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화
시련과 기적
기억이 돌아오고, 모든 것들이 시련이 만들어낸 환상임을 알고 있다. 눈앞에 아이들이 가짜임을 알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만들어진 허구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느낀 감정은 거짓이 아니다.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다고 느꼈던 감정은 거짓이 아니다. 아이들의 감사에, 가득 차오른 감동은 거짓이 아니다. 눈앞에 아이들을 사랑하는 감정은 거짓이 아니다.
거짓이 아닌 그 감정들이 아직도 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어떻게 나의 손으로 아이들을 도려내란 말인가.
세상에 어느 아비가,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환상일지라도, 나는 그러지 못한다. 나는 이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다.
이겨낼 수 없는 시련이 나를 짓누르고, 절망감이 태어났다.
“아버지 누구를 택하시겠습니까?”
“아빠, 누구를 택하실 거예요?”
아이들이 선택을 재촉한다.
제발 그러지 말아다오. 나의 행복을 더럽히지 말아다오. 나의 꿈을 더럽히지 말아다오.
차라리 시련을 받지 않았다면, 이토록 고통스럽지 않았을 텐데. 이런 시련인 줄 알았다면, 도전하지도 않았을 것인데. 어찌하여 이토록 잔인하단 말인가.
잔혹한 시련 때문에 다리의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나에게, 아이들이 다가와 나의 손에 검을 쥐여줬다. 그 찰나에 스쳐 가는 온기가, 더없이 잔혹하다.
잔혹한 온기가 떠나가고, 다시 나의 행복을 더럽히는 말이 들려온다.
“아버지 저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저를 선택하실 건가요?”
아이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마음을 찌르고, 갈기갈기 찢는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입으로 흘러나왔다.
“나는... 선택할 수 없다.”
“그렇다면, 포기하시는 겁니까?”
“포기하시는 거예요?”
포기... 포기하면, 편해지겠지. 그런데 이 기회마저 놓치면, 그녀의 저주를 풀 수는 있는가?
답을 알고 있는 물음을 나에게 던졌다.
불가능에 가깝다. 세상에 아무리 기적이 많다고 하여도, 한평생을 쫓으며 살았음에도 찾지 못하였다. 이번 생이라고 달라질 것은 없다. 이것이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무너져가는 나를 붙잡는다. 나를 붙잡은 생각을 끌어안고, 힘이 풀린 다리를 억지로 일으켰다.
“아니, 포기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누구를 택하시겠습니까?”
“누구를 택하실 거예요?”
또다시 나에게 찾아오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을 하였다.
“이곳에 있는 누구를 택하여도 상관없는가?”
““상관없습니다.””
아이들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겹쳐 울렸다.
“그렇다면...”
말을 다 하지 않고, 나의 손목을 그었다. 칼날은 얕은 상처를 남겼고, 소량의 피가 흘러내려 잔을 적셨다.
피를 조금 담은 잔에서 흐릿한 빛이 맴돈다. 그 빛이, 이것 또한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를 택하겠다.”
아이들의 모습이 흩어지고, 흰 날개를 단 여인이 나타났다.
“번복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답하지 않고, 나의 팔을 베었다. 통증과 함께 피가 흘러나온다.
“... 이번에도 그러시는군요.”
여인의 뜻 모를 말이 울려 퍼지고, 팔에 상처가 늘어난다. 늘어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잔을 적시며, 흐릿한 빛이 조금 선명해진다.
선명해지는 빛을 보며, 피가 멎지 않도록 나를 베어낸다. 상처가 계속해서 늘어나고, 미약한 어지러움이 찾아왔다. 그 어지러움은 몸의 경고이지만, 나는 무시하고 계속해서 상처를 늘려나갔다.
팔의 살가죽이 너덜너덜해지고, 어지러움이 덩치를 키웠다. 어지러움이 덩치를 키웠으나, 잔은 반도 차지 않았다. 그 광경에 나를 도려내었다.
나의 일부가 잔을 채우고, 귓가에 이상한 목소리가 맴돌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겠나?」
어디에선가 들어본 듯한, 섬뜩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무시하며, 계속해서 나를 도려내었다.
어지러움이 덩치를 더 키워 나를 짓누를 때, 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가면, 죽을 것이다.」
“그런 일 없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입이 움직여 대답하였다. 나의 의지를 벗어난 입을 무시하고, 오로지 나를 도려내는 것에 전념하였다.
「허,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이냐? 지금 네놈의 몸뚱아리는, 전생과 달라 못 버틴다. 그러라고 내려진 시련이다.」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어째서 그런 헛소리를 한 것이냐?」
“비앙카와 제자가 도와줄 것이니, 괜찮다.”
「그 나약한 계집들을 믿느냐?」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다. 사념이여,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라.”
나의 입을 장악한 의지가 토해낸 말이 끝나고, 세상이 조용해졌다. 나는 조용해진 세상 속에서, 나를 계속해서 도려내었다.
통증과 어지러움이 나를 짓누르고, 의식이 흐릿해진다. 흐릿해진 의식은 조금씩 끊어져 간다. 그림을 이어 붙인 것 같은 세상에, 찬란한 빛이 가득 채워졌다.
빛이 가득 찬 세상이 나를 집어삼키고, 부유감이 찾아온다. 빛이 흩어지고, 거대한 빛을 담은 잔과 아까 보았던 여인이 나타났다.
“시련을 통과하셨습니다.”
여인에게 물어볼 것이 있어, 입을 열려고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입을 열 힘조차 없다. 끊어져 가는 의식을 부여잡을 힘조차 얼마 남지 않았다.
“제가 인도해 드리겠습니다.”
여인의 말과 함께, 나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른다. 떠오른 몸은 여인을 따라, 빛을 담은 거대한 잔으로 향했다. 여인은 거대한 잔 앞에서 멈춰서고 입을 열었다.
“원하시는 것을 간절히 생각하시면 됩니다.”
여인의 말이 끝나고, 떠오른 몸이 빛에 삼켜졌다. 더없이 빛나기에 어두운 세상에서, 나의 소원을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아이리스와 브란트 가문의 모든 사람에게 걸린 저주가 사라지기를.’
그 읊조림과 함께 빛이 흩어졌다. 빛이 흩어지고, 거대한 석상이 있던 곳이 펼쳐졌다. 의식이 또 끊어지기 시작했다. 끊어지는 세상 속에서, 석상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전자여... 이루어졌다.”
석상의 목소리가 끊어져, 첫마디와 끝마디만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뜻일 테니...
계속해서 끊어져 나가는 세상 속에서, 힘을 쥐어짜서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허리춤에 있는 가방에 손이 닿고, 포션이 손에 닿았다. 무겁게 느껴지는 포션을 움켜잡고 들어 올리니, 의식이 또 끊어졌다.
끊어진 의식이 다시 돌아오고, 손에 쥐었던 포션이 느껴지지 않는다. 눈을 돌리니, 조금 떨어진 곳에 떨어져 있는 포션이 보인다.
그 포션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지만,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의지만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선에 도달하였다. 점멸하는 의식과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뚱아리. 그것들로부터 죽음이 드리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적으로 인하여 또 주어진 삶이 끝나려고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깨어있을 때 고백할걸...
의미 없는 생각이다. 죽음이 다가온 자의 덧없는 후회다. 한번 마주했던 죽음이건만, 덧없는 후회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저번 삶처럼 덧없는 인생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인생은 아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녀의 미소를 보았고, 행복을 만끽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저주를 풀었다. 그러니, 덧없는 인생은 아니다.
레이첼과 그녀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이런 바보인 것을...
눈앞이 흐릿해진다. 너무 흐릿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 잠겨 있으니,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 못난 아들이 바보 같이 살기도 하였지만, 어머니의 유언은 지켰습니다.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살고 싶은 대로 자유로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마지막 넋두리가 끝나니, 비가 내려 나를 적셨다. 비가 계속해서 나를 적시고, 입에 쓴 것이 들어온다. 그 쓴 것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내가 그것을 넘기지 못하니, 온기가 찾아와 나의 목을 받쳐주었다. 그 덕분에, 잘 넘어가지 않던 쓴 것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쓴 것이 다 넘어가고, 온몸에 통증이 느껴진다. 그리고 시야가 돌아온다.
돌아온 시야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이리스가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슬퍼 보여, 손을 뻗으려 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손이 움직이지 않아 입을 열려고 했는데,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이 내 입을 막았다.
입안에 쓴맛이 가득 차고, 아주 조금 힘이 돌아와 손을 뻗을 수 있었다. 손에 그녀의 온기와 차가움이 느껴진다. 그 감촉을 느끼며,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그녀의 눈물보다 포션이 먼저 말라버리고, 입이 자유를 얻었다.
“왜 그리 슬피 우십니까?”
그녀는 한참을 울며 답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하염없이 흘러나오던 눈물이 약해지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가? 내가 밉지 않은가?”
어째서 그녀는 내가 미워할 것이라 생각하는가? 모르겠다.
그 답을 알 수는 없지만, 대답할 말은 정해져 있다.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눈물이 다시 거세진다.
“나는... 그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네.”
“저는, 그런 상처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거짓말 말게! 나는 그대의 사랑을 무시하였네. 그대의 노력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대를 가두었네.”
진한 슬픔이 담긴 그녀의 말에,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기억나셨습니까?”
“그래... 모든 기억났네.”
“그렇군요... 그렇다고 하여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가? 나는... 나는 그대에게... ”
그녀의 눈물이 거세지며, 그녀의 말이 끊어졌다. 그런 그녀의 뺨에 손을 얹으며, 입을 열었다.
“당신을 사랑하여 아팠습니다. 죽을 것처럼 아팠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사랑한 삶이 아프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잠깐 돌아온 힘이 흩어지기 시작하고, 의식이 흐릿해진다. 세상이 흐릿해진다.
“당신과 검을 맞대던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당신에게 사랑을 표하던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당신이 선물해준 아이들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저주 때문이니...”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그녀의 울음소리와 함께 어둠이 찾아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허리가 좀 괜찮아졌으니, 내일은 연참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