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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53화 (53/59)

제 53화

달맞이꽃

그대가 쓰러진 지 벌써 열흘이 지났네.

아, 이건 아침에도 말했으니 그대도 알고 있겠군. 같은 말이나 하고, 나도 참 정신이 없군...

그래,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주변 풍경이나 말하겠네.

사방이 뻥 뚫린 들판에, 야트막한 물줄기가 흐르는 곳일세. 주변을 둘러보면, 외롭게 자라난 나무가 있네. 겨울임에도 푸른 잎이 떨어지지 않은 신기한 나무일세.

그 나무를 보니 그대가 생각나더군. 주변의 환경과 상관없이 꿋꿋하게 그대의 뜻을 관철하던 그대가 생각났네.

그리고 보니, 그대는 옛날부터 식물을 좋아했었지. 야만인 토벌을 위해서 원정을 갈 때도 처음 보는 식물을 보면, 이파리나 열매를 채취하고 얕은 미소를 지었지. 그리고 나중에 그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알아보고, 나에게 이야기 해 주었지.

그래... 그대도 이 나무를 봤다면, 처음 보는 나무라고 좋아했을 텐데.

그대 대신 내가 채취해 두겠네. 나중에 일어나면, 옛날처럼 그대가 이 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게.

옛날에는 말하지 못했지만, 그대가 식물에 대해 말해주던 그 시간이 좋았네. 그러니, 또 나에게 그 시간을 나누어다오...

아, 내가 어디까지 말했나? 그래, 주변 풍경을 말하고 있었지.

그 나무 외에도 처음 보는 풀들이 제법 있네. 크기가 그대 키만 한 풀과 둥글게 말려서 굴러다니는 풀도 있네.

그러고 보니 밤을 준비할 때만 해도 피지 않았는데, 달빛을 받고 피어난 꽃도 있네. 달빛을 머금은 노란색 꽃잎이 이쁜 꽃일세.

레이첼은 그것을 보며, 달맞이꽃이라고 하더군. 달을 받았을 때 피어나는 꽃이라고,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다는군.

매번 내가 듣는 입장이었는데, 그대에게 설명하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군... 또 말을 하다가 딴 길로 새어버렸군. 미안하네. 요즘 마음이 복잡해서 그런 것이니, 그대가 이해해주게.

달맞이꽃 이야기를 마저 하겠네. 꽃에 얽힌 설화가 있다고 하던데, 그건 내가 흘려들어서 까먹었네. 다음에 그대가 나에게 알려주게.

지금 그대 옆에 있는 달맞이꽃은 노란색이지만, 레이첼의 말로는 분홍색도 있다고 하더군. 다음에 발견하면 그것도 챙겨두겠네.

그리고 꽃말은 색에 따라 다르네. 노란색은 기다림. 분홍색은 무언의 사랑. 저번 삶의 나와 그대를 닮아서 마음에 들더군.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대와 그대에게 호감이 있으면서도 표현하지 않던 나.

이렇게 말하니... 내가 가증스럽군. 그대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래도 조금만 더 들어주게.

그대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대를 처음 봤을 때 마음에 들었네.

첫 만남에서 그대는 긴장하고 말을 더듬었지.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대는 싫지 않았네. 오히려 조금 신경 쓰였지. 아직도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랬네.

그렇게 인사를 하고, 바로 검을 맞대었었지. 그대의 검은 투박했지만, 올곧아서 마음에 들었네. 패배가 드리웠음에도, 포기하지 않는 눈빛이 마음에 들었네. 그대의 투박한 웃음이 마음에 들었네.

그래서 그대가 마음에 들었네.

그렇기에 마음에서 그대를 밀어냈네. 그대 때문에 사적인 감정을 가질 것 같아서, 약점을 가질 것 같아서, 그대의 마음을 무시하고 받지 않은 것이네... 정말 바보 같은 짓이지.

그렇게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포기하지 않았지. 그 모습이 좋았네. 그대 모습만이, 무미건조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의미가 있었지.

그렇다고 하여도, 그 사실을 그대에게 말하지 않았네. 그대에게 그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네. 어차피 사라질 것이니까. 괜히 그대에게 여지를 주면, 그대만 더 힘들 것이니까. 그래서 그렇게 살았네.

그렇게 나는 사랑을 말하지 않았고, 그대는 포기하지 않고 사랑을 기다렸지.

그런데 이번 생은 조금 다르더군.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가 나를 밀어냈지.

그대는 첫 만남부터 나에게 미움받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더군. 화장을 하고, 불편한 옷 입고는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지었지. 그 상태로 그대의 자존심마저 버리며, 형편없는 남자를 연기했었지.

그런 그대가 짜증 났네. 이상하리만큼 짜증 났네. 분명 그런 자들을 수없이 보았거늘, 그대가 유독 짜증이 났네.

그게 신기하네. 저번 생도 그렇고 이번 생도 그렇고, 유달리 그대는 내 감정을 자극하더군.

그런 신기한 그대에게 감정을 휘둘리고, 실수를 저질렀지. 그 실수가 짐이 되어서, 그대에게 사과하고 싶었네. 그래서 그대를 찾아갔는데, 실패했네.

왜 그런지 아는가? 슬픈 표정으로 노란 튤립을 들고 있는 그대를 보고 있으니, 누군가와 겹쳐 보였네. 이상하게 겹쳐 보이는 누군가를 알 수 없었지.

시간이 흘러 그대가 파혼하자던 날. 그 누군가를 어머니라고 생각했네. 그대가 어머니와 겹쳐 보여서, 그대가 신경 쓰였네. 어머니에게 전하지 못한 마음이 응어리가 된 것을, 그대를 통해 해소하고 싶었네.

그런 마음으로 그대를 신경 쓰며, 기다리고, 쫓아다녔지. 그런데 그대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대에게 어머니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대를 바라보고 있더군.

나를 밀어내면서, 격하게 밀어내지 않는 그대를.

나를 밀어내면서도, 눈에 띄지 않게 배려하는 그대를.

나를 밀어내면서도, 항상 나를 바라보고 있던 그대를 바라보았네.

그런 그대를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더군. 그 따스함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네.

그 따스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지고, 그대가 괴물에게 당하고 쓰러졌지.

그대가 쓰러지고 마음 한편에 아픔이 찾아오고 절박함이 나를 짓눌렀네.

그 아픔이 눈으로 흘러나왔을 때, 그대가 눈물을 닦아 주었지. 내 아픔을 닦아 주던 그대의 온기가 따스하여 슬펐네. 무심하게 말한 ‘울지 마라.’라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 따스함을 이해하였네.

그 따스함이 사랑이고,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네.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는가? 사실 나도 모르네. 그냥 그대를 보고 있으니, 내 마음을 말하고 싶었네.

그냥 저번 삶과 이번 삶에서 모두 그대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네.

그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대를 사랑했을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네.

그저 그것뿐일세.

이렇게 말을 하여도, 그대는 듣지 못하겠지. 그저 나의 덧없는 넋두리겠지.

그렇다고 하여도 말하고 싶었네. 깨어난 그대에게 말하기 전에 연습한다는 느낌으로 말하고 싶었네.

내가 너무 무거운 이야기만 한 것 같군. 그래도 아직 남았으니 조금만 더 들어주게.

그대 죽고 나서, 많이 후회했네. 많이 아팠네. 정말 죽고 싶을 정도로 아팠네. 그 아픔 때문에, 한동안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였지.

그렇게 아파서 살아있는 것조차 힘겨운 나날이 이어지고, 어느 순간부터 그대가 남겨준 유언이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맴돌더군.

「나를 불쌍히 여기지 말아다오. 나에게 미안함을 느끼지 말아다오.」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그대의 말이 계속해서 울렸지. 그 울림에도, 처음에는 그대의 유언을 지키지 못하였네.

‘어떻게 그대를 불쌍히 여기지 말란 말인가. 어떻게 미안함을 느끼지 말란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대의 유언마저 들어주지 못했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이 찢겨나간 마음을 이어 붙여주더군.

이어 붙은 마음에 흉터가 남아 욱신거렸지만, 처음처럼 아프지는 않았네. 사는 것이 고통스러울 만큼 아프지 않았네.

그때가 되어서야 그대의 유언을 지킬 수 있었지. 아이들도 그렇고.

그대의 마음에 상처를 준 우리를 생각한 그대의 마음이, 우리를 구원하였네.

그러니, 유언처럼 미련하고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게. 옳은 것은 그대였고,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미련한 바보는 나였으니까.

달맞이꽃을 이야기하던 게 여기까지 와버렸구나. 여기까지 왔으니 마지막 주저리도 늘여놓겠네.

그대가 깨어나면 하고 싶은 일들이 많네.

그대가 좋아하는 술을 대작하고 싶네. 물론 그대나 아버님처럼 많이 마시지는 못해서 먼저 뻗어 버리겠지만, 그래도 그대와 마시고 싶네.

정원에 꽃과 나무들을 잔뜩 심을 생각이네. 그리고 봄이 물드는 날 그대와 그곳을 거닐고 싶네. 나중에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꽃의 이름과 꽃말을 그대와 같이 이야기해주고 싶네.

매년 화가를 불러서 그대와 나의 초상화를 만들고 싶네. 그대가 떠나고 하나뿐인 초상화를 보면서, 후회되더군.

‘조금 더 많이 그려 두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니 우리의 삶을 그림으로 기록하고 싶네. 성을 그대와의 추억으로 가득 채우고 싶네.

그대와 같이 달을 바라보고 싶네. 그대는 밤이 되면 달을 바라보며, 감성에 젖었지. 나도 그대와 같은 것을 바라보며,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네.

그대와 검을 다시 맞대고 싶네. 이번 삶에서 감정에 휘둘려 망쳐버렸지만, 내 삶을 내 마음을 검에 녹여서 그대에게 전하고 싶네. 말로도 전할 것이지만, 우리는 전사이니 검으로도 대화하고 싶네.

그대의 품에 안겨서, 그대의 온기를 느끼고 싶네. 그대의 온기로 마음을 채워 넣고 싶네.

이것들 말고도 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네. 너무 많지만 다 말하다 보면 밤이 저물 것 같네. 내일도 시간이 있으니,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겠네.

지루한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네. 좋은 밤 되게. 나의 달맞이꽃이여.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내일부터는 매일 저녁 9~10시 사이에 올릴 예정입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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