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화
털어내다
마녀의 악의가 흘러내리는 책을 덮었다.
책을 덮었음에도 진득한 악의는 사라지지 않고, 우리의 주변을 맴돈다. 남아서 맴도는 악의는 감정을 자극한다.
겨우 한 사람의 유희가 이리도 잔혹하단 사실에, 나의 가장 큰 행복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에, 여러 감정이 피어올라 뒤섞이며 나를 심란하게 만든다.
그 심란한 감정 속에서 그녀들을 봤다. 그녀들도 나와 별다른 바 없이 심란한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녀들도 나와 같이 마녀에게 당한 피해자들이니.
아이리스는 가문 대대로 감정을 빼앗겼고, 레이첼은 모시던 신은 마녀 때문에 이단으로 몰리고, 사도는 잔혹한 삶을 보내었으니 그 감정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감정 속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그 고통스러운 침묵을 아이리스가 깼다.
“감정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루만 더 여기에 있는 것은 어떻겠나?”
심란한 얼굴을 한 그녀의 말에, 우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흩어졌다.
레이첼은 죽은 신들의 성물이 장식된 방에서, 아이리스와 나는 서로 조금 떨어진 서고에서 생각을 정리한다.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고자 흩어지고, 책의 내용을 떠올린다. 그 끔찍한 진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가 갈렸다.
나의 행복이 빼앗긴 이유가, 그리도 아파야만 했던 이유가, 고작 유희라는 사실에 이성이 녹아간다. 어둡고 붉은 감정들이 뒤섞여 절규를 토한다.
그 감정들은 삭이고 싶어도 삭일 수가 없었다. 이 감정들을 토해내고 싶어도, 대상은 이미 죽어 세상에 없었다. 저주조차 할 수 없었다. 이 감정을, 이야기를 같이 흘려보내고 싶지만, 시간의 간극이 다른 나는 그럴 수 있는 사람조차 없다.
그저 혼자서 넋두리를 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혼자 마음속에서 피를 토하며, 진득한 울분을 삭인다.
그 울분은 혼자 삭이기에는 너무 독하여, 눈물에 섞어 흘려보낸다.
그렇게 한참을 흘려보내고, 조금 진정된 상태에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간다.
방에서 보았던 죽은 신들의 유물과 시신은, 나 혼자서 생각할 문제가 아니기에 넘긴다.
국교로서 제국의 큰 기둥인 아르미스교단이 마녀에게 삼켜졌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온다. 교단과 내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제국에 살고 있는 이상 무관할 수 없기에 골치가 아프다.
시간이 흘러서 마녀의 잔재가 사라졌다면 다행이지만, 아직도 남아있다면 최악이다. 사람을 학살하고 피로 물든 풍경을,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표현한 마녀의 잔재가 정상일 리 없다. 그저 잔재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위협적이다.
교단 전체가 그 잔재에 잠식되어 있을 리는 없겠지만, 그것들을 색출할 방법이 없다. 안다고 하여도 나에게는 제거할 힘이 없다. 그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제거할 수 없는 폭탄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이 너무 위협적이고 거슬린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은 없기에, 그저 그들을 피하고 조심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옆으로 치워버린다.
카이안. 아마도 나의 회귀와 관련되었을 신. 처음 그를 알았을 때는, 단편적인 정보만 보고 미친 신으로 알았다. 그런 신에게 축복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꺼림직하고 불안하여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랬었는데, 지금은 그저 가여웠다. 사도를 시켜 세상을 진정시키니 돌아온 것은, 사도와의 단절과 사도의 비참한 죽음. 그리고 마녀의 농간으로 인해 이단으로 몰려버린 그가 가여웠다. 그리고 그와 대화하고 싶다. 물을 것이 너무나 많다.
그러니 언젠가 다시 성지에 찾아가리라.
그리 생각하며, 이 이야기도 한쪽으로 치운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목적만이 남았다. 저주를 풀 실마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저 저주에 담긴 지독한 진실만을 알았을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곳을 전부 뒤지다 보면 실마리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조금 암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암울한 감정 너머에서, 마녀의 책에서 본 한 문장이 자꾸만 머리에서 맴돈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막혀있던 감정이 되찾을 그의 모습이 저절로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사랑하는 아내가 죽고, 저주가 풀린다는 것을 암시하는 그 말이, 영웅의 비참한 삶을 담았던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린다.
마녀가 죽고 나서 조건을 만족하고 풀린 것이니, 처음부터 저주가 그렇게 설계됐을 것이다. 그 조건이 무엇인지가 너무 신경 쓰인다.
그저 아내이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자의 죽음인가?
그것에 대해 생각할수록, 저번 삶의 아이리스와 아이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리를 꽉 채워간다.
그들은 내가 죽고 저주가 풀렸는가?
답은 알 수 없다. 내가 죽고 나서의 일이니 알 수 없다. 그저 그 이후의 일들을, 상상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배우자의 죽음이라면, 아이리스는 저주에서 풀려나서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한 줌의 눈물이라도 흘렸을까?
의미 없는 넋두리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상상을 하게 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라면, 아이리스와 아이들 중 저주에서 풀린 이가 있을까?
있었으면 좋겠다.
나의 죽음에 잠시 슬퍼하였으면 좋겠다. 그리고 털어버리고 행복을 찾기를 바란다.
불운한 영웅처럼 슬픔에 익사하지 않고, 그저 잠깐의 슬픔으로 지나가기를 소망한다.
그저 그랬기를 희망하며, 그들을 생각한다.
입맛이 쓰고 비렸다.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입술이라도 물어뜯었는지, 입안에 피의 비릿한 맛이 맴돈다.
그 비릿한 맛을 느끼며, 한참을 생각의 여운 속에 잠겨있었다.
그렇게 복잡한 생각의 여운 속에 잠겨있을 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슬퍼 보이는군.”
아이리스의 평온한 얼굴이 보였다. 심란함을 털어낸 것으로 보이는 그녀가, 나의 옆에 앉는다.
“나는 아직 그대에 대해 잘 몰라서, 무엇 때문에 그리 슬퍼하는지 모르겠네.”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말문을 열고는, 잠시 시간을 들였다.
“그렇지만, 내가 정리한 생각 정도는 전할 수 있겠지.”
그녀가 눈물 자국이 남은 나의 뺨에 손을 얹는다. 온기가 나를 적신다.
“너무 슬퍼하지 말게. 이미 일어난 일을 붙잡아서 슬퍼해봤자, 그대만 아플 뿐이네. 그러니 털어버리고, 나와 같이 앞을 바라보지 않겠는가?”
그리 말한 그녀는 일어서서 나에게 손을 뻗는다. 그녀의 말에, 그녀의 모습에 진득한 감정이 천천히 떨어져 나간다.
그녀의 말이 맞다. 이미 일어난 일들을 계속해서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그녀의 손을 잡는다. 그녀의 온기가 손에 펴지고, 나의 마음을 채워나간다.
자신의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고심하면서 찾아왔을 그녀를 바라본다. 매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가,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같이 웃고 있었다.
“아까보다 훨씬 낫군.”
지금의 그녀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좋았다.
미소 짓고 있는 그녀가 좋았다.
나이를 헛먹은 나를 위로해주는 그녀가 좋았다.
그저 그녀가 좋았다.
그렇기에 심란한 마음을 털어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털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다행이군.”
미소 짓는 그녀는 여전히 나의 손을 붙잡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레이첼에게는 그대가 똑같이 말하게.”
“공녀님이 말하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말하면, 걱정해 줬냐며 달라붙어 올 것이 뻔하니 싫다.”
그녀의 말에 웃으며, 그녀의 옆에 서서 나란히 걸었다.
그렇게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걷다가, 갈림길에서 레이첼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손에서 온기가 빠져나가고, 여운만이 손에 맴돈다.
“형제님, 자매님. 감정은 다 정리하셨어요?”
“그래. 너는 끝났나?”
“네!”
“그러면 더 기다릴 것 없이 출발하지.”
아이리스는 그리 말하고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뒤를 따르며,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올 때는 혹독했던 설원은 비교적 얌전한 덕분에, 특별한 일 없이 열흘하고 하루가 더 지나간다.
어느덧 수확의 계절을 맞이하여, 결실을 맺은 들판에 둘러싸인 미네소타에 도착했다. 곧 시작될 수확과 수확제 준비로 사람들이 분주하다.
그런 정겨운 모습을 보고 있는 사이, 마차는 내성으로 진입했다. 얼마 안 가서 마차가 멈춰 선다. 멈춰 선 마차에서 내려, 앉아 있는 동안 굳어버린 몸을 풀어낸다.
“나는 어버님에게 보고하니 먼저 가겠네. 그대들은 먼저 편하게 쉬게.”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먼저 떠나고, 우리는 손님용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드디어 제대로 씻을 수 있겠네요.”
“그러게 말이다.”
설원에서는 씻을 수가 없었다. 중간중간 들린 마을의 여관에서 씻기는 했지만, 전부 작은 마을이었기에 온몸을 씻어 낼 만한 시설은 없었다. 그런 상황을 겪었기에, 그녀의 말에 동감했다.
“그럼 형제님 나중에 봬요.”
“그래, 나중에 보자.”
레이첼과 헤어지고, 미리 준비된 욕실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뜨거운 물을 즐기며, 여정의 피로와 몸을 씻어낸다.
그렇게 모두 씻어 내리고, 방으로 돌아오니 아이리스가 앉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공녀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약간 표정이 굳은 그녀가 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 그대를 보고 싶다고 하시는군.”
한명의 전사로서 가장 동경했던 사내이자, 나에게 한 줌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던 옛 장인어른의 부름이 나의 사고를 정지시킨다.
“지금 보고 싶다고 하셨으니 따라오게.”
그렇게 말하고 먼저 걸어가는 그녀의 등을 보며, 무거운 걸음으로 따라간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내일 저녁 7시에 시험이 있어, 업로드가 많이 늦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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