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화
잠식하는 저주
꿈에 잠겨서 허덕인 날. 그의 온기가 나를 구해주었고,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기쁘면서도, 묘하게 신경 쓰였다. 그런 복잡한 감정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은 상태로, 삶을 살았다.
그 복잡한 감정이 시간에 희석되어 잊혀진 날. 조그마한 변화가 생겼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정체 모를 웃음소리는, 내 귓가에 잠깐 머물다가 흩어졌다. 처음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웃음소리가 자주 들려오고, 묘한 감정이 찾아왔다.
나른함이라 하기에는 너무 무겁고, 공허함이라기에는 가벼운 감정이 한두 방울씩 마음에 쌓여, 천천히 나를 물들였다.
그 묘한 감정이 쌓여가는 시간이 흐르고, 서서히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알릭과 함께하는 티타임에서 처음으로 이상함을 느꼈다.
지친 정신을 위로해주던 향은, 더 이상 향기롭지 않고. 그 시간의 따스함과 두근거림이 옅어졌다.
처음에는 티타임을 자주 즐겨서 익숙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았다.
햇볕이 따사로운 날. 민생 시찰을 핑계로 그를 불러내어 도시를 돌아다녔다.
평소라면 넘칠 정도의 따스함이 나를 채워야 하건만, 따스함이 나를 가득 채우지 못하였다. 그것이 이상해 그의 손을 잡았을 때, 미친 듯이 날뛰어야 할 심장이 얌전하였다.
평소와는 다른 그 현상들을 부정하며, 무시하였다. 그리고 무시한 것들은 점차 쌓여, 눈을 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알릭과 함께하는 시간이 빛바래기 시작했고, 마음을 채워주던 따스함은, 온기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 현상들과 함께, 감정이 무뎌졌다.
머리가 아픈 일들이 선사하던, 짜증과 귀찮음이 사라졌다. 달콤한 디저트가 선사하던, 즐거움이 사라졌다. 훈련을 마치고 난 후의, 뿌듯함과 만족감이 사라졌다. 그늘진 아버님의 얼굴이 선사하던, 슬픔이 사라졌다.
알릭을 기다리는 시간이 선사하던, 두근거림이 흐려졌다. 매일 같이 곱씹던, 그와의 추억이 빛바래고 흐려졌다. 그의 온기가, 더 이상 나의 마음을 온전히 물들이지 못했다.
그 모든 것들을 쌓여감에도, 나는 그것들을 부정하고 또 부정하였다. 하지만, 부정은 현실을 가리지 못하였다.
부정하는 마음은 힘을 잃었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와의 시간 덕분에 잠깐 잊고 있던 저주가,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현실이다.
현실을 자각한 순간, 매일 같이 나의 귓가를 맴돌던 웃음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는 조롱이 담긴 비웃음 같았다.
그것이 듣기 싫어 귀를 막았지만, 웃음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져서, 무뎌져 가는 마음을 흔들었다.
그 기이한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꿈에서 들었던 섬뜩함과 불길함이 담긴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편안해질 거야.’
그 목소리가 흩어지고, 공허함에 더 가까워진 묘한 감정이 마음을 적셨다. 그 감정에 적셔진 마음은, 색채를 토하며 탁해졌다.
탁해진 마음에 혼란함이 옅어지고, 평안함이 찾아왔다. 평안함이 찾아왔음에도, 나는 그것이 달갑지 않다.
그 평안함에 몸을 맡기면, 그를 만나기 전의 세상처럼 고요하고 잔잔해지겠지. 그리된다면, 더 이상 슬퍼할 일도 없고, 괴로워할 일도 없어진다.
하지만, 그런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유를 알아버린 새장 속의 새가, 더 이상 새장 속에서 살아갈 수 없는 듯이. 행복과 그의 온기를 알아버린 나는, 그런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모든 일들을 미루고 저주를 풀 실마리를 찾기 위해 모든 시간을 쏟아부었다.
그 시간과 함께 감정이 계속 마모되고, 세상이 색채를 잃어버렸다.
그 광경에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알릭과의 시간마저 색채를 거의 잃어버렸다는 사실이, 조금 슬펐다.
그렇게 한 줌의 슬픔을 느끼던 날, 한 줌의 물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계시의 땅에 도착하였다.
그 땅은 우리를 거부하듯, 강렬한 햇볕과 열기를 머금은 모래바람을 선사하였다.
그것들은 대수롭지 않지만, 오늘따라 여인의 웃음소리가 자주 들리고, 정신이 몽롱하였다. 그 감각들 속에서, 나는 멍하니 걸음을 옮겼다.
그런 무가치한 시간이 흐르던 중, 웃음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귀에 들렸다.
“아이리스, 괜찮으십니까?”
나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의 목소리에 몽롱함이 조금 흩어졌다.
“괜찮네.”
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대답하였는데, 어째서인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게.”
그의 물음에 똑같이 답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의 시선이 거두어졌다. 그의 시선이 사라짐과 동시에 몽롱함이 짙게 깔리며, 나를 집어삼켰다.
그 몽롱함과 자꾸만 들려오는 웃음소리 속에서, 걸음을 옮기다 보니 휴식지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밤을 준비하였고, 식사 시간이 찾아왔다.
그가 만들고 있는 스튜에서 좋은 향이 풍겨왔다. 하지만, 입맛이 돌지 않았다.
처음 마주하는 환경에 체력이 소비되어 배가 고파야 정상이건만, 나는 그렇지 않았고 그저 몽롱할 뿐이었다.
그 몽롱함 속에서 레이첼과 그의 짧은 대화가 오갔다. 몽롱함이 짙어서 그런지, 그들의 대화가 흐릿하게 들렸다.
그 흐릿함 속에서, 그가 넘겨주는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입이 알아서 움직였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레이첼과 나의 목소리가 뒤엉켜 울렸다. 그 소리가 흩어지고, 나는 스튜를 떠먹었다.
오늘따라 스튜에서 아무런 맛이 느껴지지 않았고, 배도 고프지 않은 상태이기에, 스튜가 잘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기에 남기고 싶지 않다.
그 생각으로 그릇을 다 비웠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드시겠습니까?”
나를 바라보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괜찮네. 나는 이 정도로 충분하네.”
나의 말이 끝나고, 그의 눈에 걱정이 담겼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걸어야 하니, 체력을 위해서라도 더 드셔야 합니다.”
그 사실은 알고 있지만,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걱정이 담긴 눈동자를 보니,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 조금만 더 주게.”
그 말과 함께, 그에게 그릇을 넘겼다. 넘긴 그릇에 스튜가 가득 담겼다. 그 광경에 입이 저절로 열렸다.
“조금만이라고 했는데.”
“조금만 드린 겁니다.”
그의 단호한 말과 사라지지 않은 걱정에, 스튜를 억지로 넘겼다. 억지로 스튜를 다 넘기니, 몽롱함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 짙어진 몽롱함 속에서, 그에게 그릇을 넘겼다.
“다 먹었네.”
그 말을 하고는 걸음을 옮겨 텐트로 향했다. 몽롱한 의식 때문에, 텐트에 몸을 던지듯이 맡기고,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 몽롱하고 무가치한 시간에 잠겨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들리며 몽롱함이 옅어졌다.
“아이리스.”
내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눈을 돌리니 그의 얼굴이 가깝게 보였다. 조금 가까운 거리감에 몽롱함이 더 옅어졌다.
“언제 왔는가?”
“방금 왔습니다.”
가까운 거리감 때문에, 그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들이 손에 잡힐 듯이 잘 보였다. 손에 잡힐 듯이 잘 보이는 그 감정은, 걱정이었다.
그것이 몽롱함을 더 덜어내고, 잃어버린 색채가 조금 돌아오게 하였다.
“아이리스, 솔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걱정이 진하게 묻어 나오는 그의 말에, 나는 낮에 했던 말처럼 거짓을 말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 침묵이 잠깐 맴돌고 그의 입이 열렸다.
“대답으로는 충분합니다. 아이리스, 당신이 답하기 힘든 질문을 더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힘들다면 언제나 말해주십시오.”
그의 말에, 따스함이 담겨서 나의 마음에 스며든다.
“그러겠네.”
그 따스함을 느끼며 진심으로 대답하였는데도, 그는 얼굴에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리스, 기적이 잠든 곳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당신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희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고...”
시간이 많다고 말하려는 그의 말에, 색채를 잃은 마음이 요동치며 입을 움직이게 하였다.
“아닐세!”
마음이 생각조차 거치지 않고, 강하게 튀어나왔다. 그 강렬한 마음이 튀어나오고, 잃어버린 당혹감이 찾아왔다. 그리고 걱정해주던 그를 향해서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느꼈다.
“갑자기 소리쳐서 미안하네.”
“아뇨, 괜찮습니다.”
그는 그리 말하였지만, 나의 마음은 미안함과 당혹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 요동치는 마음들을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으니 솔직하게 말하겠네. 괜찮은 상태는 아니네.”
그의 얼굴에 걱정이 더 짙어진다. 그런 그의 손을 잡으며, 나의 마음을 말하였다.
“하지만, 지금 여정을 포기할 정도로 안 좋은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그 말에도 그의 얼굴에서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 따뜻함이 남아있던 몽롱함을 완전히 녹여버렸다.
“그리 말해주시니 다행이군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빛바래버린 세상의 색채가 돌아왔다. 그 색채 속에서 생각과 마음이 피어났다.
돌아온 색채를 쉽게 놓치지 않고 싶다는 생각과 그에게 이 마음의 흔적을 남겨놓고 싶다는 마음이.
그 피어난 생각과 마음에 입을 열었다.
“저번에 해주었던 말 아직 유효한가?”
“언제나 유효합니다.”
그의 부드러운 대답에, 따스함이 전해지고 안도하였다.
“그러면, 잠깐만 눈을 감고 가만히 있게.”
눈을 감은 그에게 품에 안겨, 그의 온기를 음미하였다. 그리고 조금 더 큰 것을 남기기 위해, 발끝을 들어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입에서 전해져오는 온기에, 얼굴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격하게 요동친다. 그것들을 느끼며, 이 순간과 이 감정을 마음에 새기어 넣는다.
그렇게 마음에 새겨 넣던 중, 그의 눈이 떠졌다. 그 상황에 부끄러움이 몰려와 그의 눈을 손으로 가렸다.
“아직 눈을 떠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네. 아주 잠깐만 더 눈을 감고 있게.”
부끄러움 때문에 그리 말하였다.
“오늘 불침번은 내가 먼저 서고, 그대는 마지막에 서게.”
이 부끄러움을 진정시킬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리 말하고, 황급히 걸음을 옮겨 도망쳤다.
부끄러움 때문에 도망친 나는 유적의 벽에 기대어, 그 부끄러움도 마음에 새겨 넣었다.
그러는 한편 슬픔이 몰려왔다.
이 새겨 넣은 마음과 기억마저 또 얼마 안 가서 빛바랠 것을 알기에, 그것이 더없이 슬펐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저녁 먹고 다음 편 써서 올리겠습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