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화
전 장인어른
전 장인어른의 부름에, 그녀의 뒤를 따라 익숙한 복도를 걷는다.
곧 전 장인어른을 본다는 사실에 조금 심란하다.
제국 제일의 검으로 동경하였던 자. 그리고 술에 찌들어 살며,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던 자. 윌리엄 브란트.
그것이 내 기억 속의 장인이다. 그런 사람의 관심이 의아하면서, 달갑지 않다. 그렇기에 발걸음이 조금 무거워진다.
유달리 투박한 문 앞에서, 조금 무거워진 발걸음을 멈춘다. 아이리스가 투박한 문에 노크를 한다.
“아버님. 알릭 경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내고, 조금 기다렸다 문을 연다. 문 너머는 공작이 살기에는, 너무 투박한 방이 펼쳐졌다. 흔한 장식품 하나 없는 투박한 방에는 특이하게도, 술이 가득 진열된 진열장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람이 지내는 방이 아니라, 술 저장고에 가까운 방의 바닥에는 빈 술병들이 굴러다닌다. 그리고 방에서 독한 술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온다.
그런 특이한 방에서, 제국에서 흔치 않은 흑발을 가진 옛 장인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가 왔음에도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있는 옛 장인의 얼굴은 불그스름하고, 눈은 탁해 보였다.
저번 삶에서도 보았던 모습이지만, 익숙해지지 않는다. 한때나마 동경했던 남자의 망가진 모습이 달갑지 않다.
술에 찌든 남자는 술을 다 비우고 나서야 우리를 쳐다보고 입을 연다.
“돌아가 보거라.”
“알겠습니다.”
부녀라기에는 너무 삭막한 대화 모습이 옛 기억을 자극한다. 달갑지 않다.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 아이리스는 조용히 방에서 나간다. 그리고 방에는 무거운 침묵이 깔린다.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탁한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패잔병의 눈과 비슷한 그 탁한 눈에서, 항거할 수 없는 기운이 느껴진다. 그 기운에 조금 호흡이 힘들어진다.
그런 상태가 조금 이어지고, 술에 찌든 남자가 입을 연다.
“술이라도 한잔하겠나?”
“사양하겠습니다.”
술을 좋아하지만, 저렇게 술에 찌들어 버린 자와는 마시고 싶지 않기에 거절했다.
나의 말이 끝나고, 술에 찌든 남자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진열장에서 술을 꺼내 든다. 꺼내 들은 술의 뚜껑을 열고는 입으로 털어 넣는다. 독해 보이는 술을 반병쯤 비우고는 다시 입을 연다.
“실망했나?”
두서없는 말이지만,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할 말은 아니다. 제국 제일의 검이라 불리는 자의 망가진 모습에 실망했냐는 그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한다.
“네. 실망했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술에 찌든 남자는 다시 술을 털어 넣는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겠지.”
술에 찌들어 망가진 자의 말의 흐름이 이상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망가진 자의 말이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용건만 말하지. 약혼 없던 일로 하겠네.”
가문에 약혼을 먼저 제안해 왔던 자가, 갑자기 없던 일로 하자는 말에 머리가 삐걱거리며 고장 난 소리를 낸다.
“넘기기로 했던 사업들은 그대로 주고, 위약금도 넉넉히 챙겨주지.”
나를 팔아넘긴 남자는 그 말에 좋아하며 승낙할 것이다. 얼마 전의 나도 승낙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저번 삶이 고통스러워 도망치고자 파혼을 원했다. 지금은 자그마한 희망을 품었기에 도망칠 생각은 사라졌다. 하지만, 고통의 원인인 저주를 풀 실마리는 발견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이니, 이대로 가면 저번 삶과 똑같은 아픔 속에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파혼하는 것이 현명하다. 환영해야 할 일이다. 이성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감정은 그 말에 찬성하지 않는다. 죽을 만큼 아팠음에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나는 반대한다. 이번 삶에서 그녀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며, 새로이 그녀를 사랑하게 된 내가 반대한다.
이성과 감정의 대립에 혼란스럽다.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유도 모른 채 그녀와 헤어지고 싶지는 않다.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유가 중요하나?”
“네, 중요합니다.”
술에 찌든 남자가 마시던 술을 비우고, 입을 연다.
“별거 없네. 그저 변덕일세.”
그 말을 납득할 수 없다. 그런 말에 납득하고 넘기기에는, 피어버린 희망과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가볍지는 않다.
“그런 이유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나의 말에 술에 찌든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진열장에 있는 술에 손을 뻗고, 술을 조금 털어 넣는다.
“건방지고, 재밌는 대답이었다.”
그 말이 끝나고, 세상이 무거워진다. 항거할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나를 짓눌러 온다. 나를 찍어 누르는 그 힘의 무게에, 숨이 막혀온다. 몸은 삐걱거리며, 힘을 잃고 무너지려 한다.
이를 악물고 저항한다. 이 기운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건, 뼈저리게 안다. 수많은 전투와 투쟁을 하며 살았기에 잘 안다. 그럼에도 쓰러지고 싶지 않다. 술에 찌들어 망가진 자의 변덕에 굴복하고 싶지 않다.
그리 가볍게 쓰러지고 굴복하기에는, 내가 살아온 삶이 가볍지 않다.
몸의 비명을 무시하고 억지로 버틴다. 마나를 끌어 올리고, 기세를 뿜어내며 저항한다. 나의 모든 것을 쥐어 짜낸다.
그럼에도 나를 짓누르는 기세는 이겨낼 수 없다. 밀어낼 수 없다. 그저 서 있는 것이 한계였다. 그 한계를 억지로 이어 나간다.
비명을 지르는 몸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이 잘 안 간다.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기세를 뿜으며, 술 마시고 있는 자의 술병을 보니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허탈하다. 마음의 무게는 극명하게 차이 나는데, 격의 차이에 찍혀 눌리고 있음이 싫었다.
그것이 싫었지만, 세상은 잔혹하여 마음의 무게는 지극히 의미가 없었다. 육신은 한계의 끝에 도달한다.
한계의 끝에서 술에 찌든 자를 노려본다. 여유롭고 술을 음미하는 남자는 술을 전부 비우고, 빈 술병을 내려놓는다. 그 순간 항거할 수 없던 기운은 사라진다.
나를 짓누르던 힘이 사라지고, 몸에서 힘이 풀린다. 꼴사납게 휘청거린다. 그저 자존심 때문에 쓰러지기는 싫어, 억지로 몸을 틀어 벽에 기대어 몸을 지탱한다.
어정쩡하게 벽에 기댄 모습이 꼴사납지만, 쓰러지는 것보단 낫다.
“힘들어 보이는군.”
그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저 말에 빈정거리고 싶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자존심 때문에 몸을 혹사시킨 대가로 말할 힘조차 없었다.
“딸이... 자네를 좋아하는 거 같더군.”
술에 찌든 자의 이야기의 흐름이 또 이상해졌다. 그 이상한 흐름은 무시하고, 그의 말에 대답하고 싶지만, 아직도 입을 열 힘조차 없다.
“대답할 힘도 없나 보군. 그럼 듣기나 하게.”
술에 찌든 자는 또다시 술을 꺼낸다. 그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초인이라 하여도, 독한 술을 저렇게 마시면 몸이 망가질 것이 뻔한데.
또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가 어떻게 하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닌데.
술에 찌든 자는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입을 연다.
“딸의 쓸모없는 감정들을 막는다고 고생했건만, 네놈 때문에 다 허사가 되었다.”
그 말에 이가 갈린다. 감정이 어떻게 쓸모가 없단 말인가. 끓어오르다 못해 넘치는 감정이 몸에 자그마한 힘을 주어,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어째서, 감정이 쓸모없다는 것입니까!”
더 말하고 싶다. 이 감정을 더 토해내고 싶지만, 힘이 없다. 입이 열리지 않는다. 악을 지르듯이 내뱉은 저 말만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힘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결국에는 꼴사납게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런 나를 보며 그 인간은 웃음을 터트린다. 그 모습에 짜증이 올라온다.
나를 보며 웃던 인간은 웃음을 싹 지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감정은 중요하지.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하니. 하지만, 우리는 아니다. 우리에게 감정은, 언제가 우리를 죽게 만드는 독이다.”
술에 찌든 목소리와 얼굴에 슬픔이 묻어나왔다. 그 모습에 마녀의 책에서 본 문장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막혀있던 감정이 되찾을 그의 모습이 저절로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그 문장이 머리를 맴돈다. 그 문장이 저 슬픔을 이해하게 만든다. 그 감정을 이해했기에,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슬픔을 머금은 자는 술을 들이킨다. 독한 술의 바닥이 보인다. 바닥나버린 술병을 던지고, 입을 연다.
“저주받은 운명 때문에 죽을 때까지 아파야만 하는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의 시신을 끌어안고,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야 하는 심정을 네가 아느냐!”
슬픔은 악에 받친 분노로 변한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감정을 죽여 놨거늘, 네가 다 망쳐버렸다! 네가 내 딸의 인생을 다 망쳐버렸다!”
길 잃은 분노는 나에게로 향한다. 그렇지만, 아까처럼 무형의 기운은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
술에 찌들고 망가져 버린 남자가 악을 쓰며, 나에게 울분을 토해내는 모습이 가여웠다.
“상처받지 말라고, 감정 따위 갖지 말라고, 별 볼 일 없는 네놈을 짝으로 정했거늘... 내 실수다...”
울분은 처량함으로 변해 그를 좀먹는다. 제국의 모든 전사들에게 칭송받는 거인은 처량함에 잠겨 작아져 간다.
그 모습이 싫다.
아직도 세상에 남은 마녀의 악감정이, 동경했던 거인을 떨어트리고, 망가트리고 있는 모습이 싫다.
그럼에도, 이미 망가져 버린 그에게 해줄 것이 없기에 입맛이 쓰다.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잠겨버린 목소리가 방을 맴돈다.
“여기서 있던 일들은 잠깐만 없던 일로 하거라. 나중에 딸과 함께 다시 부르겠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지만, 삼킨다. 이미 암울한 감정에 잠겨버린 그에게,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닿지 않을 것이 보이기에 그저 다음을 기약한다.
망가져 버린 거인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힘이 빠져 휘청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방문을 닫으니 문 너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 입맛이 쓰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