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화
꽃밭과 비석
목에서 느껴지는 시큰한 통증과 함께, 눈이 떠졌다. 방금 눈을 떠 얼빠진 정신은, 푸른빛이 맴도는 방을 멍하니 눈에 담고 나서야 돌아오기 시작했다. 정신이 돌아오고, 의식이 끊어지기 전의 상황이 기억났다.
분명 타락한 자들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다크엘프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통증과 함께 의식이 끊어졌었다.
너무나 손쉽게 당했던 기억에, 입안이 쓰라려 온다. 쓰라린 입맛을 느끼며, 지금의 상황을 확인했다.
대치하고 있던 그들은 보이지 않고, 들고 있던 단검이 사라졌다. 그리고 손은 굵은 넝쿨로 묶여 있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다행이지만, 언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 그들이 오기 전에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 다시 마주하면, 도망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져, 방해되는 넝쿨을 끊어내기 위해서 힘을 주었다. 내 기억보다 강인한 육신에서 넘치는 힘이 느껴졌지만, 그 넝쿨을 끊을 수 없었다. 오히려 묶여있는 손목에 쓰라린 통증이 느껴졌다.
그렇게 넝쿨을 끊는 것을 실패하고, 넝쿨을 끊어내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찾기 위해서 방을 다시 확인했지만, 거울과 침대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황량한 방에서 거울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을 하였다.
거울을 깨고 파편을 사용하면 끊어낼 수 있겠지만, 소리가 새어 나갈 것이 뻔하다. 두꺼운 모포라도 있으면, 소리를 줄일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해도, 두꺼운 모포는커녕 얇은 이불조차 없다. 그 상황에 고심하고 있을 때,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아까 눈을 뜬 곳으로 급하게 이동하고, 눈을 감았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 깨어났군.”
“이상하네요. 분명 지금쯤이면 깨어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뭐가 있나?”
“제가 한두 번 해본게 아니라서, 언제쯤 일어날지 알거든요.”
다크엘프의 말에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옛날에 야만인들이 성지 근처까지 범위를 넓히려 했던 시절이 있어요. 그때 경고 차원의 의미로, 근처에 다가오는 족족 다 이렇게 기절시켰거든요. 덕분에 질리도록 해봤어요”
“그렇군. 그런데 그 옛날이 언제인가?”
“한 삼십 년? 아마 그쯤 됐을 거예요.”
“너무 오래돼서 감을 잃은 거 아닌가?”
“그런 걸까요? 그래도 삼십 년이면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닌데요.”
“삼십 년 전이면, 난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래요? 자매님 완전 애기네요. 애기 자매님.”
“장생종의 시간 감각은 이해할 수 없군.”
약간의 짜증이 섞인 말을 끝으로, 대화가 끊어지고 나에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만이 들렸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이 커져, 심장이 격하게 뛰고 호흡을 자연스럽게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억지로 가다듬으며, 그들에게 들키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그렇게 기도하고 있을 때, 목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다행히 멍들지는 않을 거 같군.”
온기가 떨어져 나간다.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신경 써서 했으니 당연하죠.”
“그런 것 치고는 타격 소리가 컸다만.”
“착각이에요. 제가 형제님을 기절시킬 때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데요.”
“그런 것 치고는 후련한 표정이었다만.”
“아,아니에요. 그것보다 형제님 너무 안 일어나시는데요.”
“확실히 너무 안 일어나기는 하는군. 혹시 정신 쪽 문제 때문에...”
목소리에 침울함이 섞이며, 말이 끊어졌다.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표정은 짓지 마세요.”
“그래도...”
“정 걱정되시면 대장로님께 상태를 봐달라고 부탁하면 되죠.”
“그게 좋겠구나. 대장로님은 지금 어디 계신지 아는가?”
“지금쯤이면 아마 정원을 가꾸고 있으실 거예요.”
“안내해 줄 수 있겠나?”
“그럼요.”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이 멀어져 가는 소리가 들리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눈을 뜨고, 긴장감을 토해냈다.
긴장감을 토해내고 나니, ‘형제님’이라는 나를 칭하는 듯한 호칭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맴도는 호칭이 너무 익숙하며, 정겨운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형제님이라. 내가 그들과 정말 친한 사이였던 것인가? 내가 타락한 자들과 어울렸단 말인가? 아닐 거다. 아니여야 한다. 아무리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여도, 올곧은 삶을 살겠다는 신념을 버렸을 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를 억지로 밀어냈다. 그것을 밀어내고, 거울을 부술 생각으로 손을 뻗었다.
손이 거울에 닿자, 거울에서 흐릿한 푸른 빛을 머금더니, 거울이 조각이 되어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 상황에 당혹감이 밀려왔다. 밀려오는 당혹감에 잠시 넋을 놓았다가,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넋을 붙들었다.
당혹감을 밀어내고, 날카로운 유리 파편을 주워 억센 넝쿨을 끊어냈다. 억센 넝쿨을 끊어내고 손의 자유를 찾고 나니, 유리 파편을 쥐고 있던 손에서 따끔한 고통과 함께 피가 제법 흘러나왔다.
옷의 끄트머리를 찢어, 제법 베여나간 살가죽을 감싸고 문틈 사이를 유심히 바라봤다. 벽에 책이 가득 채워져 있는 공간이 눈에 들어오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 사실에 안심되면서도,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어 조심스럽게 방에서 나왔다. 그렇게 방에서 나오고, 느끼지 못한 인기척이 있는지를 신경 쓰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 줌의 인기척마저 느껴지지 않는 건물에서 빠져나오고, 커다란 나무들이 빼곡히 자리해 있는 숲으로 향했다.
지리도 모르는 상태로 숲에 들어가는 것은, 방향감을 상실하고 헤맬 수 있는 위험이 있지만, 다시 타락한 자들에게 잡히는 것보다는 낫다. 그리고 태양의 방향을 보고, 한 방향으로 걷다 보면 언젠가는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태양을 올려다봤지만, 태양이 보이지 않는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해서, 태양이 가려진 게 아니다. 그냥 태양이 없다. 하늘은 그저 푸르고,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어둡지 않다.
그 사실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다크엘프들이 사특한 주술을 쓴다고는 들었는데, 이미 주술에 홀린 것인가? 아니면, 세상에서 분리된 공간인가?
그 의문들에 답을 알 수 없다. 그저 생각한 것보다 위험한 상황이라는 사실만을 알 수 있다.
돌아가면 타락한 자들에게 잡힐 것이고, 그대로 숲에 들어가면 헤맬 가능성이 높다. 헤매는 것을 방지하고자 흔적을 남기려고 해도, 추격의 단서가 될 것이니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입안에 쓴맛이 느껴졌다. 그 쓴맛을 느끼며, 고심하고 있을 때 반딧불 같은 작은 빛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 빛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나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 모습에 책에서 보았던 숲의 요정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숲의 요정들은 여러 종류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경계심이 강한 존재다. 그런 존재들이 그대들에게 다가왔다면, 특별한 이끌림에 호의를 품은 것이거나, 장난을 좋아하는 악동일 것이다. 호의를 품은 요정이라면, 그대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고, 장난을 좋아하는 요정이라면 숲을 헤매게 할 것이네.」
책의 내용을 떠올리고 있을 때, 빛이 한 방향으로 천천히 날아갔다. 그 모습이 나를 인도하고자 하는 모습에, 잠시 고민을 했다.
고민을 해보아도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행운이 따라주기를 바라며 그 빛을 따라갔다.
그 빛의 뒤를 따라갈수록, 숲의 풍경이 변해갔다. 빼곡한 나무들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으며, 나무보다 풀과 꽃의 비율이 높아졌다. 그리고, 아까까지만 해도 적막했던 숲에 새와 벌레들의 울음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어째서인지 조금 구슬프게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을 때, 다양한 색상의 꽃들이 화사하게 피 꽃밭이 눈에 들어왔다. 그 꽃밭은 중앙에 있는 두 비석과 녹슨 검을 둘러싸듯이 피어 있었다.
그 광경에 이해하지 못할 이끌림이 느껴져,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발은 비석의 앞에 멈추고, 손은 비석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오래된 듯한 비석에 얼마 묻지 않은 먼지를 털어내자, 마음에 무겁고 진득한 감정들이 밀려왔다. 무겁고 진득한 감정이 나의 마음에 퍼져나가고, 그 색에 물들었다. 무겁고 구슬픈 색채에 물든 마음에, 아픔이 느껴졌다.
아픔의 이유는 모른다. 그저 파도가 밀려오듯이 아픔이 밀려왔다. 밀려오는 아픔이 낯설지 않다. 마치 나의 것처럼 익숙하다.
그런 익숙한 아픔을 전해주는 비석을 바라보았다. 투박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비앙카」 「이비」
두 비석에 적힌 글씨는 그것이 끝이었다. 겨우 그것이 다다. 겨우... 그것이... 전부다.
비석에서 밀려오는 감정과 아픔이 더 무겁고 짙어지고, 그것이 나를 익사시킬 듯이 집어삼켰다.
세상이 감정의 색채에 물들어간다.
나의 색채가 묽어진다.
나의 색채가 다 빠져나갈 때쯤, 푸른 빛이 나를 감쌌다.
“그만하거라. 생애의 절반을 울면서 살았으면서도, 아직도 부족하느냐?”
그리우면서 단호한 목소리와 나를 감싼 빛이 세상을 물들이는 색채를 날려 주었다.
밀려오는 감정에 질식되어 죽어가던 마음이 호흡을 되찾고, 이성이 돌아왔다. 돌아온 이성은,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게 하였다.
백발에 흰 수염을 기른 인자한 노인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미숙하구나.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음 편은 써지는 데로 바로 올리겠습니다. 아마 12시 넘어서, 늦게 올라갈 겁니다.
정태양님 4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