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1화
울려오는 목소리와 고백
삶을 바칠 정도로 사랑하였던 여인이 쓰려졌다.
쓰러진 여인은 피를 토하며, 힘겹게 입을 움직였다. 여인의 입에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입술만이 움직였다.
소리조차 허락받지 못한, 힘겨운 입은 한 단어를 만들어냈다.
‘도망쳐.’
그 말이, 한심한 나를 찔러온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는가...
나를 감싸는 불길함에, 그녀를 혼자 보낼 수 없어서 따라왔다.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녀를 사지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지키진 못한 삶에서, 그녀를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도움을 받는 짐이 되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다.
그 사실이 나를 찢어발긴다. 마음이 찢겨나간다. 행복을 갈구하던, 내가 찢겨나간다. 그녀를 사랑했던 내가 찢겨나간다.
그렇게 찢겨나가면서도, 괴물의 손에 잡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것이 나의 현실이다.
현실이 나를 짓누르고, 마음보다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울려온다.
‘이런 현실을 위해, 지난 삶을 후회하고 부정했나?’
아니다.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다.
‘이런 현실을 위해, 아이들을 가슴에 묻고, 좌절했나?’
아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아이들을 묻었는데, 이딴 현실을 바랐겠는가.
‘이런 현실을 위해, 흉터를 무시해가며, 다시 그녀를 사랑했나?’
아니다. 고작 이딴 현실을 위해, 아픔을 무시하며 다시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럼, 현실에 좌절할 만큼 나약한가?’
아니다. 지독한 현실을 부정하고자, 발버둥 치는 삶이 나의 삶이다.
‘그럼, 왜 좌절하는가?’
모르겠다. 나를 찢어발기는 아픔에,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 생각하지 마라. 검을 들어라.’
검이 없다.
‘멍청한 생각 따위 하지 마라. 검을 들어라.’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기묘한 감각이 나를 감싼다. 그 감각이 나의 몸을 움직이게 하였다. 손을 뻗어, 선을 그었다. 한 줌의 마나 조차 담기지 않은 선이 붉은빛을 베어내고, 괴물의 손을 쳐냈다.
괴물의 놀란 표정과 함께, 잡혀있던 손에 자유가 찾아왔다.
‘검을 들어라.’
계속해서 울리는 그 목소리에, 손을 뻗었다. 무언가 익숙한 감각과 함께, 푸른빛이 손에 들어온다. 푸른빛의 두 단검이 합쳐지며, 한 자루의 검이 된다.
기묘한 감각에, 푸른빛이 더해지고 꿈속을 걷는 듯한 몽롱함이 찾아온다. 나는 몽롱함 속에서 검을 휘두른다. 푸른빛이 검에 힘을 더해주어, 붉은빛을 밀어내고 베어낸다.
베어냄과 동시에, 각인된 범접할 수 없는 존재감을 망각한다. 그리고 지난 삶이 스쳐 지나가고, 검에 담긴다.
아픔이 스며든 검이 울면서 뻗어나간다. 내 삶이 괴물에게 닿고, 베어낸다. 붉은 비가 흩뿌려지고, 비명이 울린다.
그 비명이 머리를 울리고, 수많은 붉은 선이 나를 덮친다. 내 삶이, 푸른빛으로 달을 그리고 붉은 선을 끊어냈다. 붉은 선들이 흩어지고, 흩어진 자리에 붉은 가시가 자라나 나를 찔러온다.
내 삶이, 꿈꾸던 봄을 그려낸다. 푸른빛의 바람이 불고, 붉음과 푸름이 뒤섞인 꽃들이 피어나 흩날린다. 꽃잎이 흩날리는 세상을 불꽃이 집어삼킨다.
한 폭의 그림을 방해하는 불꽃을 끄기 위하여, 빛을 뻗었다. 빛과 불꽃이 뒤엉키고, 터져나가며 잔불이 나를 덮친다.
뜨겁다. 그 뜨거움이 나를 태우지만, 그 보다 큰 아픔이 이미 자리해있기에, 뜨거움이 한없이 작아진다.
한없이 작아진 뜨거움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삶을 뻗었다. 붉은 비가 흩뿌려지고, 비가 떠올라 붉은 잔을 만들어냈다.
붉은 잔에서 붉은 강물이 흘러내리고, 세상이 물든다. 세상이 나의 삶을 겁박하며, 삼키려 든다.
나의 삶을 겁박하고, 부정하는 세상이 싫어, 선을 그었다. 미약한 선이 세상에 부딪혀 끊어진다. 끊어지는 선을 보며, 다시 선을 그었다. 그어진 선에 또다시 선을 그어 보태고, 삶을 더하였다.
삶이 더해진 푸른빛에 세상이 조각나, 붉음이 흩어진다. 붉음이 흩어진 자리에, 푸른빛이 채워진다.
푸른빛을 머금은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붉은빛이 나를 덮쳐온다. 모든 것을 삼키고, 찢어발길 듯한 빛을 피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내 삶을 뻗었다.
붉은빛과 내 삶이 맞닿고, 항거할 수 없는 힘이 나를 짓누른다. 이를 꽉 깨물고 버팀에도, 조금씩 밀려난다.
‘그것이 너의 전부인가?’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가 울려오고, 그 목소리의 물음을 부정한다.
아니다. 악의 따위에 짓눌리고 밀려날 만큼, 내 삶이 가볍지 않다.
밀려나지 않기 위해, 삶을 앞으로 더 뻗는다. 그리고 기묘한 감각이 나를 떠민다. 떠미는 힘과 함께, 삶을 뻗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밀려나기만 하던 푸른빛이 환하게 빛나며, 붉은빛을 밀어냈다. 그리고 찰나의 틈이 생겨나고, 나의 삶으로 붉음을 부정하였다.
붉음이 갈라지며, 피가 흩뿌려진다. 갈라지며, 쓰러진 붉음이 저주를 토해냈다.
“당신이 이런다고 뭐가 변할 것 같습니까? 당신의 삶은 이미 저주로 인해, 파멸이 점철되었고 저주는 풀 수 없습니다.”
괴물의 악에 받친 저주가 나를 덮치고,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오던 목소리가 나의 입을 빌렸다.
“저주 때문에 내가 파멸한다고 하여도, 나는 발버둥 칠 것이다. 이번 삶이 실패한다고 하여도, 다른 모습이 되어서라도 이겨낼 것이다.”
“... 그렇다면, 죽음에서 당신의 파멸을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괴물의 육신은 한 줌의 핏물이 되어 녹아내리고, 하늘에 떠 있던 붉은 잔은 빛을 잃고 떨어졌다.
그것들이 사투가 끝났음을 고하였다.
기묘한 감각과 빛이 흩어지며, 고통과 육신의 비명을 찾아왔다. 그것들이 머리를 울리지만,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걸음은 아픈 사랑 앞에서 멈춰서고,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미약한 호흡과 박동이 느껴진다. 그 사실에 감사하며, 남아있는 포션을 그녀의 입에 부어 넣었다.
남아있는 포션을 다 부어 넣었음에도, 그녀의 창백한 안색과 미약한 호흡이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나를 찢어발긴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황녀의 목소리가 머리에 울린다. 그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황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상황에 여러 생각들이 올라오지만, 쓸모없기에 버렸다.
꺼져가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초초히 황녀를 기다린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너무나 길었던 시간이 흐르고, 황금빛의 물결이 계단에서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물결이 공간을 뒤덮고, 우리를 감싸 안았다.
포근함과 따스함이 밀려오며, 비명을 지르던 육신이 잠잠해졌다. 그리고 생명이 꺼져가던, 그녀의 창백한 얼굴이 생기를 되찾고, 희미한 호흡은 안정되었다.
아직 눈을 뜨지 않았지만, 위기를 넘겼음을 알 수 있기에, 그저 기쁨을 만끽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저 때문에... 죄송합니다.”
울먹이는 황녀의 목소리가 물결 너머에서 들려왔다. 원인이 되었던, 황녀를 원망하기도 하였지만, 그녀도 피해자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피해자다. 그렇게 책망하지 않고, 그녀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죄책감을 느끼지 마십시오. 전하 또한 피해자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자책 섞인 말을 하려는 황녀의 말을 끊고자, 입을 열었다.
“저희는 스스로 검을 들었고, 자신의 의지로 책무를 선택한 자들입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옵소서. 그것이 저들의 의기를 빛바래게 만듭니다.”
“... 알겠어요.”
황금빛의 물결이 흩어지고, 눈시울이 붉은 황녀와 호위의 모습을 들어났다.
“그럼,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예법에 어긋나지만, 솔직한 마음이 담긴 말이 마음에 스며들었기에, 지적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확신한 것을 그녀의 입으로 듣기 위해, 입을 열었다.
“황녀 전하,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건, 전부 답해드리겠습니다.”
“아르미스님의 축복을 받으셨습니까?”
그 말에 호위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지만, 황녀는 그것을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네. 그분께 과분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확신한 것이, 사실이 되었다. 그러니, 이제 희망을 확인할 시간이다.
“그러면, 청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들어드리겠습니다.”
“공녀님의 저주를 치료해주십시오.”
나의 말이 끝나고, 황녀의 주변에서 황금빛의 물결이 흘러나와 그녀를 감싼다. 시간이 흐르고, 황녀의 이마에 구슬땀이 흐르며 창백해지고, 황금빛 물결이 흩어진다.
“죄송합니다. 제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 말에 참담함이 밀려온다. 한 줄기의 희망이 다시 꺾여 나갔다. 희망이 꺾여 나간 자리에, 정체 모를 목소리와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오른다. 그 대화들이 꺾여 나가는 희망을 붙들었다.
“황녀 전하, 잠시 자리를 좀 비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조용히 잠든 그녀를 품 안에 품은 채, 배정된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침대에 그녀를 눕히고, 그녀의 손을 잡고 나의 마음을 털어놓았다.
“당신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여 아팠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을 밀어내었습니다. 밀어내었는데, 어느덧 다가오는 당신의 모습에 흔들리면서도 부정하였습니다. 부정하고, 또 부정하였는데, 당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보니, 또 흔들렸습니다.”
떨려오는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당신의 눈물에 부정하던 마음을 버렸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또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니기에, 부정하던 마음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목이 다시 떨려온다. 떨려오는 목을 짓누르며, 말을 이어 나간다.
“인정하였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당신의 마음만을 받아먹으며, 애매한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 시간이 흐르고, 오늘을 맞이하였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쓰러져가는 당신을 보며 후회하였습니다. 마음 한 점 전하지 못하고, 당신을 떠나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그렇게 짓눌렸지만, 또 상처에 겁먹은 겁쟁이는 깨어있는 당신에게 전하지 못하고, 이렇게 잠든 당신을 바라보며 고백합니다.”
“아이리스, 당신을 사랑합니다.”
떠나보낸 삶에서는 그토록 많이 했던 말을, 처음으로 그녀에게 전하였다. 그 마음을 전하고, 나의 입을 빌렸던 목소리가 했던 말을 빌렸다.
“저주가 당신을 집어삼켜도, 발버둥 치며 당신을 구하겠습니다. 이번 삶이 실패한다고 하여도, 다시 돌아와 당신을 구하겠습니다. 나의 사랑이여.”
그녀의 손을 잡으며, 삶을 건 맹세를 하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저번에 매일 저녁 8시에 올린다고 했는데, 번복하겠습니다. 후회 파트가 나오기 전까지는 써지는 대로 올리며, 연참 가능한 날은 연참을 하겠습니다.
+오늘 부모님 모시고, 식사를 가서 다음편이 12시 넘어서 올라갈꺼 같습니다.
+에피소드가 끝났으니, 아이들 외전이 나갑니다.
번복하여 죄송합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