니다.”
「그래, 네놈들의 의사는 잘 전달되었다.」
골렘의 찢어지는 음성이 끝이 나고, 골렘의 손이 몸에서 분리되어 마을을 향해 날아갔다. 날아간 팔이 귀를 울리는 소음과 함께 터져나가며, 피가 하늘을 물들였다.
「식사 시간이다.」
골렘의 말이 끝나고, 몬스터들이 마을을 덮쳤다. 청년은 아비규환이 벌어지고 있는 마을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째서, 어째서 이러는 겁니까! 제물까지 받쳤는데.”
「그저 즐거움을 위해서다.」
골렘의 목소리는 아까와 다르게 찢어지는 불쾌한 목소리가 아닌, 웃음이 섞인 여인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청년의 얼굴에 절망감이 드리웠고, 골렘에 달린 붉은 눈은 그 절망감을 음미하듯이 바라봤다.
마을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끊어지고, 골렘과 몬스터들이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청년은 아무도 남지 않은 마을을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역겨운 자들을 위해 희생하겠다며 자처하고, 그들의 죽음을 보며 아파했지. 그 모습이 거슬리고, 신경 쓰였네.”
울고 있는 청년의 앞에, 푸른 빛의 두른 젊은 남성이 나타났다.
“왜 울고 있는가?”
청년은 쏟아지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며, 입을 열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한순간 다행이라고 생각한 제가 혐오스러워서 울고 있습니다.”
“사람이면 당연한 일이다.”
“당연하지 않습니다. 당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 하나뿐일 거다.”
“그래도, 제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계속 자기혐오를 달고 살 거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남자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년이 네 인성을 쥐꼬리만큼이라도 닮았으면, 이런 사단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냥 의미 없는 한탄이다. 신경 쓰지 말거라.”
“어떻게 신경 쓰지 말라는 겁니까!”
청년은 그렇게 소리치며, 떠나려는 남성을 붙잡았다.
“그 여자가 누군지 알려주십시오.”
“알아서 무엇하게?”
“앞으로도 이런 일들을 벌인다면 말릴 겁니다.”
그 말에 남성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남성은 한참을 웃고, 입을 열었다.
“말린다고 말려졌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잘못 태어난 재앙이다.”
“그래도 할 겁니다. 모든 방법을 써서 말릴 겁니다.”
“네 모든 걸 희생한다고 하여도?”
어느덧 눈물이 멎은 청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나를 따라와라.”
남성은 그렇게 말하며,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었다. 청년은 그 손을 잡고, 풍경이 흩어졌다.
“그런 소년을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느냐?”
“모릅니다.”
“심심풀이 정도는 되겠다고 생각했네.”
노인의 목소리에 짙은 자책과 후회가 서려 있었다.
“그 생각은 틀렸더군. 심심풀이가 아니라, 내 삶을 통째로 바꾸어놨네.”
부단히 수련을 하는 청년의 모습과 다그치는 남성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 장면들이 스쳐 지나갈수록 무표정한 남성의 얼굴에 웃음이 짙어졌다.
“그 녀석의 바보 같은 마음이 지독할 정도로 올곧아서, 실의에 빠진 나에게도 스며들더군, 덕분에 질척한 실의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네.”
빠르게 스쳐 지나간 장면이 멈추고, 흉터투성이가 된 청년이 보였다. 그 청년은 투박한 검 한 자루를 들고, 몬스터들을 베어내며 사람들을 지켜냈다.
청년에게 지켜진 사람들은 감사를 전했고, 청년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 말과 함께 장면이 흩어지고, 청년과 남성이 다시 나타났다. 청년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남성에게 감사를 표했다.
“스승님 덕분에 삶의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네 올곧은 마음이 결실을 맺은 것뿐이다.”
“그래도 스승님이 이끌어주신 것은 변함없습니다.”
“그놈 참, 사람 낯 뜨겁게 만드는구만.”
남성은 그렇게 말하지만, 얼굴에 미소가 퍼져나갔다.
“스승님. 이제 결실도 맺었는데, 약속대로 존함을 알려주실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약속도 했었지.”
“그렇습니다.”
“그래, 약속했으니 말해주어야겠지. 카이안 그것이 나의 이름이다.”
카이안. 처음 듣는 이름임에도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이 든다.
그런 느낌을 받으며 그 이름을 곱씹고 있으니. 풍경이 흩어지고, 원래의 꽃밭으로 돌아왔다.
“내가 이 이야기를 왜 너에게 들려주었는지 아느냐?”
노인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지. 그럼 다른 질문을 하마. 너는 그자들의 끝이 어땠을 거 같나?”
노인의 질문에, 그들의 모습을 생각했다. 지독한 올곧음으로 자기혐오에 빠졌다가, 사람들을 구함으로써 웃음을 되찾은 청년. 그런 청년을 가르치며 웃음이 많아진 남성, 그 모습에, 대답을 결정하였다.
“행복하게 살았을 거 같습니다.”
노인은 어딘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둘 다 불행하게 살았다.”
“어째서 그런 것입니까?”
“둘 다 미숙해서 그렇게 되었다. 청년은 자신을 위한 일에 미숙하고, 남성은 남을 위한다는 것에 미숙했다. 그것이 불행을 낳았다.”
노인은 쓸쓸함이 짙게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게 내가 이 이야기를 한 이유다. 너는 무슨 삶을 살든, 너를 위해서 살거라. 그것이 힘들다면, 타인에게 너의 짊을 맡기는 법을 배우거라.”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비석 근처에 꽂혀있는 녹슨 검을 뽑았다. 노인의 손에서 푸른 기운이 검으로 전해지고, 녹이 사라졌다. 녹이 사라진 검은 투박하면서도, 푸른 예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 검의 모습에 마음이 이끌렸다.
그 검을 들고 있는 노인은 지팡이로 땅을 두드렸다. 지팡이가 닿은 땅이 움직이며, 나무뿌리가 올라왔다. 올라온 나무뿌리가 검을 감싸고, 검집의 형상이 되었다.
노인은 그 검을 나에게 내밀었다.
“자네의 것일세.”
나는 검을 조심스럽게 받아들고, 잠시 검에 눈길을 빼앗겼다. 검에 잠깐 홀려버린 정신이 돌아오고, 노인에게 감사를 전하기 위해서 고개를 들었을 때,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노인이 있던 자리에 글자가 쓰여 있을 뿐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럽다면, 너의 눈으로 판단하거라.」
갑작스럽게 나타나고 바람처럼 소리 없이 사라진 자의 떠나간 자리를 보며, 그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