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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34화 (34/59)

제 34화

이변

수확제가 끝나고, 아이리스와 나의 삶에 티타임이 자리를 잡았다.

수확제의 의식이 끝나고 가볍게 차 한잔을 마신 것으로 시작하여, 오전과 오후에 한 번씩 티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런 시간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였는데, 지금은 생각이 조금 변하였다. 그저 차 한잔을 마시는 시간이지만, 어째서인지 피로가 풀리고 활력이 돌았다.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기에, 어느 순간부터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도 그 시간이 찾아왔다. 서류가 잔뜩 놓인 그녀의 집무실에 마음이 차분해지는 향이 퍼진다. 그 향을 음미하며, 그 시간을 같이 음미한다. 우리는 서로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기에 특별히 할 만한 말은 없어 조용했지만, 그 시간은 음미할만한 풍미를 주었다.

그렇게 쌉싸리한 차와 함께 시간을 음미하고 있을 때, 시끄럽지는 않지만 귀에 박히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저번 삶에서 몇 번 들었던 소리다. 먼 거리에서도 얼굴과 목소리를 전달해 주는 마법이 걸린 수정구의 수신음이다.

그 소리에 흥미가 생긴다. 그렇기에 수정구에 다가가 수신을 받는 그녀를 유심히 바라본다. 수정구에서 찬란한 금색의 빛이 잠깐 뿜어져 나오고 얇은 막이 쳐진다. 저 색을 보니 황실에서 온 수신이다.

그것이 조금 거슬린다. 공작가의 저주를 알고 있는 황실은 특별한 일이 아니면 수신을 걸지 않는다. 내가 브란트의 성을 짊어지고 있던 시절의 기억으로는, 황실에서 브란트 공작가에 수신을 보낸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것이 신경 쓰인다.

신경이 쓰여 내용을 듣고 싶지만, 수정의 주변에 쳐진 얇은 막이 소리를 차단하여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없었다. 그저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짧았음에도 길게 느껴진 시간이 흐르고 얇은 막이 사라진다. 아까까지만 해도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아이리스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 보인다.

“공녀님. 안색이 안 좋아지셨는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녀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입을 연다.

“황성이 습격당했다.”

그 말에 머리가 복잡해진다. 저번 삶에서는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모르고 지나칠 만한 사건도 아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

“황족 중에 다치신 분은 없지만, 상당수의 기사들이 죽었다는군.”

“그게 말이 됩니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생각을 거치지 않고 말이 나왔다. 황성은 황제 폐하가 있는 제국의 심장이다. 제국에서 물리적으로 가장 안전한 곳이자, 제국에 있는 모든 마법으로 보호받는 곳이다. 그런 곳에 습격이 벌어지고, 상당수의 기사들이 죽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녀의 말이 맞다. 말이 안 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겨울에 당도할 피바람이 일찍 와버렸다.

“그러니 아버님에게 수호자의 의무를 해 달라는군.”

수호자. 제국 최강의 검의 칭호이자, 황실을 지켜야 한다는 절대적인 의무를 가진 직책.

“하지만, 공작님이 오시려면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걸립니다.”

“그렇지. 그렇게 말하니, 일단은 지원할 수 있는 기사들을 먼저 보내달라고 하더군.”

그녀의 말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황실이 보유하고 있는 병력이 얼마나 많은데, 한시가 급하다는 느낌으로 지원을 요청하는가. 좋지 않은 징조다.

“그러면, 공녀님도 가시는 겁니까?”

“그래야 하겠지. 아버님의 대리기도 하지만, 신성이라는 칭호를 받았지 않았는가. 의무를 다해야지.”

황실을 이득을 위해 만들어진 허울만 좋은 칭호가 그녀를 옭아맨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 생각할 때, 이명이 들려온다. 흐릿한 이명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섬뜩하여 불안감을 키운다. 그 불안감이 그녀를 걱정하게 만든다.

“그러면,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안되네. 그대는 그럴 의무도 없지 않은가.”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나의 청을 거절한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반박할 근거가 가지고 있다.

“공녀님의 약혼자이니, 저 또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고, 잠깐 침묵이 이어진다.

“그대가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은 고마우나, 위험한 일이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가는 것이다.

나의 말에 그녀가 한숨을 쉰다.

“그대는 이상하게 무리하는 면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말게.”

“알겠습니다.”

그녀는 또 한숨을 내쉬고는 축객령을 내린다.

“오늘 저녁쯤에 출발할 것이니, 단단히 준비하게.”

그녀의 진지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집무실에서 나간다.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으며, 한숨을 내쉰다.

곧 다가올 겨울에 일어날 황녀의 죽음은 모습을 바꾸어, 더 포악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디서부터 꼬였길래 일이 이렇게 된 것인가?

답을 찾을 수 없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돈다. 답을 안다고 하여도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저 마음을 다잡고, 넘어야 할 산이 되었을 뿐이다. 그리 생각하며, 방으로 돌아가 검의 상태를 확인한다.

얼굴을 비추는 흠결 없는 검신이 눈에 들어온다. 손질할 필요는 없어 보이지만, 손질의 과정에서 마음을 잡을 수 있기에 기름을 먹이고 닦아낸다.

그렇게 곧 마주하게 될지도 모를 사선을 대비한다.

시간이 흘러 세상이 조금씩 붉어져 간다. 검을 챙기고 연무장으로 향한다.

연무장의 중앙에 모여있는 무장을 한 기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대부분이 모르는 자들이지만, 두 명은 아는 얼굴이다. 카터와 제이든. 나보다 먼저 떠나버린 못난 전우들의 얼굴이 보여, 기쁘면서 마음이 무겁다.

또 함께 사지로 가는 전우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무운을 빈다. 그렇게 무운을 빌고 있을 때, 나를 본 기사들이 예를 표한다. 그 모습에 나도 간단히 예를 표하고, 그녀를 기다린다.

세상이 조금 더 붉게 물들고,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걷는 레이첼의 모습이 보인다.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리스의 뒤에서, 레이첼은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든다.

그 모습에 머리가 아파온다. 레이첼의 무력은 잘 알지만, 가는 곳이 황성이기에 예법에 어두운 그녀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말하지 않았는데.

그런 생각을 모르는 레이첼은 그저 해맑게 웃는다. 그 모습에 그녀를 데리고 온 아이리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지만, 그녀를 믿기에 가만히 있는다.

우리의 앞에 선 그녀가 입을 연다.

“우리는 지금부터 황성으로 향한다. 이미 말했지만, 또 말하겠다. 빠질 자는 빠져라. 강요하지 않겠다. 죽을 각오가 된 자들만 남아라.”

그녀의 엄숙한 말이 끝나고, 고요함이 찾아온다. 빠지는 자들은 없다.

이곳에 남아있는 자들 전부가 죽을 각오가 된 것은 아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들은 없다. 그저 짊어진 것이 있기에, 죽음과 함께하기로 정한 자들일 뿐이다.

북부의 전사들은 그런 자들일 뿐이다. 그렇기에 좋아하였다.

그 생각에 심장이 뛴다. 투쟁하며 살아온 내 삶의 일부가 얼굴을 들고, 묘한 긴장감이 찾아온다.

“전부 미련한 자들뿐이군.”

언제나 그녀는 그리 말하였다.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목숨을 내건 자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그리 미련하기에, 그대들이 브란트의 이름을 짊어진 전사들인 것이겠지.”

그녀의 말에 북부의 전사들은 발을 구른다. 그 소리가 나를 자극한다.

“북부의 전사들이여, 미련하게 죽지 말아라! 헛되이 죽지 말아라! 하지만, 그대들이 짊어진 것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라!”

오랜만에 듣는 그녀의 연설과 전사들의 발 구르는 소리에 심장이 거세게 뛴다. 정신이 고양되고, 피가 끓어오른다.

“할 말은 끝났다. 이동한다.”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품고 그녀의 뒤를 따른다. 우리의 걸음은 내성의 구석 편으로 향한다. 검은색의 바닥에 그려진 어지러운 글씨와 도형들, 그리고 마법사로 보이는 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모습으로 보아. 이동마법인 텔레포트로 이동할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법사 중 가장 나이 들어 보이는 자가 그녀의 앞으로 나온다.

“공녀님 준비는 다 됐습니다.”

“고생했다.”

그녀는 마법사들의 고생을 치하하고 우리를 돌아본다.

“올라와라.”

그녀의 한마디에 전사들이 움직여 마법진 위로 올라온다.

“시작해라.”

그녀의 말에 마법사들이 푸른 액체를 마법진 위에 뿌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린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마법진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온다. 푸른빛이 우리를 집어삼키고, 부유감이 찾아온다.

눈을 어지럽히는 푸른 빛 속에서 부유감이 사라진다. 몇 번을 경험해 봤지만, 적응되지 않는 어지러움이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그리고 푸른빛이 사라진다. 풍경이 달라지고, 거대하고 찬란한 황성이 눈에 들어온다.

“신성과 북부의 전사들을 환영합니다.”

머리를 단정하게 넘기고,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자리 잡은 남성이 우리를 환영한다.

“황제 폐하께서, 신성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알겠다. 바로 가지. 알릭, 그대도 따라오게.”

그녀의 말에 고양감은 사라지고 당혹감이 찾아온다.

“그대가 약혼자의 의무를 들먹이지 않았는가. 그러니 따라오게.”

그녀는 그리 말하며 미소를 짓고는 먼저 걸음을 옮긴다. 나에게 한 방 먹인 그녀의 등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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