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화
낯선 방과 낯선 여인
기억나지 않는 꿈이 흩어지고, 몽롱한 시야가 펼쳐졌다. 몽롱한 시야에 푸른빛이 맴도는 낯선 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에 잠이 덜 깼나 싶어,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가 뜨는 걸 반복했지만 그 낯선 풍경은 흩어지지 않았다.
“무슨...”
내 기억보다 굵은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와 눈 앞에 펼쳐진 낯선 풍경 때문에 혼란스럽다.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기억보다 더 심하게 굳은살이 박힌 커다란 손. 그 손이 혼란함을 가중시키고, 꿈이 남긴 몽롱함을 지웠다.
몽롱함이 사라지자, 온몸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높은 시야와 무거운 몸. 그리고 온몸에 느껴지는 욱신거림.
그 이질적인 감각들이 나를 둘러싸고, 이 상황을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받아들이지 못한 머리는 현실을 부정했다.
“조금 이상한 꿈이네.”
지금 상황을 그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등불 대신 방을 밝히고 있는 푸른 빛무리. 내가 누워있던 검푸른 침대. 침대 옆에 놓인 검은색 단검 두 자루. 그리고 푸른 빛을 머금은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빛무리 때문에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방에서, 거울이 유독 눈에 띄어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푸른 빛을 머금은 거울 앞에 섰을 때, 키와 덩치가 조금 더 커진 내가 보였다.
그 모습에, 머릿속에 생각들이 범람하며 머리가 복잡해졌다. 복잡해진 머리는 편해지고자 꿈이라고 주장했지만, 방금 꼬집은 볼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통증이 그것을 부정하였다.
꿈이라는 생각이 부정당하고,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부족한 머리로는 한치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불안감에, 침대 옆에 있던 단검으로 눈길이 향했다.
단검. 멋없고, 기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용하지 않은 무기. 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기에, 단검 두 자루를 들었다.
짧은 손잡이 부분이 거슬린다. 그러면서도 그 단검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상반된 감각과 생각이 뒤엉키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났구나. 어디 아픈 곳은 없나? 아니면, 이상한 느낌 같은 건 없는가?”
하늘을 담은 듯한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진 여인이, 걱정이 잔뜩 담긴 말을 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 낯선 여인을 보고 있으니, 친숙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불길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레이첼의 단검은 왜 들고 있는가?”
레이첼. 처음 들음에도 낯익은 듯한 이름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 기이한 느낌에, 그 이름을 곱씹고 있으니, 눈앞에 있는 여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 말을 하기 힘들 정도로 힘드나?”
그 여인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고, 나를 알고 있는 듯한 여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저를 아십니까?”
“... 내가 기억나지 않는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하니, 여인의 표정에 씁쓸함이 담겼다.
“그렇군. 기억 쪽인가 보군.”
여인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나이를 물어도 되겠나?”
여인의 의미 모를 질문에 의아함이 들지만, 대답하지 않을 이유는 없기에 입을 열었다.
“17번째 봄을 맞이했습니다.”
“내가 모르는 시절이군.”
여인은 한탄하듯이 말했다.
“지금의 그대에게는 첫 만남일 테니, 정식으로 인사하겠네.”
여인은 그렇게 말하며,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며 귀족식 예를 표하였다.
“나는 아이리스 브란트. 그대의 약혼자일세.”
여인의 말에, 머리가 혼란해졌다. 아이리스 브란트. 제국 제일의 검의 딸이자, 눈부신 재능을 타고나 이명을 하사받은 여인.
그런 대단한 여인이 어째서, 나의 약혼자라고 소개하는가. 장난인가?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인상착의가 소문의 그녀와 너무 똑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혼란스러움에 잠겨 있을 때,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혼란스럽고, 나의 말도 의심스럽겠지. 하지만, 나는 그대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았네. 그리고 앞으로 할 이야기들도 거짓이 아니네. 그러니 조금만 더 들어주게.”
진지함이 서린 여인의 눈동자가 그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힘이 실린 말에,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혼란스러움이 덩치를 불리며 나를 야금야금 집어삼켰다.
“여기까지가 내가 본 그대의 삶이네.”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킨 그녀의 이야기가 끝이 나고, 그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결혼. 저주. 회귀. 시련.
무엇하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특출난 점이 없는 가문의 삼남과 제국에서 손꼽히는 가문의 후계자와 결혼? 허언이 심한 자들도 안 할 이야기다.
마녀의 저주. 시전자가 죽은 저주가 어떻게 이어져 내려온다는 말인가? 동화에서도 안 나올 이야기다.
회귀. 사람의 삶을 갈구하는 이유가 한 번뿐인 기회이기에 집착하는 것이거늘. 어찌 또 기회가 주어진단 말인가.
시련. 내가 눈앞에 있는 여인을 사랑하여, 목숨을 등한시하였다고? 말이 안 된다. 눈앞에 있는 여인이 아름답고, 동경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사랑은커녕 호감 간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그저 이유 모를 불길함만이 느껴질 뿐.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 생각을 부정하는 듯한 감각들이 신경 쓰인다. 처음 듣는 이름이 낯설지 않고 낯익다, 그리고 처음 보는 여인에게 친숙함이 느껴진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와, 그 기묘한 감각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때, 그녀의 입이 열렸다.
“믿어지지 않겠지. 내가 그대의 입장이었어도 그럴걸세. 그러니 믿어달라고는 하지 않겠네. 하지만, 내게 기회를 다오.”
그녀의 곧은 목소리와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자꾸만 나의 마음을 찔러온다, 그 불길함이 그녀의 무게를 흐트러트렸다.
그런 혼란함 속에서 마음을 정하기 위해, 단검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검을 들어주십시오. 그것으로 마음을 정하겠습니다.”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전사들 사이에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필요 없지. 내가 그대의 본질을 잊고 있었구나.”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은 여인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예기가 서린 철이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대는 그 검으로 괜찮겠나? 그대가 단검을 사용한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그저 확인을 위한 것이니 괜찮습니다.”
그 말에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모습에, 선수를 양보하는 여인의 의사가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낯선 검을 휘둘렀다.
두 개의 사선을 그려내며 여인을 덮쳤다.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여인이 검이 올곧은 선을 그려내며, 청명한 철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그 소리가 귀에 닿을 때 내가 그려낸 선이 사라지고, 여인의 검이 나의 얼굴 옆에 도달하였다.
“이게 내 마음일세. 충분한가?”
여인은 올곧은 눈으로 그렇게 말하였지만, 나는 검으로 마음을 확인한다는 의미를 모른다. 그저 동경하던 자의 검을 보고 싶었다. 그 마음 하나로 나의 앞날을 정할 기회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나의 부족함으로 여인의 검을 제대로 견식 하지 못했지만, 찰나의 스쳐 지나가듯이 보인 아름다운 선을 보았으니 만족한다. 그리고 앞으로 볼 기회가 더 있을 것이니까, 그때 제대로 견식 하면 된다.
“충분합니다. 잠깐만 그 이야기에 속아보겠습니다.”
“속아 주어서 고맙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왔다. 손을 뻗는 여인의 얼굴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 미소가 아름다워 심장이 요동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마음 한구석을 찌르는 불안감은 커져만 갔다.
그 불안감을 애써 무시하며, 뻗어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묘하게 그리운 느낌이 드는 온기가 나의 손에 퍼져나갔다.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나의 앞날이 정해졌을 때, 문밖에서 묘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매님, 형제님 상태는 어때요?”
그 목소리가 흩어지고, 문 쪽에서 한 여인이 보였다. 뾰족한 귀와 구릿빛 피부. 그것들이 그 여인의 종족을 알려주었다.
“다,다크엘프?”
타락한 종족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형제님 일어나셨네요. 그보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타락한 종족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그 광경에 여인의 손을 놓고 단검을 꽉 쥔 채 자세를 잡았다.
“다가오지 마라!”
타락한 종족의 얼굴에 의문이 스며들고, 여인을 쳐다보았다. 여인의 얼굴에 당혹감과 여러 감정들이 스며들었다.
“알릭이 기억을 잃었는데, 내가 너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안 해 주었구나.”
“기억을 잃어요? 어쩌다가요?”
“시련에서 일어난 일 때문일 거다. 대장로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맞을 거다.”
“그거 좀 큰일이네요.”
둘의 친근한 모습에, 여인에게 느꼈던 불길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둘 다 한통속이었구나. 내가 멍청했지. 잠깐이지만 이런 여인을 믿다니.”
타락한 종족과 한통속인 자를 한순간이라도 믿었던 나의 미숙함에, 입안이 쓰다.
“그래서, 이제부터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지? 고문하고 너희처럼 타락시킬 생각이냐? 아니면 산제물로 쓸 생각이냐? 무엇이 됐든 너희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두 괴물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스며들었다.
“자매님, 어디서부터 꼬였으면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걸까요?”
“음. 네 종족이 다크엘프인 것에서부터?”
“우리 종족이 어때서요? 음습하고, 세간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는 했지만, 그것 말고는 문제점 없거든요.”
“그게 문제다.”
나를 속인 여인이 한숨을 쉬고,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일단 진정하게. 내가 다 설명해주겠네.”
“시끄럽다! 나는 타락한 자의 말 따위 듣지 않는다.”
여인의 얼굴에 어둠이 자리를 잡았다.
“타락한 자라니... 죄가 크니, 틀린 말은 아니지.”
여인은 그렇게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타락한 종족은 그런 여인의 어깨를 토닥이며,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괴물들의 속삭임이 오가고, 불길함이 커졌다. 그 불길함이 나를 짓누를 때, 타락한 종족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목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tmi)17살의 주인공은 기사뽕이 심하게 차오른 사춘기 시절입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