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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54화 (54/59)

제 54화

휴식

그를 짊어진 날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오늘도 변함없이 그를 짊어지고, 걸음을 옮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평야를 하염없이 걷고 있을 때, 레이첼이 멈춰섰다. 멈춰선 그녀는 품속에서 특이한 문양이 새겨진 돌을 꺼내어 허공에 들이밀었다. 돌이 닿은 허공이 일렁이고 허공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자매님 따라 들어오시면 돼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뒤를 따라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눈에 담긴 풍경이 바뀌며, 싸늘한 겨울 끝자락의 공기가 사라지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따스한 바람 너머로, 은은한 빛이 내리는 숲이 펼쳐졌다.

“자매님, 다 왔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시면 돼요.”

“그래.”

그렇게 말하면 나를 바라보는 그녀 눈빛에 걱정이 담겨있었다. 나는 그 이유 모를 눈빛에서 눈을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조금 걸음을 옮겼을 때,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기운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기운을 느끼고 검을 뽑아 마나를 둘렀다.

“자매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거대한 기운이 다가온다.”

“아 그건 대사제님일 거예요.”

그녀의 말에 마나를 흐트러트리고 검을 집어넣었다. 그럼에도 몸은 거대한 기운에 반응하여 긴장을 놓지 않았다.

거대한 기운은 빠르게 우리를 향해서 다가왔고, 숲의 나무들이 갈라지며 그 기운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늙은 다크엘프. 그 노인을 보고 있으니, 어째서인지 이질감과 함께 기시감이 들었다.

그런 느낌을 주는 노인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서 오게. 알릭의 반려여. 자네에게 해줄 말이 많지만,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나중에 하겠네.”

그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손짓을 하니 하늘에서 맴돌던 은은한 빛이 내려와 우리를 감쌌다. 그 빛과 함께 부유감이 느껴지고, 빛이 흩어졌다.

빛이 흩어지고 숲의 풍경은 사라지고, 흰 돌로 지어진 큰 건물이 나타났다.

“따라 들어오게.”

그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건물로 들어갔다. 레이첼과 함께 그 노인의 뒤를 따라갔다.

책이 벽면을 가득 채운 공간을 지나고 푸른 빛이 맴도는 있는 방이 나타났다. 그 방의 중앙에 있는 검은색 구체 앞에서 노인이 멈춰섰다. 노인이 허공에 손짓을 하니, 구체는 구의 모습을 잃고 침대 같은 모습이 되었다.

“상태를 확인해야 하니, 여기에 놓아주게.”

그를 품은 관을 침대에 놓으니, 관에서 푸른 빛이 흩어져 나가고 침대에 스며들었다. 노인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고,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옛날이랑 똑같구나. 바보 같은 녀석.”

노인은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고, 그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푸른 빛이 흩어졌다.

“대사제님, 형제님 상태는 괜찮나요?”

레이첼의 물음에 그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하였다. 그 모습에 아물지 못한 상처가 다시 아픔을 뿜어내었다.

“그래도, 최악은 면했다.”

그렇게 말한 노인은 다시 허공에 손짓을 하니, 방 너머에서 푸른 열매가 날아왔다. 그 푸른 열매는 한 줌의 액체가 되어 그의 입으로 들어갔다.

그의 몸에 푸른빛이 맴돌고, 뼈가 보일 정도로 잘려나간 상처들이 아물기 시작했다. 아물기 시작한 상처는 겨우 뼈를 가릴 정도가 되고 멈추었다.

그 광경에 짓누르던 짐이,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내 분야가 아니라 완전히 치료하지는 못했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는 될 거다.”

그 말이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아픔을 옅게 만들었다.

“다른 조치도 취해야 하니 다들 나가보게.”

“그러면,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에, 잔잔한 호수 같던 노인의 얼굴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자네의 반려를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쉬고 있게.”

“맞아요. 자매님은 좀 쉬셔야 해요.”

“전 괜찮습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노인은 한숨을 쉬고 허공에 손짓을 하였다. 푸른 빛무리가 그의 손에 모이고, 커다란 거울이 되었다.

“자네의 모습을 보게.”

거울이 나의 앞으로 날아오고 나의 모습을 비추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창백한 얼굴. 눈 밑에 자리를 잡은 짙은 어둠. 푸석하다 못해 갈라지고 있는 입술. 누가 보아도 병자로 볼 듯한 모습이다.

“자네의 반려가 이런 상태라 마음이 불편한 건 이해하지만, 그런다고 알릭이 좋아할 것 같은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네.”

그 말을 반박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노인의 얼굴이 다시 잔잔해지고, 손짓을 하며 축객령을 내렸다.

“알아들었으면 나가보거라.”

그 말을 듣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니 레이첼이 나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여러 감정이 담긴 눈빛이 나를 바라보았다.

“자매님. 심적으로 힘드신 건 알지만, 그래도 자매님이 건강해야 형제님이 일어났을 때 기뻐하실 거예요.”

“그래, 그렇지. 내가 너무 바보같이 굴었구나.”

한평생 그를 보며, 같이 살았건만. 내 죄책감에 짓눌려 눈이 어두워졌구나.

“그렇다고 자책하시지는 마시고, 저희 일단 씻어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대로 씻은 날도 별로 없잖아요.”

진지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밝은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 밝은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가져서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그래, 그러자.”

옛날처럼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스며들고, 나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나를 이끌었다.

“여기 지반에서 뜨거운 물이 올라오는데, 분명 자매님 마음에도 드실 거예요.”

“그래. 기대하마.”

그녀에게 손목을 잡힌 채, 마을 변두리에 있는 큰 목조 건물로 끌려갔다. 그 목조 건물 안에 있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연못에 끌려 들어갔다.

피어오르는 뜨거운 연기와 다르게, 연못은 뜨겁지 않고 적당하게 따뜻하였다. 그 따뜻함이 지친 육신을 달래주었다.

“자매님, 어때요? 괜찮죠?”

“그래, 괜찮구나.”

그 말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으니, 예전부터 품은 작은 의문들이 올라왔다. 그녀와 친하지 않아 물어보기 꺼려졌던 의문을, 지금은 물어볼 수 있을 거 같아 입에 담았다.

“레이첼, 몇 가지 좀 물어봐도 되겠나?”

“그럼요.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그대는 카이안님의 계시에 따라 무투대회에 참여하고, 그를 만났다고 했지?”

“네, 맞아요.”

“그럼, 그대가 받은 계시는 그를 도와주라는 것이었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였다. 그 모습에, 지금까지 품고 있던 의문을 입에 담았다.

“그러면 어째서 그를 따라다니며, 그를 도와주는 것인가?”

“음. 그건 말이죠. 형제님이 제 스승님을 많이 닮으셨거든요.”

“스승님?”

“네. 스승님요. 제 부모님 같은 분이셨어요.”

그녀의 얼굴에 아련함이 스며들었다.

“그분과 알릭이 많이 닮았나?”

“외형은 닮은 구석이 별로 없지만, 하는 행동이 많이 닮았어요. 불가능한 일이어도 포기하지 않는 점이나, 자잘한 것들도 신경 쓰면서 배려하는 모습. 그리고 자기 몸은 신경 쓰지 않고, 남을 걱정하는 모습 같은 거요.”

“그렇군. 그대의 스승은 좋은 분이셨군.”

“네. 좋은 분이셨죠. 그리고 바보 같은 분이시기도 하셨어요.”

그녀의 아련함이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말이 울리고, 그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스며들었다.

“그런데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보신 거예요? 혹시 제가 형제님을 좋아하고 있을까 봐 걱정하신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아니다. 내 질문이 그대의 선의를 더럽혔다면 사과하겠네.”

나의 말이 끝나고 그녀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참을 웃던 그녀는, 겨우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장난이에요. 장난! 자매님은 너무 매사에 진지하고 딱딱해요.”

“그런가?”

“네. 그래서 장난을 쳤을 때, 다른 사람과 다른 맛이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싫던 그 웃음이,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렇게 싫지 않다.

“한동안 드러내지 않았지만, 역시 그대는 음침한 면모가 있군,”

“이게 저희 종족의 본질인데요. 뭐 어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헤픈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나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웃고 있으니,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그대의 본질이기도 하지.”

“맞아요. 그러니까 미워하지는 마세요.”

“미워한 적은 없네. 기분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자매님 너무해요.”

볼을 부풀리는 그녀의 모습에, 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웃으시는 거예요? 저 나름 진지하게 화난 거예요.”

“그래, 미안하구나. 그래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정말요?”

“그럼. 그대도 생사를 같이한 전우이지 않은가?”

“으. 전우는 너무 딱딱해요.”

“음. 그런가? 우리는 전우라는 표현을 가장 좋게 쳐준다만.”

“형제님이나 자매님은 그러시겠지만. 저희는 아니에요.”

“그럼 그대들은 뭐라고 부르나?”

“저희는 친구나 동료라고 부르죠.”

“친구는 좀 그렇군.”

그 말에 그녀는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그 이번에는 진짜 상처받았어요.”

“그런 의미는 아니었네. 그저 내 삶에 친구라는 개념이 없어서 그렇게 말한 거네.”

“정말요? 거짓말 아니죠?”

“그래. 내 명예를 걸 수 있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까 믿어 드릴게요.”

“그래, 고맙네.”

그녀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가 첫 친구가 되어드릴게요.”

“그래, 그래 주게.”

죄책감에 짓눌려 망가져 가는 나를 신경 쓰고 도와주는 그녀와 그렇게 실없는 이야기를 하며, 잠시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배고파아님 2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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