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화
술
창문을 검은 천으로 가려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에서 깨어난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 주변을 둘러본다. 빈 술병들이 굴러다닌다. 그 술병들을 보니 평소처럼, 술을 마시다 잠들었음을 깨닫는다.
깨닫고 나니 잠기운이 사라지고, 정신이 조금 돌아온다. 그리고 나를 좀먹는 저주가 찾아왔다.
머리가 울려온다. 아내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머리를 울린다. 벌써 십 년이 더 넘었건만, 매일매일 아내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지옥이다. 차라리 죽고 싶다. 지쳐서 삶을 놓아버리고 싶은데, 그녀를 닮은 딸아이가 눈에 밟혀 놓지 못하는구나.
그렇기에 죽지 못하고 독한 술을 들이킨다. 술에 절여질 대로 절여진 몸이라, 이제는 술의 향과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육신이 술기운을 몰아낸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저주받아 비명 속에서 삶을 보내야 하건만, 쓸데없이 단련했던 육신은 한 줌의 도움조차 주지 못하는구나.
그래도 괜찮다. 쓸데없이 축적된 부가, 몸을 죽일 정도의 술을 마련해주니 괜찮다. 썩어 넘치는 술에 손을 뻗고 입에 털어 넣는다.
곧 사라질 미미한 술기운이 몸에 감돌고, 울음소리가 잦아든다. 그제야 조금 머리가 돌아간다. 상태가 조금 나아졌으니 일을 해야 한다.
무슨 일을 하려고 했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무언가 중요한 일이었는데. 이게 문제다. 술을 먹으면 울음소리가 안 들리는데, 기억이 흐릿하다. 해야 할 일을 기억해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니, 술병들 사이에 놓인 서류가 보인다. 딸아이의 글씨체가 눈에 들어온다. 그제야 기억이 조금 돌아온다.
그래, 마녀의 거처. 그런 게 있었지.
술에 찌든 정신이 마녀라는 단어에 반응하여 마음이 격동한다. 슬픔 말고는 느끼지 못하던 감정에 불이 붙는다. 그리고 금방 꺼져버린다.
망가져 버린 자에게는 무언가 불태울 것이 남지 않았기에, 불은 더 탈 수 없다. 또 무력감이 나를 짓누른다. 다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이 떠오르지만, 그 생각을 힘겹게 접고 서류를 훑어본다.
딸아이의 보고서에는 마녀의 거처에서 본 서고와 죽어버린 신들의 시신과 성물, 마녀의 일기에 대해 적혀져 있었다.
하나하나 골치 아픈 이야기지만, 나쁘지 않다. 이 빌어먹을 저주를 풀 실마리가 보일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딸아이에게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해줄 가능성이 보인다.
「과연 그럴까?」
죽이고 싶은 여인의 목소리가 울린다. 감정이 돌아오고 한 번씩 들려오는 목소리. 마녀의 사념.
마녀의 사념이 지나가고, 머리가 또 울려온다. 부서져 가는 이성이 비명을 지른다. 이성이 비명을 지르지만, 조금 더 버텨야 한다. 이미 망가질 만큼 망가져 버렸지만, 완전히 부러져서는 안 된다. 딸아이가 기껏 알아 온 희망이 눈앞에 보이니 아직은 부서져서는 안 된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딸아이에게 이 고통을 넘겨주는 것만은 막고자, 부서져 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또 술을 털어넣는다.
술에 절여진 머리를 억지로 굴리며, 마녀의 거처에 보낼 탐사대에 대한 계획을 수립한다. 마음에 얼마 남지 않은 찌꺼기들을 태우며 고심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고, 여기에 올 이유가 없는 남자가 들어온다. 딸아이의 약혼자. 알릭 노르먼이 들어와 내 앞에 앉는다.
그 모습에 조금 인상이 찌푸려진다. 그러고 그 찌푸림은 얼마 가지 못했다.
창백한 안색에 절망감이 가득한 눈빛, 불안정한 호흡. 망가져 가기 시작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이상하다. 얼마 전에 보았을 때는 당돌하고, 강직해 보였다. 겨우 며칠 만에 무너질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망가져 가는 사람의 모습을 하는가.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입을 연다.
“저번에 권해 주셨던 술을 받으러 왔습니다.”
그는 부서져 가는 자들의 친구를 받으러 왔음을 밝힌다.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그렇지만, 저런 얼굴은 한 자들은 술 없이는 버틸 수 없음을 알기에 술을 던져준다.
그는 술을 받아들고 급하게 들이킨다. 독한 술은 순식간에 바닥을 보인다. 그 모습이 우리와 같아 보였다.
딸아이가 호감을 가진 상대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망가지기 시작했던 시절의 나와 비슷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심정을 알기에 동정한다.
술을 잔뜩 꺼내와 늘여놓는다. 술병을 손에 쥐고 쉬지 않고 들이키는 그를 보니, 기분이 이상해져 일을 하기에는 틀린 것 같다.
서류를 뒤편으로 치워두고 술을 마신다. 아무 맛도 안 느껴지던 술이 쓰다. 처음 마셨던 그 시절에 느꼈던 쓴맛이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저 술을 들이킨다. 방안은 빈 술병을 내려놓는 소리와 마시는 소리만이 맴돈다.
시간이 흐르고 정신이 조금 몽롱해진다. 살짝 흔들리는 시야로 눈앞에 있는 사내를 본다. 창백했던 얼굴은 붉어졌고, 절망감이 가득 찼던 눈은 물기를 담으며 슬픔을 담는다.
술맛이 떨어진다.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그가 입을 연다.
“공작님의 말씀이 맞는 거 같습니다.”
두서없는 말이다. 술 취한 자의 넋두리 같이 들린다. 그렇게 무시하기에는,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너무 어두웠다.
“제가... 아이리스의 삶을 망친 거 같습니다.”
감정은 쓸모없다고 했던 나의 말에, 불같이 화를 내던 자는 없어졌다. 그는 무엇을 보았기에 그리 말하는가. 이해할 수 없다,
그저 짜증이 난다. 그리 말할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딸아이의 감정을 일깨우지 말 것이지... 아니다, 다 내 잘못이다. 내가 딸아이의 약혼자로 그를 고르지 않았으면,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딸아이는 감정이 죽은 채로 아픔을 모르며 살아갈 것이고, 저 청년이 저런 감정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 하나 옳은 선택을 하는 것이 없구나.
자괴감이 밀려온다. 그 감정이 나를 짓누른다.
나는 이런 감정에 짓눌려 살아도 된다. 사랑하는 이의 인생을 망치고, 슬픔 속에서 죽게 만들었다. 딸아이의 저주를 풀 방법도 못 찾아, 감정을 쓸데없는 것이라 세뇌하고 가정을 죽이게 만들었다.
그런 못난 자이기에 고통을 받는 것이지만, 저 청년은 그럴 이유가 없다. 그러니 입을 연다.
“헛소리 집어치워라. 내 딸의 인생은 아직 안 망했다.”
그의 암울한 말과 내가 그에게 쏟아 내었던 말을 부정한다.
「저주에 걸렸으니 이미 네 딸의 인생은 망했어.」
마녀의 사념이 또 나에게 속삭이며, 저주한다. 문드러진 마음을 찌른다. 머리가 울려온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징징거리지 마라!”
「곧 일어날 일이야.」
마녀의 사념이 저주를 이어 나가고, 머리의 통증이 강해진다.
“네놈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그리 말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은 반드시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반드시 일어나.」
사념의 소리가 커져간다.
“그러니 술기운도 못 이기고, 헛소리나 내뱉지 말고 꺼져라!”
「헛소리가 아니야.」
사념의 소리 너머에서 아내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머리가 부서질 듯이 아파온다.
이를 악물고, 사념의 소리를, 아내의 울음소리를, 머리를 부수는 통증을 무시한다. 무시하고, 눈앞에 있는 남자에게 그리고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토해낸다.
“머저리처럼 굴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이나 해라.”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눈앞에 있는 남자는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남자의 눈에는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그 스쳐 가는 감정들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패배자들의 눈보단 낫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고, 남자는 입을 연다.
“죄송합니다. 제가 헛소리를 했습니다.”
남자는 그리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병든 방에서 나간다. 그리고 방문 너머에서, 한 마디가 들려온다.
“감사합니다.”
그 말을 무시한다. 나는 감사를 받을 자격이 없다. 한심한 모습이 보기 싫기에, 나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그에게 토해냈을 뿐이다.
그리 생각하고, 어지러운 방을 둘러본다. 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창문을 막은 검은 천, 바닥을 굴러다니는 수많은 빈병들, 벽을 꽉 채우는 술병이 진열된 진열장.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병든 나의 상태를 그대로 보여 주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치워야 할 때가 왔다. 종을 울려 집사장을 부르고, 창문을 막는 검은 천을 치운다. 눈을 아프게 하는 빛이 들어온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다.
“공작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이 방을 치워야겠다. 빈병들은 모두 버리고, 술은 기사들과 사용인들에게 모두 나눠줘라.”
나의 말에 집사장의 얼굴에 당혹감이 서린다.
“공작님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의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담겨있었다. 저 마음을 이해한다. 아내가 죽고 술 없이는 살지 못했으니.
“괜찮다. 그리니 내 눈앞에서 전부 치워라.”
“알겠습니다.”
집사장은 사용인들을 부르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그가 나가고 몸에 남겨진 술기운을 몰아낸다. 진득한 술기운은 몸 밖으로 빠져나가고, 역한 냄새가 풍겨온다.
몸에서 술기운이 사라지자 아내의 울음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것이 나를 좀먹고, 나의 숨통을 조여온다.
그 느낌에 정신이 술이 필요하다고 외친다. 무시한다. 술에 절여지면 편하리라. 하지만, 술에 절여진 자는 희망을 쥐고 있을 수 없다. 미래를 그릴 수 없다.
그러니 나를 좀 먹는 소리를 듣는 것이 낫다. 그 끝에 내가 부숴진다 하여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기에 나의 죗값을 견뎌야 한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사념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빌어먹을 웃음소리에 감정이 요동친다.
머리의 통증과 사념의 소리를 무시하고, 요동치는 감정을 장작 삼아 마음에 불을 지핀다. 그리고 딸아이의 행복을 그리며 일에 빠져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시험 범위가 넓어, 주인공 가족 에피소드 수정은 늦어질 것 같습니다.
+스토리 진행이 느려져서 죄송합니다! 다음 편인 수확제를 끝으로 이번 에피소드를 마치고, 다음 에피소드를 진행하겠습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