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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55화 (55/59)

제 55화

노인

몽롱한 시야에 은은한 빛과 잠든 레이첼이 보인다.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조금씩 몽롱함이 흩어졌다.

몽롱함이 흩어지고, 레이첼의 집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그 사실이 기억나고,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 창밖을 봤다.

태양이 없는 하늘과 은은한 빛무리가 맴도는 세상은, 이곳에 왔을 때보다 조금 어둡다. 그 광경만으로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저 피로가 사라진 몸을 통해서, 시간이 제법 지났다고 추측했다.

그리 추측이, 조치가 끝났을 것이라는 생각을 들게 하였다. 그 생각이 드니, 그가 보고 싶다.

자고있는 레이첼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빠져나와 그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있으니, 작은 빛이 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 빛은 의지를 가진 것처럼 움직이며,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그 기이한 현상에 잠시 고민을 하다, 그 빛이 인도하려는 방향으로 걸음을 틀었다.

빛은 마을 변두리로 향했고, 작은 강이 흐르는 장소가 나왔다. 그 강 옆에 푸른 열매를 품은 거대한 나무가 있고, 그 나무 아래에 노인이 보였다.

나를 인도하던 빛은 노인에게 향해 날아가, 그의 손에 스며들었다.

“어서 오게. 할 말이 있어서 불렀네.”

그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허공에 손짓을 하였다. 그의 손짓에 반응하듯이, 나무의 뿌리들이 얽히며 의자와 탁자의 형태가 되었다.

“이리 와서 앉게.”

노인의 맞은편에 앉고, 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알릭의 상태부터 말해주겠네. 일이 잘 풀려서, 육체의 부상은 대부분 회복되었다네. 내일 정도면 깨어날 걸세.”

무거운 마음이 가벼워지며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

그 말에, 가벼워진 마음이 다시 무거워지고, 안도감이 불안감으로 변하였다.

“무슨 문제입니까?”

“정신 쪽에 문제가 생겼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인은 조금 어두운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네. 자네들이 받은 시련에서, 특이한 문양이 새겨진 단검이 나왔나?”

“네. 나왔습니다.”

그의 얼굴에 음영이 짙어졌다.

“그 검은 창조신님이 만드신 성물일세. 그 성물에 특별한 능력이 있네. 그 성물에 상처를 입으면,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이나 영혼에도 타격을 입네. 알릭은 그 검으로 자기를 도려내었을 걸세, 그러니 큰 문제지.”

그 말에 심장이 철령이며, 마음의 무게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영혼 쪽은 문제가 없지만, 정신 쪽은 심각하네.”

“심각하다면, 어떤 문제가 생기는 겁니까?”

“아마도 기억에 문제가 생기거나, 일부 감정들이 결여될 걸세. 정확한 건 그가 일어나야 알 수 있겠지만.”

그 말이 비수가 되어 나를 찔렀다. 비수가 나의 마음을 찌르고, 두 광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깨어난 그가 나를 못 알아보는 광경과 감정이 결여되어 웃음을 잃어버린 그.

그 광경들이 나의 마음을 도려내었다. 도려내진 마음에서 선명한 통증이 밀려오지만, 참아야 한다.

그의 삶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고통이다. 나의 죄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운 아픔이다.

그리 생각하며, 아픔을 눌러 담고 요동치는 감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를 치료할 수 있는 겁니까?”

“세계수의 열매를 먹이면 되네.”

세계수의 열매. 엘프들의 신목에서 열리는 열매이자, 만병통치약이라고 전해지는 보물.

역사 속의 수많은 황제와 왕들도 얻을 수 없었던 보물을 어찌 구하란 말인가.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작은 희망을 부쉈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용들의 심장이 있거나, 아르미스의 축복을 받거나 사도에게 치료를 받으면 됐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네.”

“용들이야 오래전에 자취를 감췄으니까 불가능하지만, 아르미스님 쪽은 어째서 불가능한 겁니까?”

노인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들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르미스교단이 마녀에게 넘어간 적이 있네.”

“그건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야기가 쉽겠군. 신은 생각보다 불완전한 존재라 무엇을 행하든 대가가 필요하네. 신들은 그 대가로 신앙을 소모하네. 반대로 말하면, 신들은 신앙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무능한 존재일세.”

저명한 신학자들도 모를 이야기가,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아르미스는 교단을 마녀에게 빼앗겨 오랫동안 신앙을 모으지 못했네. 지금이야 어느 정도 신앙이 모여서 사도를 임명한 것 같지만, 그조차 불완전한 사도일세.”

그의 말이 거슬리는 점이 있어서, 입을 열었다.

“지금의 사도가 어째서 불완전하다는 겁니까?”

“자네들도 사도를 만나봐서 알겠지만, 그 사도는 장님일세.”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아르미스의 가장 큰 권능은 치료일세. 그 권능은 선천적으로 없는 신체 부위도 만들어낼 정도로 강력한 권능일세. 그런 신의 사도가 장님이니, 불완전한 사도인걸세.”

국교의 처량한 현실을 들으니, 입안이 썼다.

“정신이나 영혼을 치료하는 건, 육신을 치료하는 것보다 어렵네. 사도조차 온전히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정신을 치료해 주겠나. 그러니, 세계수의 열매 말고는 방법이 없네.”

쐐기를 박는 그 말에, 눈앞이 어두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이 늙은이가 도움을 줄 수 있으니.”

그는 그렇게 말하며 푸른 열매를 품은 나무에 손을 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이 끝나고, 나무에 푸른 빛이 스며들었다. 나무가 머금은 빛이 나뭇가지 하나에 집중되고, 그 가지가 그의 손으로 떨어졌다.

그는 그 나뭇가지를 내밀었다.

“고지식한 엘프놈들은 자네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겠지만, 이걸 보여주면 자네들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을 거네.”

어둠으로 가려진 막막한 길을 열어주는 그 호의가 너무나 눈부셨다. 그 눈부신 호의에 검을 들어 예를 표했다.

“이 은혜 반드시 갚겠습니다.”

“은혜라. 그 말은 틀렸네. 오히려 내가 갚는 쪽이네.”

그 의미 모를 말과 함께,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어째서 그리 말씀하시는 겁니까?”

“자네들은 몰라도 되네. 그냥 그렇다고만 알아두게. 그리고 부담 갖지 말게.”

“그렇게 말씀 하셔도, 제게는 은혜입니다.”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흩어지고, 얕은 미소가 맴돌았다.

“그래, 자네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른 것 없구만.”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냥 늙은이의 헛소리니, 흘려듣게.”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사래를 쳤다.

“자네의 성정이 그러니, 거래라고 하세.”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나의 손에 빛을 머금은 나뭇가지를 쥐여주었다.

“이걸 줄 테니. 알릭을 행복하게 해주게. 그게 내 요구일세.”

“그리하겠습니다.”

그의 배려가 담긴 요구를 받아들이며, 그에게 다시 예를 표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물어볼 게 있네.”

그가 머금고 있던 미소가 흩어지고, 진지함이 깃들었다.

“제가 아는 것은 전부 말해드리겠습니다.”

“마녀의 거처에서 무엇을 봤나?”

그 물음에,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던 광경들이 떠올랐다.

“귀한 서적을 보관하고 있는 서고, 마녀에게 죽은 신들의 성물과 시신을 봤습니다. 그리고 마녀의 일지도 봤습니다.”

그의 얼굴에 음영이 짙어졌다.

“그래... 결국 거기에 있었나.”

씁쓸함과 여러 감정들이 뒤엉킨 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성물과 시신은 어떻게 했나?”

“저희가 감당할만한 것들이 아니기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잠시 침묵하였다. 그렇게 침묵하던 그는, 어두움을 얼굴에서 지우고 입을 열었다.

“그곳에 엘프로 보이는 시신이 있던가?”

“네. 있었습니다.”

“그러면 세계수에 찾아가기 전에, 그 시신을 챙겨서 가게. 그리고 월계수 관이 있다면 그것도 챙겨가게. 분명 도움이 될걸세.”

“그리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였다.

“할 말은 다 끝났네. 알릭은 그곳에 그대로 있네.”

그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자리를 뜨고, 그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의문이 떠올랐다.

마녀의 거처에 관한 질문을 하셨으니, 레이첼과 대화를 안 하셨을 텐데. 어떻게 우리가 시련에 도전한 사실을 알고 계신 것인가?

그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다가, 그의 앞에서 흩어졌다.

뼈가 보일 정도의 상처가 거짓이었던 것처럼, 흉터조차 없는 그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그 모습에 상처가 있던 부위를 쓰다듬었다.

약간 거친 촉감과 함께 따스함이, 손에 전해졌다.

그 감촉에, 마음을 짓누르던 짐이 한결 가벼워지며, 깊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의 육신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방금 듣고 왔건만, 이리도 감정이 요동치는구나.

그리 생각하며, 헝클어진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손끝으로 그를 느끼며 비어버린 마음을 채워 넣었다.

비어버린 마음을 가득 채우고, 그의 손을 잡고 한쪽 무릎을 굽혔다.

“반드시 그대를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그대를 위해서 살아가겠습니다. 그대에게 저지를 죄의 삯을 갚으며 살아가겠습니다. 그대의 행복만을 위하여 살겠습니다. 나의 봄이여.”

그의 온기를 다시 느낄 수 있게 된 날. 죄인을 계속해서 사랑하며, 사랑을 알려준 그에게 맹세하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음 편부터는 다시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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