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화
타락한 성녀
그녀들의 등장과 함께 찾아온 안도감은, 얼마 가지 못하고 흩어졌다.
세상을 집어삼켰던 붉은빛이 괴물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중압감이 공간을 짓누른다. 다시 몸이 굳어가고, 무력감이 나를 짓누른다. 그 감각에, 괴물의 존재감이 각인된다. 그녀들에게 도망치라 외치고 싶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잡것들이 귀찮게 하는구나.”
괴물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붉은빛은 수백의 창이 되어 그녀들에게 쏟아졌다. 푸른 불꽃이 둥근 막이 되어, 붉은 비를 가로막았다. 붉은 비와 푸른 불꽃이 부딪히고 흩어지는 연기 너머로, 푸른 반월이 뚫고 나와 괴물에게 쏟아진다.
푸른 반월은, 붉어진 괴물의 손끝에 찢기며 흩어진다. 그리고 흩어진 반월의 빛무리에서 푸른 불길이 솟구쳐, 괴물을 집어삼킨다.
“잡것들이라 생각하였는데, 카이안의 집행자와 그 종자구나.”
괴물의 목소리와 함께, 붉은빛이 푸른 불꽃을 집어삼킨다. 푸른 빛이 사라진, 붉은 불꽃이 터져나간다. 터져나간 잔불 너머로, 상처 하나 없는 괴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누가 종자란 말이냐!”
고압적인 아이리스의 목소리와 함께, 푸른 반월이 다시 괴물을 덮친다. 푸른 반월은 괴물의 손에 닿고, 붉게 물들며 흩어졌다.
“누구를 칭하는지 잘 아는 거 같다만, 굳이 말해주어야 하느냐?”
괴물의 말을 끝으로, 괴물의 손에서 붉은빛이 모여 달이 태어났다. 달은 붉은빛과 함께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막 태어난 달이 쪼개지고 작은 별들이 탄생하며, 별의 비가 쏟아진다.
푸른 불꽃이 다시 한번 둥근 막을 치지만, 붉은 별들이 터지고 불꽃이 흩어진다. 흩어진 잔불을 뚫고 남아있는 별들이 떨어진다. 세상이 붉게 물든다.
붉어진 세상 너머로, 푸른 바람이 불어오며 붉은빛이 사라진다. 푸른 바람은 하나의 화살이 되어 괴물의 심장을 노렸다. 화살은 괴물의 심장에 닿지 못하고, 붉은빛에 삼켜져 사라졌다.
“집행자치고 강한 것 같다만, 너희들의 울분을 풀기에는 부족하구나.”
“그 더러운 입 닥쳐라!”
레이첼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오며, 단검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강렬한 빛은 레이첼을 집어삼키고, 짓누르는 중압감이 조금 옅어진다. 그리고 빛이 흩어져 내리며, 푸른빛의 갑옷을 두른 레이첼이 나타났다.
“집행자에 성물이라. 나 때문에 이단으로 몰려서 화가 많이 났나 보군.”
괴물의 조소가 섞인 말과 마녀의 일지에 적힌 내용들이 이어진다. 자신의 죽음 뒤, 카이안이 이단으로 몰릴 거라던 마녀의 말과 마녀의 손아귀에 들어갔던 사도와 아르미스교단. 그리고 아르미스교단의 상징인 성녀와 괴물의 옷에 새겨진 뒤집힌 아르미스교단의 상징.
그것들이 맞물려 이어지며, 입에서 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성녀...”
“어머, 혹시 기억나셨나요?”
괴물은 역겨운 목소리가, 그 생각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표정을 보니 그런 것은 아닌가 보네요.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김빠지네요.”
역겨움이 가득한,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는 성녀였던 괴물을 향해 푸른빛과 반월이 떨어진다. 괴물의 주변에서 붉은빛이 일어나고, 푸른빛과 반월을 막아섰다. 반월은 산산이 부서지고, 푸른빛은 붉은 기운을 뚫고 괴물의 뺨에 얕은 상처를 남겼다.
“어디를 보느냐, 타락한 자여.”
레이첼의 무거운 목소리와 함께, 푸른빛을 머금은 단검이 선을 만들어낸다. 선은 괴물의 주변을 감싸던 붉은빛을 몰아낸다. 붉은빛이 사라진 짧은 틈 사이로, 반월이 또 쏟아진다. 처음보다 더 커진 반월은 괴물의 손에 닿고, 작은 흔적을 남겼다.
“성질이 급한 자들이구나.”
괴물의 짜증이 섞인 말과 함께, 붉은빛이 거칠게 터져 나온다. 터져 나온 붉은 빛과 레이첼의 빛이 만나며, 거친 바람을 만들어냈다.
거친 바람을 뚫고, 반월과 함께 레이첼의 단검이 괴물의 숨통을 노렸다. 그것들은 괴물의 숨통에 닿지 못하고, 붉은 기운을 두른 손과 맞닿는다.
반월은 흩어지고, 단검에 스며든 푸른빛과 괴물의 붉은빛이 서로를 탐하며, 먹어 치운다. 서로를 먹어 치우는 빛들의 탐식이 이어지고, 반월이 계속해서 붉은빛을 방해한다.
그 탐식이 조금 더 이어지고, 붉은빛이 밀려나고 약간의 피가 튀어 오른다. 튀어 오른 피는 가시가 되어, 레이첼의 머리를 향했다. 레이첼은 그것을 감지했는지, 반보 물리며 물 흐르듯 피했다.
“사도가 아니라, 집행자가 왔기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제법 괜찮구나.”
“닥쳐라!”
다시 한번 거친 말과 함께, 선이 그어진다. 괴물은 붉은빛을 두른 손으로 비켜 막으며, 선을 흘려냈다. 푸른빛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선을 그어나간다. 괴물은 그것을 계속해서 흘려내며, 붉은빛과 푸른빛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뒤엉킨 빛무리 사이로 반월이 스며들고, 조금씩 흩뿌려지는 피가 늘어난다.
그것이 분명 좋은 징조임에도, 불안감이 엄습한다. 피가 바닥을 적실수록 그 불안감은 점차 커지고, 불안감의 원인이 고개를 들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피가 솟구쳐 뭉치고,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형상은 점차 형태를 잡아가며, 붉은 잔의 형태가 되었다.
붉은 잔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피가 바닥에 닿으며 연기를 뿜어내었다. 뿜어져 나온 연기는 뒤엉킨 빛무리에 스며들고, 빛이 터져나갔다.
터져나간 빛무리 사이로, 튕겨 나가는 레이첼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튕겨 나가는 레이첼을, 붉은빛 덩어리가 쫓아가 내려친다. 푸른빛과 붉은빛이 다시 충돌하고, 레이첼을 감싸고 있던 푸른빛이 터져나간다.
터져나가는 빛을 눈이 감당하지 못하여, 잠시 빛이 사라진다. 빛이 사라진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참담한 결과가 눈에 들어왔다.
피를 토해내고, 숨을 헐떡이고 있는 레이첼과 붉은빛의 갑옷을 입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괴물.
그 참담한 광경에, 움직이지 못하는 몸뚱아리를 원망하였다.
“더 보여주실 건 없는가?”
괴물은 이죽거리며, 역겨운 미소를 지었다. 그 역겨운 미소에, 반월이 날아왔다. 반월은 괴물에게 닿지도 못하고, 흩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반월이 날아왔고, 계속해서 무의미하게 흩어졌다.
무의미하게 날아오는 반월은 갈수록 흐릿하고 작아졌고, 결국에는 날아오는 중에서 흩어질 만큼 약해졌다.
“발악은 끝났나?”
괴물의 조소 섞인 말이 끝나고, 괴물의 주변에 푸른빛이 일렁인다. 흩어졌던 반월의 흔적이 살아나, 푸른빛을 뿜어내며 타오른다. 타오르는 빛은 하나의 원이 되어, 괴물을 속박한다.
“아직 남았나 보군.”
속박당한 괴물의 주변에 붉은빛이 일렁이고, 빛무리의 탐식이 다시 시작되었다. 탐식이 이어지는 사이, 눈길을 빼앗는 존재감이 새로이 태어났다. 레이첼의 주변에 빛무리가 일어나고, 작은 점으로 응축된다.
작은 점으로 응축된 빛은, 너무나 찬란하여 붉게 물든 이곳을 환하게 비추었다. 붉음이 물러나고 푸름이 찾아온 세상에, 광원은 레이첼의 손에서 떠났다. 앞으로 향하는 광원을 붉은빛이 집어삼키지만, 붉은빛은 광원을 물들이지 못하고 흩어졌다.
괴물은 다급히 붉은빛을 끌어올려, 속박하던 빛을 끊어내고 손을 뻗었다. 찬란한 광원과 붉은 손이 닿고, 광원은 저항감이 없이 그저 앞으로 전지하여, 막아서는 것을 부수어버렸다. 터져나가는 피와 살점이 흩뿌려지고, 광원이 괴물의 가슴에 닿는다. 그리고 세상이 새하얗게 변한다.
한 줌의 어둠마저 찾아볼 수 없는, 빛이 잠깐 이어지고 흩어졌다. 바닥을 흥건히 적시는 피와 살점. 사라져 버린 중압감과 의지를 듣기 시작한 몸. 그것들이 환희를 피워냈다.
그 환희 속에서, 휘청거리는 레이첼의 신형이 보인다. 휘청거리는 레이첼에게 뛰어가, 그녀를 부축한다.
“형제님. 저 어땠어요?”
성한 곳 하나 없는 상처투성이에, 말할 힘조차 별로 없어 보이는 상태임에도, 웃으며 말하는 그 말에 목이 멘다. 메이는 목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최고였다.”
그 말에 그녀는 웃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무리한 보람이 있네요... 무리했으니까, 이제 좀 쉴게요.”
“그래, 편히 쉬어라.”
그녀의 은은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무게가 온전히 전해져온다. 그녀의 무게를 온전히 느끼며, 지쳐서 주저앉아 있는 아이리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잠들었나?”
“네. 잠들었습니다.”
“포션을 먹여야 하니, 여기 눕혀라.”
아이리스는 그리 말하며, 자신의 허벅지를 가리켰다. 그녀의 허벅지에, 조심스럽게 레이첼의 머리를 놓았다. 아이리스는 허리춤에서 포션을 꺼내어, 레이첼의 조금씩 넣어주었다.
매일 같이 투닥거리며 거부감을 비추었으면서, 어느덧 거부감이 사라진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왜 웃는가?”
“별거 아닙니다.”
“신경 쓰이니 말해보거라.”
“그냥, 지금 두 분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웃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그대는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그렇습니까?”
“그래. 저번에도 그렇고...”
“시끄럽다.”
아이리스의 말이 끊어지고, 스산한 목소리와 함께 살기가 쏟아졌다. 아이리스는 나를 밀쳐냈고, 붉은 창이 그녀의 복부에 박혔다.
피가 튀었다. 그녀의 피가 튀었다. 그 광경을 믿지 못하고,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붉은 기운이 내 손을 쳐냈다.
손을 가로막는 붉은 기운을 내리친다. 주먹의 통증이 전해진다. 무시하고 마나를 두르고 내려친다. 손이 울린다. 무시하고 다시 내려친다. 손에서 피가 흐른다. 무시하고 다시 내려친다. 살점이 찢겨나간다. 다시 내려친다. 손이 잡혔다.
“무의미한 짓입니다.”
괴물의 역겨운 미소가 나를 향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 에피소드가 고구마 같을 수 있으니, 내일부터 연참 가능한 날은 연참을 해서 빠르게 지나갈 수 있게 하겠습니다.
+이번 에피소드가 끝나면, 피폐가 조금 더 짙어질 수 있습니다.
tmi) 괴물(전 성녀)의 말투가 다른 이유는, 주인공을 뒤틀린 상태로 존중하고, 나머지들은 무가치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