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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35화 (35/59)

제 35화

황궁과 황녀

눈을 어지럽히는 화려한 장식품들이 놓인 복도가 눈에 들어온다. 황제의 권위와 부를 상징하는 듯한 그 복도는 이질적이었다.

화려한 장식들은 위치는 어딘가 어색했고, 미세하게 혈향이 느껴졌다. 그것들이 주는 이질감에 신경을 빼앗긴 사이에, 화려한 복도와는 다르게 조금은 밋밋한 느낌의 문 앞에 도착했다.

우리를 안내하던 남자는 품에서 종을 꺼내고는 한 번 흔든다. 맑은 종소리가 울리고, 흐릿한 빛이 보이며 마나의 흐림이 잠시 느껴졌다. 그것들로 미루어보아, 정체 모를 마법이 해제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었다.

그 모습에서 일의 심각성을 다시 느껴진다. 그렇게 느끼고 있을 때, 문이 열린다. 밋밋한 문과는 다르게, 넓고 화려한 방이 펼쳐진다. 그 화려한 방을 다 보기 전에, 황제가 있기에 시선을 바닥으로 둔다. 그리고 수많은 시선이 우리에게 향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중에는 명백한 경계의 눈초리가 섞여 있음이 느껴진다.

“신성과 신성의 약혼자입니다. 폐하.”

우리를 안내하던 자의 말에 시선이 조금 가벼워진다.

예법대로 시선을 바닥으로 둔 상태로,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표하려 할 때, 은은한 위엄과 피곤함이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예는 생략하고 고개를 들라.”

그 말에 고개를 든다. 중무장한 기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과 서류가 잔뜩 쌓여있는 책상 옆에 서 있는 노인. 그리고 책상의 뒤에 서 있는, 기세가 범상치 않은 중년인과 책상에 앉아있는 황제가 눈에 들어온다.

“급하게 불렀음에도 바로 와주어 고맙구나.”

“당연한 일입니다.”

아이리스의 고저 없는 대답에 황제의 무거운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고, 다시 원래의 위치를 찾아갔다.

“그리 말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지금부터 같이 온 병력과 함께 황녀를 호위하게.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는 관료를 통해 서류로 전달하겠네.”

“알겠습니다.”

지극히 짧은 대화가 끝나고, 아이리스의 뒤를 따라 방에서 빠져나온다.

“제가 다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를 처음에 안내해 주었던 자가 그리 말하며, 걸음을 옮긴다. 걸음은 한참을 이어져 궁 밖으로 향했고, 황제가 거하는 궁전에서 조금 떨어진 흰 궁전이 눈에 들어온다. 백합궁이라 불리며, 결혼하지 않은 황녀들이 머무는 궁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궁전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북부의 전사들과 레이첼이 우리를 향해 걸어온다. 각을 잡고 걸어오는 전사들과는 다르게, 레이첼은 혼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아이리스의 뒤편에 선다.

전사들은 열보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선다. 아이리스는 그런 전사들을 한 번 훑어보고, 백합궁을 한번 훑어본다.

“병력이 안 보이는데, 내가 이끌고 온 병력만으로 호위해야 하나.”

“황녀 전하의 전담 호위 한 명 말고는, 전부 차출되었습니다.”

그 말에 그녀의 이마에 잠시 주름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면 백합궁의 도면을 가져다주게. 그리고 보급은 아침 점심 저녁에 맞춰서 해달라고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우리를 안내하던 자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고는 품에서 흰 종을 꺼낸다.

“이 종을 울리시면, 황궁 전체로 신호가 전달됩니다.”

“유용하게 쓰도록 하지.”

“도면과 서류를 챙겨서 다시 오겠습니다.”

“그래, 가보게.”

우리를 안내했던 자는 허리를 숙이고, 왔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고, 아이리스의 시선은 전사들에게 향한다.

“다들 들었듯이 우리들만으로 황녀 전하를 호위할 것이다. 명령은 나중에 세세하게 내리겠다. 지금은 궁전 주변에서 경계를 서면서, 다가오는 자들은 전부 붙잡고 신원을 확인해라.”

그녀의 말에 화답하듯이 발 구르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기사들은 흩어진다.

“우리는 황녀전하께 가보지.”

“알겠습니다.”

“네!”

“레이첼. 저택에서도 말했듯이 지금부터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필담으로 해라.”

“네...”

레이첼의 시무룩한 목소리를 끝으로, 우리의 발걸음은 백합궁의 안으로 향했다. 휘황찬란하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고풍스러운 멋이 녹여져 있는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시녀 복을 입은 여인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여인은 우리에게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한다.

“백합궁 총괄 시녀장 벨라라고 합니다. 브란트 공녀님 맞으십니까?”

“그래, 맞다.”

“황녀전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벨라라고 소개한 여인의 뒤를 따라 걸으며, 이상함을 느낀다. 사람이 너무 없다, 호위는 우리가 한다고 하여도, 궁을 관리하는 최소한의 인원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시녀장이라 칭한 여인이 너무 젊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인이 백합궁의 시녀장? 말이 안 된다. 무언가가 있다.

그 이상함에 대해 생각하며,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은 베일에 싸인 여인이자, 겨우 20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던 비운의 황녀가 있을 방으로 향한다.

적막한 궁전의 가장 꼭대기 층.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방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시녀장이 문에 노크를 한다.

“황녀전하. 신성과 일행분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시녀장의 말이 끝나자,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젊은 남성이 황녀의 얼굴을 보면 안 되기에, 고개를 숙인다.

“혹시 예를 표하고 계신다면, 그러지 말아주세요.”

뭔가 이상한 황녀의 말에 고개를 든다. 풍성한 금발에 눈을 지그시 감은 여인과 중무장을 하고, 여인의 뒤에 서 있는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황녀로 보이는 여인의 손과 눈에 시선이 쏠린다. 몸을 지탱하기에는 너무 얇은 지팡이와 예법에 어긋나게 감고 있는 눈. 그것이 황녀가 사교계에 데뷔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한다.

“저는 볼 수가 없어, 예를 표하셔도 의미가 없으니 하지 말아 주세요.”

이곳에서 가장 높은 지위임에도 말을 높이고 있는 황녀의 모습에 이상함이 느껴진다. 그 이상함에 아이리스가 입을 연다.

“황녀전하, 말을 낮추십시오.”

“멀리서부터 저를 호위하러 오신 분들이신데, 그럴 수는 없어요.”

“... 알겠습니다.”

혀로 만들어진 검이 오가는 황궁에 어울리지 않는 순수함이 깃든 말에, 아이리스는 더 이상 종용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이곳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여 지켜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이리스의 상투적인 말에 황녀는 웃으며 말하였다.

“여러분들을 기억하고 싶은데, 이름을 말해주실 수 있나요?”

“아이리스 브란트입니다.”

“알릭 노르먼입니다.”

나의 말이 끝나고 잠시 침묵이 찾아온다. 그리고 황녀는 마치 눈이 있는 사람처럼, 얼굴이 레이첼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다른 한 분의 이름은 어떻게 되시나요.”

“레이첼입니다. 말할 수 없기에 대신 말하였습니다.”

“... 혹시 선천적인 건가요.”

밝았던 황녀의 목소리가 가라앉는다,

“그건 아닙니다. 혈족의 규율 때문에, 금언을 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황녀의 부탁임에도 말하지 않는 것이 엄청난 무례임에도, 그녀는 화내지 않고 오히려 안도한 듯한 목소리를 냈다.

“목소리로는 기억할 수 없으니까, 잠시 다가와 주실래요?”

황녀의 말에 레이첼이 황녀에게 다가간다. 호위의 경계심이 가득한 시선이 레이첼을 주시한다.

“레베카. 저를 지키러 와주신 분들께, 그런 시선은 무례에요. 시선을 거두세요.”

“황녀전하, 이것이 제 일입니다.”

“레베카.”

“... 알겠습니다.”

황녀의 말에 호위의 시선이 가벼워진다. 그리고 황녀가 허공에 손을 뻗는다.

“손을 내밀어 주세요.”

황녀의 말에, 레이첼이 황녀의 손에 손을 얹는다. 황녀는 레이첼의 손을 조금 주무르고 놓아준다.

“레이첼경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그리 말하고, 우리의 이름을 한 번씩 부른다.

“아이리스경, 알릭경, 레이첼경. 모두 잘 부탁드려요.”

“황녀전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미소를 지으며 부탁하는 그녀의 말에, 아이리스는 고저가 없는 상투적인 느낌이 아닌 조금 진지한 어투로 말을 했다.

“황녀전하. 경비를 계획을 세워야 하여,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네. 나중에 다시 찾아와주세요.”

“알겠습니다.”

황녀는 손을 작게 흔들며 우리를 배웅한다. 문이 닫히고 이상한 기분이 맴돈다. 오만함의 극치를 달리는 황족들과 전혀 다른 순박한 여인이, 이유도 모른 채 죽었다는 사실이 생각나 조금 안타까웠다.

“나는 내려가 볼 테니, 그대들은 여기를 지켜주게나.”

“알겠습니다.”

아이리스가 가버리고, 레이첼이 나의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레이첼 쪽을 보니, 그녀가 필담을 적은 책을 내민다.

「형제님. 황녀님 사도신 것 같아요.」

그녀의 적은 글이 말이 안 되어, 잠시 눈을 의심했다. 사도는 모시는 신의 간택을 받아 그 종교의 상징이자, 수장이건만. 황녀가 그런 사도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확실한가?」

「처음에 봤을 때, 기운이 너무 약해서 긴가민가했는데, 손을 잡았을 때 느껴진 기운으로 확신했어요.」

레이첼이 사도를 알아볼 수 있는 건 둘째치고, 머리를 어지럽히는 사실에 많은 의문이 스쳐 지나간다.

「혹시 무슨 신의 사도인지 알 수 있나?」

「그거까지는 모르죠. 설명하기 힘든데, 압도적인 영혼의 존재감? 아무튼 그런 느낌이 있어서 알아볼 수는 있는데, 신까지는 알 수 없죠.」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레이첼은 중요한 부분에서 답을 알지 못하고, 그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도 뭐 생각나는 거 없나? 추측 같은 거라도 좋다.」

「굳이 추측하자면, 아르미스님의 사도 아닐까요? 제가 알고 있는 신들 중 사도가 없는 신은 아르미스님 뿐이에요.」

그녀의 말에 머리가 더 저번 삶에서 본 문헌과 기억, 그리고 이번 삶에서 본 문헌들에 대한 기억이 쏟아져 나온다.

아르미스의 사도. 제국을 건국하는 데 지대한 도움을 준 성녀. 모든 병자와 저주를 치료하는 자. 그리고 마녀에 의해 타락해버린 자. 그 덕분에 타락한 아르미스교. 그리고 성녀로 추측되는 황녀. 그리고 저번 삶에서 일어 났던 황녀의 죽음.

쏟아져 나오는 기억들이 맞춰지며, 확신을 담은 추측을 만든다.

아르미스교에 남은 마녀의 잔재가 사도가 될 황녀를 죽였다. 그리고 이번에 일어난 사건도 그와 관련 있을 것이다.

최악이다. 황성을 습격한 무리가 이곳을 노리고 있을 확률이 너무 높다. 그런 최악의 상황 속에, 한 자락의 기대가 피어난다. 그 기대를 확인하기 위하여, 다시 필담을 한다.

「혹시 사도의 능력이 전대 사도의 능력과 동일할 수도 있나?」

「생각보다 흔한 일이에요. 카이안님은 매번 사도들에게 무의 축복을 주세요.」

기대는 확신을 얻고, 희망이 되어 피어난다. 황녀를 지킬 수 있다면, 저주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시험은 오늘부로 끝나 내일부터는 8시에 올라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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