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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45화 (45/59)

제 45화

맹세와 온기

자기가 한 말을 잊어달라는 말을 남기고 뛰쳐나간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성은 그녀를 쫓아가라고 외쳤지만, 그녀가 툭 던진 말에 감정이 요동쳤기에 그러지 못하였다. 요동치는 감정은 이성을 쫓아내고, 생각을 장악하였다. 생각을 장악한 감정은 의문을 낳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이들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인가...

그 의문은 그녀를 찾아가면 알 수 있겠지.

그렇게 간단하게 알 수 있지만, 요동치는 감정은 그것을 막으며, 나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만약에 그녀가, 너처럼 저번 생의 기억을 본 것이라면, 너는 어떻게 할 것이냐?’

나는 그 질문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였다.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을 고민할수록 과거의 흉터가 욱신거린다. 그 욱신거림과 함께, 감정의 찌꺼기들이 고개를 들었다.

썩을 대로 썩어버린 감정의 찌꺼기들에서, 지독한 아픔이 흘러나왔다. 그 아픔이 나를 흔들려고 하는 한편,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과 맹세가 나를 붙잡고, 질문을 던졌다.

‘너의 고백과 맹세는 다 거짓이었나?’

거짓이 아니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반드시 저주에서 그녀를 구해낼 것이다.

‘그러면 왜 답을 하지 못하는가?’

그건... 두려워서다. 지금의 그녀가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 나에게 따스한 표정을 짓고, 감정을 숨기지 않는 그녀가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 내가 사랑하고 있는, 지금의 그녀가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

그것이 두렵기에, 질문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면 지금은 답할 수 있는가?’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바보 같은 나는, 기억을 되찾은 그녀를 사랑할 것이고, 그녀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살아가겠지.

그렇지만, 마음의 깊이는 지금과 다르겠지.

나에게 한 점의 감정조차 보여주지 않은 그녀와 따스함을 알려준 그녀를, 똑같이 사랑할 수 없다.

상처만을 안겨준 그녀와 아픔을 매만져준 그녀를, 동일하게 사랑할 수 없다.

그녀를 위한 마음마저 무시해버린 그녀와 나를 밀쳐내고 대신 창에 찔린 그녀를, 똑같이 사랑하는 것이, 지금의 그녀에게 무례이다.

이것이 나의 대답이다.

나의 귓가를 맴돌던 질문에 답하니, 계속해서 물음을 던지던 목소리들이 잠잠해졌다.

조용해진 세상에서, 쓰디쓴 입맛을 느끼며 주절거렸다.

“...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나의 씁쓸한 마음이 담긴 탄식이 울려 퍼지고 흩어졌다. 탄식이 흩어졌으니, 진실을 확인해야 할 시간이다.

도망치듯이 사라진 그녀를 찾으러,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발걸음은, 그녀가 있을 만한 곳들을 다 찾아가 보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엇갈렸나 싶어, 그녀의 방과 그녀가 있을 만한 곳들을 다시 찾아가고, 사용인들을 붙잡고 물어봐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다.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진 그녀를 계속해서 찾던 중 한 가지 기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와 그녀가 이상한 꿈을 꾸었던 날, 별채에 있는 내가 사용하던 방을 찾아간 그녀.

그 기억에, 나는 별채로 걸음을 틀었다.

외딴곳에 위치한 별채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슬피 흐느끼는 소리는, 그때의 꿈에서 들었던 흐느낌과 똑같았다. 별채를 가득 채우는 흐느낌에 담긴 슬픔이, 나의 마음을 물들였다.

나는 슬픔으로 물든 마음을 끌어안고, 그녀를 향해 걸었다.

그녀를 향해 걸으면 걸을수록 흐느낌이 선명해지며, 나의 마음을 물들이는 슬픔도 선명해져, 마음의 색 또한 짙어졌다.

마음이 더 이상 물들기 힘들 정도로 짙어졌을 때,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는 그녀의 슬퍼하는 모습에, 슬픔을 더 이상 담지 못하는 마음이 터져나갔다.

터져 나간 마음에, 아픔이 밀려온다. 그 아픔이, 이곳에 온 목적과 고민하였던 생각들을 지워버렸다.

그것들이 지워진 자리에는, 하나의 마음만이 남았다. 그녀에게 맹세를 한 날에 품었던 그 마음이.

그 마음을 품고, 이번 생의 그녀가 나를 위하였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리고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그녀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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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볼수록, 지독하게 아프고 슬픈 꿈이 선명해져 도망쳤다.

선명해지는 꿈을 감당하기 힘들어 도망쳤건만, 꿈은 계속해서 선명해져 눈앞에 아른거린다. 선명해질 데로 선명해진 꿈은, 환상과 환청을 보여주었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남성을 끌어안고 울고 있는 아이들과 그들의 울음소리. 그것들이 나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나를 잠식하던 아픔을 되살렸다.

꿈에서 깨고, 죽어버렸던 아픔이 되살아나 다시 나를 잠식한다. 다시 찾아온 아픔에, 이성이 흐릿해지고 아픔이 눈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성과 시야가 흐릿해진 나는, 그것들에게서 도망치고 위해서 하염없이 뛰었다. 목적지조차 없이 도망치던 발걸음은, 어째서인지 별채의 앞에서 멈춰섰다.

멈춰 선 별채의 앞에, 꿈에서 보았던 챙이 넓은 붉은 모자를 눌러 쓴 여인이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여인은, 꿈에서처럼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또 그 여인에게 끌려갔고, 아이들이 울고 있던 방에 도착했다.

여인은 나의 손을 놓고, 흩어졌다. 여인이 흩어지고, 다시 꿈의 광경이 펼쳐졌다. 그 광경은 오늘 본 꿈과 이때까지 반복해서 꾸던 꿈과 합쳐진 광경이었다.

얼굴이 가려진 남자의 시신, 울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시신을 붙잡고 울고 있는 나.

나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뒤섞여 울려 퍼지고, 그 소리에 담겨있는 감정들이 나에게 흘러들어왔다. 흘러들어온 감정은 너무 무겁고 짙은 죄책감이었다.

그 죄책감이 나를 옭아매고, 마음을 잠식하였다. 죄책감에 잠식당한 마음은 슬픔을 토해내며, 자신을 찢어발겼다. 자해하는 마음에, 선명한 아픔이 몰려오고 슬픔이 흘러내렸다.

선명한 고통과 슬픔이 나를 집어삼켜,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섬뜩하고 불길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의 업이 이리도 무겁구나.”

무거운 말과는 다르게, 그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또 이어졌다.

“이리도 무거운 업을 네가 계속해서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 말과 함께, 서늘하다 못해 차가운 손길이 나의 뺨을 닿았다.

“내가 도와줄 수 있단다.”

그 목소리는 웃음기가 섞여 있고, 어딘가 섬뜩하고 불길하였지만, 너무나 달콤하게 들렸다.

“아니, 이미 나의 도움은 시작되었다. 그러니 조금만 기다리렴.”

말할수록 말투가 변하는 그 목소리는 흩어지고, 꿈이 다시 나를 짓누른다. 아이들과 또 다른 나의 흐느낌과 나의 흐느낌이 뒤섞여 울리고, 나를 잠식하던 슬픔과 아픔이 아주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흐려지는 속도가 너무 느려, 계속해서 흘러들어오는 감정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그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을, 계속해서 토해냈다.

그렇게 하염없이 감정을 토해내고 있을 때, 온기가 느껴졌다. 그 온기는 나를 감싸 안았고, 흘러들어오는 감정들을 가볍게 해주었다.

“공녀님, 아니 아이리스. 당신에게 파혼하자고 했던 날. 당신은 저를 책망하지도 않으셨고, 이유조차 묻지 않으셨죠. 저 또한 그리하겠습니다.”

그의 온기와 함께, 그의 따스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오는 감정들을 막아주었다.

“당신이 왜 그런 질문을 하였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왜 도망치듯 자리를 뜬 것에 대하여 책망하지 않겠습니다. 왜 이리 슬피 우시는지 묻지 않겠습니다.”

그의 눈물을 본 날. 내가 그에게 쓴 편지의 문구와 비슷한 말이, 온기를 담은 채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만약에, 그 감정이 저 때문이라면, 진정하실 때까지 보이지 않도록 당신에게서 떨어져 있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나를 감싸 안은 온기가 조금 더 따뜻해졌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곁에서 당신의 슬픔을 같이 감당하겠습니다.”

그 말에, 흘러들어왔던 감정들이 흩어졌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시다면, 말하여 주십시오. 당신을 위하여, 뜻대로 행하겠습니다.”

흘러들어온 감정들이 흩어진 자리에, 그의 온기와 따스함이 채워지고, 토해내던 아픔이 멈추었다.

나를 괴롭게 하던 감정들과 아픔이 모두 흩어져 버렸지만, 지금의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은 따스한 시간이 조금 흐르고, 조그마한 욕심이 올라왔다. 그 욕심이 나를 유혹했고, 그 유혹에 혹하여 입을 열었다.

“정말 뜻대로 행해주는가?”

“네. 당신의 뜻대로 행하겠습니다.”

단호하며, 따스한 그 말에 욕심이 더 부풀어 올랐다. 부풀어 오른 그 욕심이, 그의 따스함을 이용하였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름으로 불러주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이리스.”

봄에 처음으로 만나서, 겨울이 시작되는 날이 되어서야 그의 입에서, 나의 이름이 나왔다. 너무나도 오랜 기다림이었지만, 그 과실이 너무나도 달콤하여 오랜 기다림을 충분히 보답하였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부탁해도 되겠나?”

“얼마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조금만 더 이대로 있어 주게.”

“그리하겠습니다.”

한참이나 그의 온기를 느끼며, 꿈을 지워나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주 피폐가 끝난 건 아닙니다.

오늘과 내일은 과제 때문에, 연참은 못할 것 같습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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