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화
짓누르는 꿈
오늘도 꿈을 꾸었다.
오늘의 꿈은, 평소의 꿈과 많이 달랐다. 평소의 꿈에서 매일 반복되던 장면은 보이지 않고, 어두컴컴한 세상에서 붉은 비가 내렸다. 붉은 비는 끝이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세상을 가득 채웠고, 붉어진 세상은 한 점으로 모이더니, 챙이 넓은 붉은 모자를 눌러쓴 여인이 되었다. 그 여인은 나의 손목을 잡고, 어디론가 나를 끌고 갔다.
나를 끌고 가는 여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워, 불길하였다. 그 불길함에 여인의 손을 쳐내려 했지만, 나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말을 듣지 않은 몸은, 그저 여인이 이끄는 데로 끌려다녔다.
그렇게 한참을 끌려다녔을 때, 어두운 세상에 붉은 문이 나타났다. 여인은 그 문을 열고, 나를 밀어 넣었다.
시야에서 어두컴컴한 세상은 사라지고, 새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새하얀 세상은 점차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고, 시간이 조금 흐르고 익숙한 방의 풍경이 펼쳐졌다.
익숙한 방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내가 있었다. 또 다른 나는 품에 아기를 품고, 무표정한 얼굴로 아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도 나처럼 되겠구나.”
나는 아기를 보며, 그리 말하고는 흩어졌다. 흩어진 나는 다시 나타나고, 또 품 안에 아기를 품고 있었다. 그 아기는 처음의 아기와 다르게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쳐다보지 않고,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이 밀렸겠구나.”
나는 품 안에 있는 아기를 무시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뱉고는 흩어졌다. 내가 흩어지고, 익숙한 방 또한 흩어졌다.
풍경이 재구성되고, 너무나도 익숙한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 익숙한 방은, 어릴 적 아버님의 집무실이었다. 아버님의 집무실에 내가 나타나고, 서류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내가 서류를 훑어보던 중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5~6살 정도의 푸른 머리의 남자아이와 3~4살 정도의 갈색 머리의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엄마! 오늘 제가 그린 그림이에요.”
“전 꽃밭을 그렸어요.”
“... 잘했다.”
나를 엄마라 부르는 아이들의 밝은 목소리에, 나는 무미건조한 말을 툭 던지고는 다시 서류를 훑어봤다. 아이들의 표정은 조금 의기소침해지고, 아이들과 내가 흩어졌다. 어째서인지 가슴이 욱신거린다.
같은 방에 또 내가 나타나고, 조금 더 자라난 아이들이 나타났다.
“어머니, 내주신 숙제 다 했어요.”
“저도 다 했어요.”
“그래, 놔두고 가거라.”
나는 아이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미건조한 말을 던졌다. 아이들의 얼굴에 음영이 생겨났다. 아이들과 내가 다시 흩어졌다. 욱신거림이 아픔으로 변하였다.
같은 방에 또다시 내가 나타나고, 젖살이 조금 빠져버린 아이들이 꽃을 들고 찾아왔다.
“어머니, 생신 축하드려요.”
“축하드려요!”
“그래, 고맙다.”
나는 아이들의 축하에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 무미건조한 대답에, 아이들의 얼굴에 음영이 짙어졌다. 음영이 짙어진 아이들은 꽃과 편지, 그리고 작은 상자를 두고 갔다.
시간이 흐르고 나는 여전히 서류를 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문이 열리고 다시 아이들이 들어왔다.
“어머니, 오늘 숙제 가져왔어요.”
이번에는 남자아이만 이야기하였고, 여자아이는 그대로 놓여 있는 꽃과 편지, 작은 상자를 보면서 울먹거려,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래, 두고 가거라.”
아이들은 빽빽이 적힌 종이를 두고 나갔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울음소리가 내 귀에서 계속 맴돌며, 아픔을 키웠다.
시간이 흐르고, 문이 열리며 얼굴이 가려진 남성이 들어왔다.
“아이리스, 당신 아이들에게 너무한 거 아니야? 아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오늘은 준비하였는지 알고 있어?”
“모른다. 그리고 난 챙겨달라고 한 적 없어.”
“당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래.”
남자의 입술이 이빨에 찢기며,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남자와 내가 흩어졌다. 남자가 흘린 피는 흩어지지 않고, 나에게 날아와 나에게 스며들었다. 피가 스며들고, 남자의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그 감정은 너무 무겁고 슬퍼서, 견디기 버거웠다.
그 감정에 힘겨워하고 있을 때, 또다시 내가 나타나고, 훌쩍 커버린 아이들이 나의 앞에 앉아 있었다.
“너희들에게 가문의 이야기를 해줄 시기가 되었구나.”
아버님이 나에게 해주었던 말을, 조금 나이를 먹은 내가 똑같이 말했다.
“우리는 감정이 점차 사라진다. 그 과정에서 많은 혼란이 발생하지. 가령 감정을 놓지 않으려는 집착 같은 거 말이다.”
“어머니, 그게 왜 혼란입니까?”
예전의 나와 똑같은 질문을 하는 남자아이의 말에, 나는 아버님과 똑같은 말을 하였다.
“감정이란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약점이다. 그런데, 그런 거에 집착하는 것이 혼란이 아니면 무엇이더냐?”
아이들은 나의 말에 수긍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나도 너희 같은 생각을 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너희도 알게 될 거다. 감정은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약점인 것을.”
그 말을 끝으로, 아이들의 성장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이 흘러갈수록, 아이들의 얼굴에서 웃음이 점차 흐릿해져 갔다. 그 모습에 아픔이 또 커져간다.
완전히 아이들의 웃음이 사라지고, 아이들과 내가 흩어졌다. 그리고 아버님의 집무실도 흩어졌다.
흩어진 풍경은 다시 뭉쳐서, 매일 꿈에서 나오던 방 앞의 복도가 펼쳐졌다. 그리고 문 너머에서 흐느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흐느낌 소리에, 아픔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부풀어 오르는 아픔과 동시에, 또 나이를 먹은 내가 나타나 중얼거렸다.
“에반아... 엘리야...”
처음 듣는 그 이름은 어째서인지 익숙하고, 머릿속에 맴돌며 마음의 한구석에 새겨졌다.
그 이름들이 새겨지고,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던 아픔이 터져버렸다. 터져버린 아픔이 나를 짓눌러, 사고가 흐릿해진다.
사고마저 흐릿해지는 아픔 속에서,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다시 찾아온 어둠 속에서, 처음 보았던 여인이 다시 나타났다.
“많이 아픈가?”
나를 짓누르는 아픔에, 여인의 질문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였다.
“편해지고 싶나?”
그 말이 너무나 달콤하게 들렸다.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곧 편하게 해줄 테니.”
그 말을 끝으로, 어딘가 불길하고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세상의 모든 것이 흐려지고 아픔 또한 흐려졌다.
흐려진 세상 너머로 어둠이 찾아오고, 어둠이 흩어진다. 어둠이 흩어지고,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꿈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꿈에서 본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에반, 엘리.”
낯설지 않고, 익숙한 것이 어디서 들어본 것이 분명한데,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기억나지 않아, 머릿속에서 잠시 치웠다.
오늘따라 유독 이상했던 꿈을 무시하고, 떠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떠날 준비를 하다 보니, 해가 중천에 뜬 정오가 되었다. 정오가 되었음에도, 어딘가 몽롱한 나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레이첼과 알릭을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이곳으로 오고 있는 레이첼과 알릭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한 가지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나에게 파혼을 요구한 날 밤의 산, 통곡하던 그의 모습이 한 편의 사진처럼 떠오른다. 작은 무덤을 만들고 꽃을 놓고 오열하던 그의 모습. 그리고 그의 울부짖음 속에서 들렸던 이름.
“에반아, 엘리야.”
그 말이 내 귀를 맴돌고, 꿈에서 느꼈던 아픔이 올라온다. 다시 찾아온 아픔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녀님.”
‘당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그의 목소리와 꿈에서 보았던, 얼굴이 가려진 남자의 목소리가 겹쳐진다. 그리고 둘의 목소리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에 한 박자 느리게 인사를 하였다.
“... 그래, 좋은 아침이네.”
그런 나를 그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그 눈길이 좋으면서, 꿈에서 흘러들어온 남자의 감정을 떠오르게 해 힘겨웠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그냥, 잠을 좀 설쳐서 그렇네. 그보다, 돌아가면 잠시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겠는가?”
그에게 거짓을 말하며, 꿈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그의 시간을 요구하였다.
“얼마든지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그와의 대화가 끝나고, 자꾸만 눌러오는 꿈의 아픔에 정신이 몽롱하여, 세상이 흐릿해진다.
흐릿한 세상에서, 흐릿한 시간이 지나가고. 어느덧 저녁이 되어, 그가 나의 앞에 앉아있었다.
방금까지 나는 무슨 말을 했었지? 생각나지 않는다.
흐릿한 기억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공녀님, 하실 말씀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그의 말에 잠시 망설였다. 겨우 꿈 가지고 호들갑 떠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질문하여야, 그가 나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인가?
그 외에도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고,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음... 내가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를 할 건데, 너무 신경 쓰지 말아 주게.”
“알겠습니다.”
“혹시, 에반과 엘리가 누군지 알고 있나?”
나의 말이 끝나고, 그의 잔잔한 표정이 깨지고, 입에 머금고 있던 차가 바닥을 향해 뿜어져 나왔다.
그 모습에 아픔과 흘러들어왔던 남자의 감정이 점차 선명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해지는 꿈이, 나를 짓누르고 버겁게 만들었다. 그 감각들 속에서, 그의 답을 들으면 꿈이 더 선명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방금 한 말을 잊어주게.”
그리 말하고는, 당황하는 그를 내버려 두고 나의 방에서 도망쳤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여주 피폐 ON! 이제부터 여주 시점이, 이전보다 자주 나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교수님들이 과제를 많이 주셔서, 한편만 올라오는 날은 과제에 치여있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ㅠㅠ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