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화
수확제
악몽에 짓눌려 궁상맞은 짓을 했던 날로부터 보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몇 가지의 변화가 생겼다. 술에 찌들었던 전 장인어른은 술을 전부 나눠주고, 마녀의 거처를 수색할 수색팀을 꾸려서 떠났다. 그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아이리스가 공작가의 전반적인 업무를 떠맡아 바빠졌다.
그런 그녀를 도와주려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이라며 거절하고는, 공작가의 서고의 열쇠를 주었다.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뜻을 알 수 있어 매일 서고에서 시간을 보내었다. 하지만, 저번 삶에서도 다 뒤져보았던 서고였기에 별 수확은 없었다.
그런 상황이 조금 답답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제님. 축제가 열리는 날인데, 이런 곳에만 있지 말고 같이 구경하러 가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뒤를 돌아본다. 구릿빛의 피부는 희게 변했고, 귀는 사람의 귀처럼 짧아진 레이첼이 서 있었다.
그녀는 며칠 전에 새로운 축복을 받았다고 말하더니 이런 모습으로 외형을 변형시켰다. 덕분에 규율에서 자유로워 졌다면서, 답답한 로브와 복면을 방에 버려두고는 저택과 도시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형제님, 제 말 무시하시는 거 아니죠?”
쓸데없는 회상을 하는 사이에, 레이첼이 뾰로통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무시하는 거 아니다. 잠시 일정을 생각한 것뿐이다.”
“책 읽는 거 말고는 하시는 일 없으시잖아요.”
레이첼은 의심하는 눈빛을 나에게 보낸다.
“평소에는 그렇지만, 오늘은 아이리스가 도와달라고 해서 일정이 있다.”
“정말요? 저는 그런 말 못 들었는데요.”
내 말에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짓더니, 다시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다.
“혹시 저만 따돌리고, 두 분이서 노시려고 하는 거 아니죠?”
아이 같은 발상의 발언에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일하러 가는 거다.”
“정말요?”
“그래. 안 믿기면 따라와서 일 좀 도와주던가.”
“그건 사양할게요.”
일이라는 말에 레이첼은 정색하며 거절한다. 일을 시킨 적은 없지만, 어째서인지 일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녀의 모습이 조금 웃겼다.
“아무튼 잠깐만 같이 구경하러 가요.”
“안됐지만, 그는 나와 할 일이 있어서 불가능하다.”
레이첼의 말이 끝나고, 아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눈을 돌리니, 아이리스가 우리를 향해서 걸어오고 있었다.
“이럴까 봐 찾아왔는데, 오기를 잘했군.”
그녀는 레이첼을 잠시 노려보고는 나의 팔을 잡아챈다.
“일하러 갈 시간이네.”
그녀는 그리 말하며, 나를 잡아끈다. 그녀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이끌려, 서고에서 벗어난다. 뒤편에서 레이첼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그녀의 걸음걸이가 너무 빨라서 흐릿하게 흩어진다.
아이리스의 우악스러운 손길은 바깥으로 나오고 나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일하러 갈 시간이라면서 왜 바깥으로 끌고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공녀님...”
입을 열자마자 그녀가 나의 입을 막는다.
“지금부터는 공녀님이라고 부르지 말게.”
그녀는 그리 말하며, 주머니에서 푸른 보석이 박혀있는 목걸이를 꺼내어 목에 걸었다. 그러더니 그녀의 모습이 잠깐 흐릿하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인지를 저해하는 마법이 걸린 목걸이 같다.
“지금부터는 정체를 숨기고 시찰을 다닐 것이니, 공녀님 말고 아리스라고 부르게.”
굳이 직접 정체를 숨기고 시찰을 다닐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기에 그녀의 말에 수긍한다.
“알겠습니다. 아리스님.”
“높여 부르면 이상하게 보이니 편하게 말하게.”
“아가씨와 수행원 사이라면, 이상하게 보일 일도 없지 않습니까?”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그대는 정말 눈치가 없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닐세.”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얼굴을 구긴 채 걸어간다. 그녀가 저러는 이유를 생각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 걷는다.
이유를 고민하던 사이 답은 찾지 못하고, 내성에서 빠져나온다. 내성에서 빠져나오니 도시의 풍경이 펼쳐진다.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도시는 생기가 가득했다.
수확제를 맞이하여 장식품들로 꾸며진 건물과 길거리, 한몫 잡기 위해서 열심히 떠들어대는 상인들, 대낮부터 취해버린 주정뱅이들,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남녀, 한 손으로는 부모의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군것질거리를 들고 행복하게 웃는 아이들, 그런 아이를 보며 미소를 짓는 부모들.
그 모든 광경이 생기가 넘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기에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눈길을 빼앗겨 있을 때, 옆구리에서 약간의 통증이 느껴진다. 그 통증에 옆을 보니 그녀가 손을 내민다.
“그대 말대로 아가씨와 수행원이니, 나를 에스코트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내밀은 손과 그녀의 말에 웃을 뻔했다. 수행원이 아가씨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를 하는 것은 소설의 이야기건만, 그녀는 그것을 알지 못하나 보다. 그녀의 잘못된 지식을 다잡는 귀찮음을 감수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싶어서 그것을 말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는다.
“오늘 하루 잘 모시겠습니다. 아리스 아가씨.”
“그래 잘 부탁하지. 알릭.”
그녀의 찡그려진 표정은 사라지고, 은은한 미소가 자리를 잡는다. 그 모습에 나도 미소를 지으며, 따스한 그녀의 손을 잡고 걷는다.
손에 들어온 따스함에, 시리도록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부러움이 흩어진다. 알게 모르게 쌓여가던 피로가 녹아간다. 복잡한 고민들이 잊혀진다.
그저 이 순간만이 남는다.
그리 느끼며, 북적거리는 인파의 틈으로 들어간다. 손의 따스함이 조금 강해지고, 그녀와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다.
그것이 신경 쓰여 다른 것들이 들어오지 않는다. 나를 이렇게 만든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붉게 익었고, 눈은 나와 마주치고 정면을 바라본다.
정체를 숨기고 시찰하러 온 것이면서, 전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리 생각하여 웃으며, 입을 연다.
“아가씨, 가고 싶으신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잠시 뜸을 들이고 입을 연다.
“아무 곳이나 상관없다.”
시찰을 왔음에도 갈 곳을 정하지 못한 그녀의 말에,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보아 좋았다.
“그러면 적당히 안내하겠습니다.”
“그러도록 하게.”
이 시기의 수확제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이 없지만, 그저 마음이 끌리는 데로 걸으며 가게들을 둘러본다.
눈에 보이는 가게에서 간단한 먹을 것을 사 나누어 먹고, 묘기를 부리는 자들의 묘기를 보고, 싸구려 장신구를 파는 가게에서는 서로에게 장신구를 골라주며 시간을 보냈다.
별거 아님에도 마을을 가득 채워주는 시간은 아쉽게도 빠르게 흘러가, 하늘이 물들기 시작했다.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군.”
행복한 시간의 끝을 고하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그것이 야속할 정도로 아쉬웠다. 그 감정 속에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걸음은 무거움에도 시간은 빨라 어느덧 내성에 도착했다. 따스함이 손에서 빠져나간다. 그것이 아쉬워 손을 움켜준다. 그렇게 아쉬움을 곱씹고 있을 때, 그녀가 입을 연다.
“방으로 돌아가면 옷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 갈아입고 나오게.”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웃으며 입을 연다.
“저번에 약혼자로서 옆에 있어 달라고 그대에게 부탁했지. 그 부탁을 이행해 줄 시간이네.”
그 말에 아쉬움은 흩어지고, 심장이 거세게 뛴다.
“그러니 갈아입고 여기로 다시 나오게.”
그녀는 그리 말하며 안으로 들어간다. 그 모습을 보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방으로 돌아오니, 처음 보는 시종이 나에게 옷을 건넨다. 브란트 가문의 문장인 늑대가 새겨져 있는 검은색 옷. 그녀의 남편으로 살았을 시절 입었던 옷과 비슷했다. 이 옷을 보니, 약혼자로서 옆에 있어 달라는 그녀의 말이 와닿는다. 그것이 달갑다.
이상하리만큼 딱 맞는 옷의 촉감을 느끼며, 밖으로 나와 그녀를 기다린다.
붉어진 세상이 조금씩 어둠에 잠겨갈 때,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어깨가 조금 드러나는 푸른색 드레스에 아까 골라주었던 은목걸이. 그리고 굽이 있는 흰 구두. 그 모든 것이 새로워 강렬하게 다가온다.
가까이 다가오자 느껴지는 분향과 불그스름한 그녀의 얼굴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처음 입는 거라 조금 늦었군.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그보다 어떻나?”
그녀의 물음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다. 그렇지만, 그걸 표현할 말재주가 없기에 상투적인 말만이 생각난다.
“잘 어울리십니다.”
“그리 말해주니 꾸민 보람이 있군.”
너무나 상투적인 말이지만, 그녀는 미소를 보여준다. 그것이 너무 강렬하여, 머리를 어지럽히고,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감정이 키운다,
그것들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히 마음을 가다듬는다. 하지만, 이미 커져 버린 감정은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저 형편없는 연기 실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 생각하며 그녀에게 손을 뻗는다.
“가시죠 공녀님.”
“그래, 늦기 전에 가야지.”
다시 손으로 돌아온 따스함을 느끼며, 마차에 오른다. 묘한 침묵이 맴도는 마차가 조금 달리고 멈춰선다.
잠시 따스함을 놓고 먼저 내려, 따스함을 맞이한다. 맞이한 따스함을 붙잡고, 광장으로 걸어간다.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리해 있고, 중앙에는 벌목된 큰 나무들이 놓여 있다. 그런 광장의 중앙으로 우리는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수확에 대한 감사와 다음 해에 풍년이 오기를 기리는 의식이 시작된다. 모두가 침묵한 가운데, 우리는 불타고 있는 횃불을 잡고, 나무들이 놓인 곳으로 향한다.
우리는 잡고 있는 횃불을 뻗는다. 횃불의 불이 나무들로 옮겨붙고, 어두움 깔린 세상에서 빛이 타오른다. 빛이 타오르니 사방에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리고 군중의 소망이 울린다.
그저 침묵 속에서 불을 붙이고, 소원을 비는 별 볼 일 없는 의식이 이상하리만큼 가슴을 울린다. 그렇기에 군중들과 같이 소망을 빈다.
‘마녀의 저주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언제나 품었던 소원을 되뇌었다. 숨이 차도록 울려 퍼진 뿔피리의 소리가 끝이 난다. 의식의 끝이 다가온다. 마지막을 장식할 노래가 울려 퍼진다. 사람들은 한 명씩을 붙잡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잠시 놓았던 온기가 다시 나를 찾아온다.
“한 곡 추겠는가?”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저 감정에 몸을 맡기길 바랐던, 한 영웅이 만든 의식에 몸을 맡긴다. 조금 귀족적인 춤 양식이 남은 춤 속에서, 온전히 그녀를 느낀다. 그녀의 온기, 호흡, 그리고 전해져 오는 감정을 느낀다.
많이 것이 전해져 오는 춤은 빛이 다 타버릴 때까지 이어진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전개를 생각해 봤을 때, 아버지에 대한 복수 파트는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아 빠질 것 같습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야기 진행이 느려서 죄송합니다.
tmi) 주인공은 정상적인 연애를 한 적이 없어서, 그런 쪽 눈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