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화
아르미스의 계시
타락한 성녀의 습격 받은 날로부터 보름이 지났고,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타락한 성녀가 가지고 있던 붉은 잔이 아르미스교단의 성물임이 밝혀지고, 아르미스교단 내부의 분열과 황실의 대대적 탄압과 함께 제국이 혼란해졌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가 흘렀고, 그것을 참을 수 없던 황녀는 침묵을 깨고 자신의 축복을 밝혔다.
수백 년 만에 나타난 성녀의 등장에, 분열되었던 교단은 황녀를 중심으로 뭉쳤다. 그리고 장님이라고 황녀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던 황제는, 황녀에게 다분히 정치적인 손길을 뻗었다.
황녀는 그 추악한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덕분에, 죄 없는 자들에게도 향했던, 숙청의 손길이 거두어지며, 황궁 습격 사건은 황제의 입장에서 최고의 결말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사건이 일단락되고, 공을 세운 우리에게는 포상과 형식적인 치하의 말이 내려졌다.
포상에는 작위도 포함되어, 새로운 성을 하사받아 노르먼이라는 이름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알릭 더글라스 남작. 그것이 새로운 나의 호칭이자, 어색한 옷이었다.
노르먼과 브란트만을 짊어졌던 나에게는 그 이름은 어색하면서도, 가족 같지 않은 가족 사이에 남아있던 마지막 연결점을 끊어주었기에 마음에 들었다.
포상과 작위 수여식이 끝났고, 지긋지긋한 황도에서 떠날 시간이 되었다.
“형제님, 시간 다 됐어요.”
“그래, 가자꾸나.”
얼마 없는 짐을 챙겨들고, 밖으로 향하였다. 세상이 가장 밝은 정오. 분주하게 마법진을 준비하고 있는 마법사들과 세른 명에서 스물두 명이 되어버린 전사들, 그리고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아이리스가 눈에 들어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녀님.”
“... 그래, 좋은 아침이네.”
힘없는 그녀의 목소리가 신경 쓰인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그냥, 잠을 좀 설쳐서 그렇네. 그보다, 돌아가면 잠시 시간을 내어 줄 수 있겠는가?”
“얼마든지 내어 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흐릿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고 나이 든 마법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공녀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럼, 작동시켜 주게.”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다급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뛰어오는 황녀가 보였다.
황녀는 다급한 걸음으로 우리를 향해 다가왔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황녀 전하, 어째서 호위도 없이 이곳에 오셨습니까?”
“여러분께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어서, 몰래 왔어요.”
황녀는 그리 말하며, 우리를 바라보고는 허리를 숙였다.
“여러분들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를 구해주신 여러분들의 은혜, 평생 기억하며 살겠습니다.”
예법과는 거리가 멀지만, 순수한 감사의 마음이 담긴 말이 울려 퍼지고, 전사들은 검을 가슴에 대어 북부식 예를 표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대표인 아이리스가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를 지킬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습니다.”
아이리스의 말이 끝나고, 전사들의 목소리가 하나로 엮이어 울려 퍼졌다.
“황녀 전하를 지킬 수 있어서, 큰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로 엮인 함성은, 이곳을 가득 채우고 황녀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 여러분들은 말에, 또 구해지는군요.”
황실과 교단의 사건들과 엮이어, 마음고생이 심했을 황녀는 그리 말하며 눈시울을 훔쳤다. 그리고는 나를 향해 걸어와, 편지를 건네주었다.
“알릭 경, 이걸 가져가 주세요. 경께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황녀가 건네준 편지를 품에 고이 접어 넣고, 마법진 위로 올라섰다. 마법사들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함께, 빛이 우리를 집어삼켰다.
부유감과 어지러움이 찾아오고, 빛이 흩어진다. 눈이 내리는 풍경과 싸늘한 바람이, 우리가 돌아왔음을 알려주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추모식은 내일 진행할 것이니, 그때까지 편히 쉬게.”
전사들의 발 구르는 소리와 함께, 흩어졌다.
“나는 아버님에게 보고해야 하니, 저녁쯤에 내 방으로 와주게.”
“그리하겠습니다.”
우리의 짧은 대화가 끝나고,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장인어른의 방으로 향했고, 나는 황녀의 편지를 품은 채, 나에게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 오랜만인 듯한 느낌이 맴도는 방에 짐을 대충 던져놓고 편지를 열어보았다.
「아이리스 경의 저주가 계속 신경 쓰여, 아르미스님께 매일 같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의 결실을 맺었는지, 오늘 새벽 아르미스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아이리스 경과 경의 이야기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지만, 두 분의 이야기일 것 같아 전해드리기 위해 이 편지를 적었습니다.
저주의 굴레를 이겨내고자, 반신의 격을 제물로 바쳐 삶을 반복하는 자여. 나의 꽃을 지켜주어 감사하네. 이에 보답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계시를 내렸네.
동쪽에 위치한 한 줌의 물조차 찾아보기 힘든 모래의 땅에, 진정한 신이 남기신 기적이 잠들어 있으니 찾아가 보게. 반드시 자네에게 도움이 될 것이네. 그리고 제약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말할 수 없는 사정을 이해해주게.
그리고, 지금 그대의 반려에게 불운이 몰려오고 있네. 그렇다고 하여도, 포기하지 말게. 꺾이지 말게. 그리고 그대의 반려를 믿게나.
카이안과 나는 그대의 숭고함을 응원하고 있네.」
계시가 담긴 편지의 내용은 끝이 났다. 한 번의 읽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내용을 풀어내기 위하여, 편지의 내용을 곱씹었다.
「저주의 굴레를 이겨내고자, 반신의 격을 제물로 바쳐 삶을 반복하는 자여.」 첫 문장에서부터 막혔다.
저주의 굴레와 삶을 반복하는 자라는 말은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나의 삶이었으니, 나를 말하는 것일 거다. 하지만, 반신의 격은 왜 나오는가. 괴물도 나를 그렇게 지칭하였는데, 어째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알 수 없다. 반신은커녕, 범부에 가까운 자인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나의 머릿속을 어지럽히기에 잠시 옆으로 치워두었다.
「동쪽에 위치한 한 줌의 물조차 찾아보기 힘든 모래의 땅」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 보아야겠지만, 아마도 뉴델 왕국에 있는 거대한 사막을 칭하는 것 같다.
「진정한 신이 남기신 기적이 잠들어 있으니 찾아가 보게.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네.」 진정한 신, 세상의 모든 신들을 부정하는 듯한 말. 그 말을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불경하다는 느낌이 들어 옆으로 치웠다.
그 말을 치우고, 그 뒤의 말들에 집중하였다. 나의 삶을 알고 있는 듯한 신의 말이자, 확신이니 그것이 그녀의 저주를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 기적이 잠들어 있는 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다른 희망들 보다 압도적으로 빛나는 희망이기에, 시간을 바쳐가며 찾으면 된다.
그리 다짐하며, 가장 불길한 문장에 눈을 돌렸다.
「지금 그대의 반려에게 불운이 몰려오고 있네.」 나의 반려... 아이리스를 뜻하는 것일 테지. 그거까지는 괜찮지만, 불운이 몰려오고 있다는 문장이 너무나 거슬렸다.
신의 계시에서 언급할 정도이니, 평범한 불운은 아닐 것이다. 저주를 뜻하는 것인가. 저주를 뜻하면, 왜 불운이 몰려온다고 한 것인가... 모르겠다.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불길함을 느끼던 와중에, 오늘 아침 피곤해 보이던 그녀의 얼굴과 힘없는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이미 불운이 시작된 것인가.
그 생각에 많은 감정들이 뒤엉키고, 생각이 복잡해진다. 복잡해진 생각은, 불길함을 낳고, 불길함은 나를 잠식한다.
잠식하는 불길함을 밀쳐내고, 눈을 돌렸다. 해소할 수 없는 불길함 따위를 계속 신경 쓰더라도, 득이 없음을 알기에 무시하고 편지로 눈을 돌렸다.
「포기하지 말게. 꺾이지 말게. 그리고 그대의 반려를 믿게나. 카이안과 나는 그대의 숭고함을 응원하고 있네.」
신의 격려와 응원의 말에 느낌이 이상하였다. 삶에서 단 한 번도 신을 믿어 본 적이 없건만, 신들을 나를 알고 축복하며, 응원한다. 그것이 신경 쓰인다.
나는 누구이길래, 반신의 격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며, 신들의 축복과 응원을 받는가.
공허한 자문에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길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도, 자문은 사라지지 않고 나의 마음에 새겨졌다.
마음에 새겨진 자문을 되뇌며,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
침대에 누워 있으니, 붉게 물든 방이 저녁이 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저녁이 되었기에, 걸음을 옮긴다.
익숙한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고, 그녀의 응답을 기다린다.
“들어오게.”
그녀의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향긋한 허브의 향이 코를 간질이고, 눈 밑이 어두운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계시의 한 구절이 나의 주변에서 아른거린다.
“왜 멍하니 서 있나? 우리가 한두 번 보는 사이도 아니고, 편하게 앉게.”
그녀의 말에, 계시의 구절이 흩어졌다. 흩어진 구절의 파편을 치우며, 그녀의 앞에 앉았다.
“공녀님, 하실 말씀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음...”
그녀는 바로 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그 모습에,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며, 차로 타들어가는 목을 축였다.
“음... 내가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를 할 건데, 너무 신경쓰지 말아 주게.”
“알겠습니다.”
자연스럽게 거짓을 말하였다.
“혹시, 에반과 엘리가 누군지 알고 있나?”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다음 편은 아이리스의 시점에서 진행됩니다. 그리고, 조금 늦어져 12시 넘어서 올라올 수 있습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