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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31화 (31/59)

제 31화

몸이 불타고 있다.

노란색 불길이, 나의 죽어버린 몸을 장작 삼아 타오른다.

타고 있음에도 뜨거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상하다. 나는 죽었는데, 어째서 세상이 보이는가... 미련이 너무 커서, 이승을 뜨지 못한 것일까?

모르겠다. 지금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

그저 나의 작은 바람대로, 흉해진 시신을 화장하고 있다는 것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흐릿하고 이상한 시야를 돌려본다.

눈이 조금씩 내리고 있는 정원. 아이들이 좋아했던 정원이다.

아이들이 크고 나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오늘은 이곳에 사람이 많구나.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다.

이제는 늙어버린 나의 전우들, 스쳐 지나가며 본 듯한 사용인들, 임종 직전까지 나의 수발을 들어주었던 사용인들, 조금 불편했던 가신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사제.

많이들 와주었구나... 그런데 너무 적막하구나. 조금은 떠들썩했으면 좋았을 텐데. 죽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 어쩔 수 없구나.

죽고 나서도 보는 장면이, 이런 적막한 세상이라는 것이 조금 슬펐다. 그러면서도, 전우들의 모습을 보니 조금 반가웠다.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흐릿한 시야에 들어온다.

아이리스와 아이들도 있구나.

알 수 없는 상황 덕분에, 그들의 얼굴을 보니 조금 행복했다. 그 행복을 조금 더 음미하고 싶어, 찬찬히 바라본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성숙해진 아이들의 모습이 좋았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이 좋았다.

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 감정을 곱씹으며 그들을 보던 중, 그들의 붉은 눈시울이 눈에 들어온다.

죽어버린 심장이 철렁인다.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의미 없는 발버둥이 아니었구나.

덧없이 져버렸다고 생각했던 나의 삶이 끝나고, 그토록 바랐던 소원이 이루어졌다. 그 사실에 감사하면서도 아쉬웠다.

조금만 빨리 소원이 이루어졌다면,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구나...

아쉬움이 남지만,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덧없는 삶의 나의 행복들이, 이제는 행복해질 수 있으니 만족한다.

그렇게 미련을 내려놓으니, 어느덧 몸의 반절은 재로 변해 버렸다.

곧 끝나겠구나...

가장 큰 미련을 내려놓았음에도, 피어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기에, 모든 이들이 삶을 갈구하는 게 아니겠는가.

마치 철학자처럼 삶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조금 웃겼다. 먼저 간 친우들의 내 생각을 들으면 웃음을 터트리겠지.

그리 생각하니, 먼저 간 이들이 생각난다.

지금의 순간이 끝나면, 먼저 간 친우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어머니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이루어질지, 아닐지는 조금 있으면 알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또 다른 즐거움을 기대하고 있을 때, 애처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리스의 목소리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가 애처롭게 울부짖는다. 그런 그녀를 아이들이 끌어안고, 같이 울부짖는다.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는데, 어째서인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의 슬픔만이 느껴진다.

그것이 기쁘고, 한편으로는 싫었다.

그들의 모습에 저주가 풀렸음을 확신할 수 있음에, 나의 죽음을 슬퍼해 줌에 기뻤다. 그리고 저리도 슬퍼하는 모습이 싫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들의 행복이지, 아픔이 아니다. 그러니 그만 슬퍼해다오.

그리 말하고 싶지만, 나에게는 보는 것만이 허락되었다. 나는 죽은자이기에 그들에게 닿을 수 없다.

그것이 슬프지만, 그들이 언젠가는 슬픔을 털어낼 것이니 괜찮으리라.

그들이 서로의 슬픔을 끌어안아 주며, 이겨내리라 믿는다.

점점 어두워지는 세상 속에서 그들의 행복을 빌어준다.

나를 태우는 노란 불꽃은 마지막을 앞두고 화려하게 타오른다. 그 불꽃이 점차 흐릿해지며, 세상은 완전히 어두워진다.

완전히 어두워진 세상이 끝나고, 조금 익숙한 천장이 보인다.

아... 꿈이었구나.

행복한 꿈이었다. 아니, 슬픈 꿈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그것은 행복한 꿈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너무 많은 것들을 보았다.

슬픔에 익사해버린 영웅, 마녀의 악의, 망가져 버린 거인. 너무 많은 것들을 알아버렸기에, 그 꿈은 슬픈 꿈이다.

나에게 미안해하지 말라고, 가여워하지 말라고 유서에 남겼으니 그들이 이겨내리라 믿고 싶지만, 마녀 악의를 알기에 희망을 품을 수 없었다.

최악이다. 아침부터 너무 끔찍한 기분이다.

그 끔찍한 기분 속에서, 장인이었던 남자의 말들이 생각난다. 내 딸을 망쳤다는 그의 절규가, 내 마음을 좀먹는다. 그의 마음을 절감하게 만든다.

삶이 철저하게 부정당했다. 그들의 행복을 바랐던 나의 삶이 부정당하고, 그들의 삶이 망가질 것이 보인다.

마음이 찢겨나가 피가 흘러내린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끔찍한 꿈에 짓눌린다.

꿈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스스로 최면을 걸듯이 속삭인다.

그저 꿈일 뿐이라고. 하룻밤의 악몽일 뿐이라고.

억지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럼 네가 꾸었던 다른 악몽은 무엇이냐?’

그 목소리가 꿈을 꿈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든다. 꿈이 다시 짓눌러 온다. 꿈의 무게에 구역감이 올라온다.

이대로 있으면, 무너질 것 같아. 밖으로 뛰쳐나간다.

어둠이 깔린 세상에서 생각을 비우기 위해, 끔찍한 꿈을 잊기 위해서 몸을 혹사시킨다.

한참 동안 몸을 움직이고 나서야 조금씩 몸이 무거워지며, 꿈이 흐릿해져 간다.

흐릿해져 가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완전히 잊지는 못해도, 조금이라 더 지워내야 한다.

그 일념으로, 어두움이 깔린 세상이 푸른빛을 받을 때까지 몸을 혹사시켰다. 온몸이 땀으로 젖고, 입에서 단내가 나며, 몸이 삐걱거린다. 육체에서 받은 고통 덕분에 머리가 비워졌다. 꿈의 무게가 사라졌다.

원하던 대로 되어서 다행이다.

꿈의 무게가 사라지고, 지쳐버린 육신을 씻기 위해서 가볍고 무거운 발을 움직인다.

지친 육신을 따뜻한 물로 달래니 잠이 몰려온다. 그렇지만 자고 싶지는 않다.

그 끔찍한 악몽을 다시 마주할 것 같아, 자고 싶지 않다.

무거운 눈꺼풀을 깨우기 위해서, 서늘한 바람이 부는 밖으로 향한다.

밖으로 나가자, 수확의 시기를 맞이한 북부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 덕분에 조금은 눈꺼풀이 가벼워졌지만, 부족하다. 부족하기에 가볍게 걷는다.

정원을 보면 꿈이 떠오를 것이 뻔하기에,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그렇게 걷다 보니, 별채가 눈에 들어왔다. 수십 년 후의 미래와 다른 곳이 없는 별채가, 계속해서 눈에 밟힌다.

아무도 없을 별채가 왜 이리 눈에 밟히는지 모르겠다.

말년을 이곳에서 보내서 그런 것인가?

그 답을 모르겠지만, 어느새 나의 발걸음은 별채로 향하고 있었다.

별채의 문이 조금 삐걱거리며 열린다. 좋은 기억은 없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가 눈에 들어온다.

많은 상념들이 스쳐 지나간다. 별로 좋은 상념들은 아니기에 무시하며, 내가 살았던 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내 방이 있던 별채의 꼭대기 층으로 올라오니, 인기척이 느껴진다. 그리고 여기에 올 이유가 없는 여인이 눈에 들어온다.

나의 아내였던 여인. 아이리스가 내가 살던 방에서 나왔다.

수확시기를 맞이하여 몰려오는 업무로 분주해야 할 사람이 여기 있음이 조금 의아하며, 그녀가 내가 살았던 방에서 나오는 것이 당혹스럽다.

나를 당혹스럽게 하는 그녀가 나에게 인사를 걸어온다.

“좋은 아침일세.”

“좋은 아침입니다. 공녀님.”

“여기는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할 일이 없어 산책하던 중에, 이곳이 눈에 띄어 들어왔습니다.”

나의 말을 듣고는 그녀가 이유 모를 웃음을 짓는다.

“할 일이 없다니. 그러면, 그대에게 할 일을 줘야겠군.”

그녀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것이 느껴진다. 잠시 거절할까 생각도 했지만, 정말로 할 일이 없기에 그녀의 말을 받아들인다.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자, 그녀의 웃음이 조금 짙어진다.

“그대가 그렇게 말해주니 다행이군. 그러면, 곧 있으면 열릴 수확제에서 나의 약혼자로서, 내 옆에 있어 주게.”

그녀의 말에 조금 당혹감이 든다. 그녀가 변한 것은 느끼고 있었지만, 파혼하자고 한 남자에게 이런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이 낯설다. 그러면서도 싫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날을 기대하겠네.”

그녀는 그리 말하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잠시 그 모습을 음미하고, 나의 궁금증을 털어놨다.

“그보다 공녀님은 왜 이곳에 계신 겁니까?”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고 입을 연다.

“이상한 꿈속에서, 이곳을 보았기에 찾아왔네.”

그 말에 불길함이 몰려오고, 숨이 무거워진다. 그것들을 부정하며, 더 확인하기 위해 입을 연다.

“이상한 꿈 말입니까?”

“그래, 조금 이상한 꿈이었지.”

“혹시, 무슨 꿈인지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녀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고, 이내 입을 연다.

“이곳에서 모르는 남자의 시신 앞에서 울고 있는 꿈이었네.”

그 말에 숨이 막혀온다. 무게를 잃어버렸던 꿈이 다시 무게를 갖는다. 그 무게를 느끼며, 무거워진 입을 연다.

“그렇군요...”

시간이 지날수록 무게가 무거워진다. 그 무게가 버거워 얼굴에 드러나려 한다.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할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에게 거짓을 고하고, 뛰쳐나간다.

몸을 혹사시켜야 한다.

그리 생각하며, 몸을 혹사시키지만 꿈은 여전히 나를 짓누른다.

부족하다. 몸의 고통으로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다. 그것을 절감하기에 술이 떠오른다.

술이 필요하여 방으로 돌아가, 사용인을 부르는 종을 울린다. 조금 지나니, 풋내가 덜 빠진 젊은 남자가 찾아왔다.

“필요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술이 필요한데 가져다줄 수 있겠나? 독한 술이면 좋겠네.”

나의 말에 그 남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찾아온다.

“공작님께서 술을 다 가지고 가셔서, 남는 술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 알겠네. 돌아가 보게.”

남자는 나에게 허리를 숙이고 떠난다. 혼자 남은 나는 죄 없는 입술을 씹으며, 망가진 거인이 제안했던 술을 뒤늦게 받으러 걸음을 옮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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