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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36화 (36/59)

제 36화

황녀

황궁이 습격받고, 황궁을 넘어서 황도 전체에 살얼음판 같은 긴장감이 맴돈다. 황도와 황궁를 지키는 경비병들의 신경은 날카로워져 흉흉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검문소의 검문은 철저해지다 못해, 통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황도 내에 불시 검문이 늘어났고, 황제의 의심을 받은 자는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황성에 있는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습격의 주동자를 찾기 위해, 수색대가 꾸려졌다. 그 수색대에는 황실의 일력 말고도, 마법사들의 구심점인 마탑의 마법사들과 아르미스교단의 인력들도 포함되었다.

그 수색대에 아르미스교단이 섞여 있는 것이 탐탁지 않지만, 그것에 대해 의견을 낼 만한 위치도 아니고 역풍을 맞기 좋은 시기다. 그저 그들을 경계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그들을 경계하며, 황녀 호위 임무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흉흉한 분위기와 다르게 특별한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습격으로 인해 경비가 강화된 곳을 또 습격할 머저리는 없다. 그리고, 황궁을 습격한 무리가 철저하게 준비한 후에 습격했을 테니, 단기간에 수색의 실마리가 나올 리가 없다. 거기다 나의 추측상 가장 유력한 후보인 아르미스교단이 수색대에 섞여 있으니, 실마리가 나올 일은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수색이 흐지부지되었을 때 황녀가 살해당할 확률이 높다. 그런 생각에 마음이 조금 조급해진다.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조급하게 만드는 생각들을 무시하고, 황녀의 방이 있는 복도에서 경비를 선다.

하늘의 중심에 떠 있던 태양이 조금씩 내려오고 있을 때, 발걸음 소리가 울린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 익숙한 발걸음 소리지만, 그렇다고 경계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 검 손을 올려놓고, 그 발걸음 소리를 경계한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발걸음 소리의 주인들이 모습을 보인다. 다구 세트를 들고 있는 시녀장이 걸어온다. 발걸음 소리의 주인들을 확인했기에, 검에서 손을 뗀다.

“수고 많으십니다.”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정면을 응시한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조금 지나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황녀 전하께서 차를 권하십니다.”

“죄송하지만, 경비를 서고 있기에 그럴 수 없습니다.”

황족의 권유를 거절하는 건 큰 무례지만, 경계가 소홀해진 사이 습격이 발생하는 것보다 무례를 범하는 것이 낫다.

그렇기에 돌아보지도 않고, 황녀의 권유를 거절하고 혹시 모를 상황을 경계한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시녀장이 내 앞쪽으로 와 차가 담긴 잔을 내민다.

“황녀 전하께서 경의 고생을 생각하여, 목을 축이라고 권하십니다.”

황녀의 배려에 또 거절하지 못하고, 그 잔을 받아 들고 입에 털어 넣는다. 너무 뜨겁지 않은 차가 입안을 스치며, 향긋한 향을 남긴다.

“황녀 전하의 배려에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리 전해드리겠습니다.”

시녀장은 찻잔을 들고 사라지고, 입안에서 맴도는 차향과 함께 시간이 흐른다.

태양이 완전히 기울어 지면과 만나 세상을 물들인다. 그것을 보니 레이첼과 교대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알아차렸다. 반나절 동안 경계하느라 소모된 심력을 조금 더 쥐어 짜내며, 그녀를 기다린다.

그렇게 심력을 소모하고 있을 때, 희미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레이첼이 왔다. 손을 흔드는 레이첼에게 손을 작게 흔들어주고, 인수인계하고 자리를 뜬다.

배정된 방으로 가 보급받은 갑옷을 벗고. 간단히 씻은 후 침대에 몸을 맡기니 정신이 몽롱해진다. 몽롱해진 정신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몽롱한 정신이 어둠에 잠기기 시작할 때, 노크 소리가 들린다. 수마는 조금 떨어져 나가고, 수면 직전 방해를 받아 짜증이 조금 올라온다. 올라오는 짜증을 누르고 문을 여니, 아이리스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의 시선이 나의 얼굴에서 가벼운 잠옷 차림으로 향한다.

“혹시 자고 있었나?”

“조금 누워있었을 뿐입니다.”

“그렇군. 쉬는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황녀 전하께서 저녁 식사에 그대와 나를 초대하셨네.”

“그러면, 옷만 금방 갈아입고 나오겠습니다.”

허벅지를 꼬집어 몽롱한 정신을 깨우고, 가장 깔끔한 옷으로 환복하고 그녀와 함께 황녀님의 방으로 향한다.

경비를 서고 있는 레이첼이 우리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가, 얼굴을 찌푸린다. 그 얼굴을 보니 ‘저만 빼고 두 분이서 노시는 거예요?’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든다.

“수고하게.”

아이리스는 그리 말하며, 레이첼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지나간다. 레이첼의 얼굴이 조금 더 찌푸려진다.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아이리스가 황녀님의 방에 노크한다.

“황녀 전하 아이리스입니다. 알릭경과 함께 왔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고, 배를 자극하는 향이 흘러나온다. 그 향 너머에 만찬들이 차례져 있고, 상석에는 황녀가 앉아 있었다.

“초대에 응해줘서 고마워요.”

“저희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와 아이리스의 상투적인 대화가 끝나고, 우리는 식기가 놓여있는 자리에 앉는다.

“식기 전에 드세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만찬을 조금씩 맛보며 눈을 조금 돌려 황녀를 본다. 황녀는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도움 없이 자연스럽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나의 시선이라도 느껴졌는지, 황녀는 나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돌린다.

“신기하시나요?”

황녀의 말에 무례를 범했음을 깨닫고 입을 연다.

“무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누구나 신기하게 보는 걸요.”

“그렇다고 하여도, 무례를 범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의 말이 끝나자 황녀는 미소를 짓는다.

“알릭경은 성실하시면서 고지식하시군요.”

“조금 그런 면이 있습니다.”

황녀의 말에 아이리스가 호응하고, 황녀는 작게 웃음을 터트린다.

“두 분이 약혼자라 그런지 잘 아시는 거 같네요.”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하나 알아갈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어째서인지 부끄러움이 찾아온다.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이런 약혼자가 있는 알릭경이 부럽네요.”

“과찬이십니다.”

아이리스의 말에 황녀의 미소가 조금 짙어지고, 다시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알릭경은 좋은 약혼자를 두셨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황녀의 질문에 조금 당황스러움이 찾아오고, 아이리스의 눈초리가 나에게 향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 감각에 조금 단어를 고심하다가 입을 연다.

“저에게는 과분한 사람입니다.”

여러 의미로 과분하다...

“그렇군요. 알릭경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아이리스경은 알릭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에게 향했던 질문의 화살이 아이리스에게로 향한다. 그리고 그 화살에 아이리스는 잠시 침묵한다.

“저도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좋은 약혼자를 만나셨네요.”

황녀의 얼굴에 미소가 자리해 있고, 목소리도 밝았음에도, 어째서인지 어두워 보였다.

“저도 두 분 같은 약혼자를 만나고 싶네요.”

그녀의 말에 밝았음에도, 어둡게 느껴져 입을 열지 못했다.

“황녀 전하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 그러면 좋겠네요.”

아이리스의 상투적인 답에 황녀는 잠시 뜸을 들이고 입을 열었다. 그 잠깐의 뜸이 신경 쓰인다.

방에는 잠시 침묵이 찾아왔고, 얼마 안 가서 황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분이 같이 오셨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그렇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얼굴이 조금 붉어진 황녀는 잠시 뜸을 들이고 입을 열었다.

“그... 약혼만 하셨는데, 벌써 같이 사시는 건가요?”

“같이 사는 건 아닙니다. 한동안 같이 다녔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같이 다니셨다고 했는데, 여행이라도 다니셨나요?”

“그러기도 했습니다.”

“젊은 남녀 둘이서 여행을...”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요! 문제 될 건 없죠.”

어째서인지 황녀의 얼굴은 조금 더 붉어지고, 당황한 듯한 목소리를 냈다. 황녀는 물을 조금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보니 알릭경은 소집에 응할 의무가 없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의무도 없는데, 왜 이런 위험한 곳에 오셨나요?”

“그건...”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황녀의 질문에 대답하려고 할 때, 아이리스가 나의 말을 끊었다.

“처음에는 위험하다고 그를 말렸습니다. 그런데 알릭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공녀님의 약혼자이니, 저 또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 말에 더 말리지 못하고, 같이 왔습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맞는 말이지만, 내가 했던 말을 다시 들으니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알릭경 고지식한 분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로맨틱한 면이 있으시네요.”

“그렇지요.”

황녀의 말과 긍정하는 아이리스의 말에 얼굴이 뜨거워져,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그런 느낌에 목이 타 물을 들이킨다.

물을 들이키고 컵을 내려놓으니, 거대하고 이질적인 마나의 파장이 느껴진다.

그 이질적인 느낌에 허리춤에 손을 뻗었지만, 검이 잡히지 않는다. 식사 자리에 오면서 검을 놓고 온 것이 생각났다. 최악이다. 아이리스를 한 번 바라본다. 그녀는 검을 뽑아 들고 황녀의 주변에 다가가 주변을 경계했다.

“공녀님. 제가 확인해보고 오겠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그대는 검도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가는 겁니다. 검도 없이 황녀님을 호위할 수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저희의 임무는 황녀님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이리스는 입술을 씹고는 입을 연다.

“그대도 내가 했던 말을 잊지 말게. 미련하게 죽지 말게. 허무하게 죽지 말게.”

“마음에 새겨놓겠습니다.”

그리 말하고 방문을 열었을 때, 뒤에서 작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련한 사람 같으니...”

그녀의 말을 들으며, 방에서 나가니 단검을 뽑아 든 레이첼이 보인다.

“형제님도 느끼셨죠?”

“그래, 지금 확인하러 가는 길이다. 넌 황녀님 호위에 집중해라.”

“... 형제님 위험하면 바로 도망치세요.”

“알았다.”

진지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느낌이 안 좋다. 감이 좋은 그녀의 말이기에, 그 말을 새겨들으며 아래로 내려간다.

1층으로 내려오니 미세한 혈향이 느껴진다. 그 혈향에 불길함이 증폭되었을 때, 붉은빛이 세상을 집어삼킨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 편으로 공모전 예선이 끝납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과제 시즌과 시험기간 동안 연재하다 보니, 여러분들에게 죄송하게도 시간에 쫓기듯 급하게 글을 쓰고 퇴고조차 똑바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조금 정비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어, 5월 1일까지 휴재를 하며 주인공 가족파트와 전체적인 어색한 부분에 대해 수정하고 오겠습니다.

주인공 가족 파트는 복수는 빼고, 어머니의 서사와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주인공의 삶의 방향성을 얻는 것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수정할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따라와 주시고 계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께 정말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지금까지 적을 수 있었습니다. 돌아왔을 때 더 양질의 글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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