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26화 (26/59)

제 26화

마녀의 거처

옆구리의 조금 남아있는 통증과 온기를 느끼며 눈을 뜬다.

눈을 떠보아도 흐릿하여, 몇 번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한다. 그제야 흐릿함이 사라지고 똑바로 보이기 시작했다.

흐릿함이 사라진 세상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이리스였다.

“몸은 좀 괜찮나?”

그녀의 말에 잠시 몸 상태를 확인한다. 옆구리에 약간의 통증이 남아있고, 약간 어지럽지만 이 정도면 괜찮다.

“괜찮습니다.”

그리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내가 일어나려는 것을 그녀가 손으로 눌러 제지한다.

“그대는 아직 환자니, 조금 더 누워있게.”

부드러우면서 어딘가 단호한 목소리에 그 말을 들었다.

누워있으면서 생각을 해보니 뭔가 이상하다. 딱딱한 바닥에 누워있는 거 같은데, 머리에 느껴지는 감촉은 부드러웠다. 아이리스가 보이는 각도도 이상하다. 그녀의 상반신만이 보이는 각도에, 너무 가깝다.

고개를 돌려보며 상황을 파악한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있다. 잠시 사고가 정지하고, 여러 감정들이 올라와 일어나려 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그녀에게 제지당한다.

“무리해서 일어나지 말게. 상처가 낫기는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네.”

“무리하는 것이 아니라... 공녀님은 불편하지 않습니까?”

내 말에 그녀는 싱긋 미소를 짓는다. 어째서 웃는지 모르겠지만, 그 모습이 보기 좋았다.

“불편하지 않네. 내가 이러고 싶어서 하는 것이니 신경 쓰지 말게.”

그 말에 많이 생각들이 들었지만, 잠깐만 이 시간을 음미하고 싶다는 생각이 다른 잡생각들을 치워버렸다.

그 생각에 몸을 맡기고, 잠깐만 이 시간을 음미한다.

그 시간은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는 고요한 시간일 뿐인데, 어째서인지 마음이 채워져 간다.

그 시간을 충분히 음미하고 고요함을 치운다.

“공녀님 여기는 어딥니까?”

“그대가 준 지도에 표시된 장소일세.”

그 말에 눈만 움직여 주변을 둘러본다. 평범한 동굴의 모양새에, 중간중간 박혀있는 푸른 돌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신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고 레이첼이 안 보였다.

“레이첼은 어디 갔습니까?”

“주변을 잠깐 둘러보고 오겠다고 하더군.”

“혼자서도 괜찮은 겁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 아까 그 괴물을 물리친 것도 그녀가 아니던가?”

조금의 불안감이 있지만, 괴물을 죽인 그녀의 힘을 직접 보았으니 걱정은 접어둔다.

“그보다 공녀님은 괜찮으십니까?”

“그래, 괜찮네.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그대는 푹 쉬게.”

그녀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내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긴다. 나는 그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인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가 불편했는데, 마음을 인정하니 그녀의 모든 것이 편해지고 사랑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뿌리 깊은 상처에서 올라오는 불안감이 고개를 들이민다.

기대하지 마라. 사랑하지 마라. 이 순간의 감정마저도 곧 잊힐 것들이니, 받아들이지 마라. 너만 또 아파질 것이다.

그 외침을 무시할 수 없으면서도, 무시하고 싶다. 부정하고 싶다. 한 줌의 희망을 믿고 싶다.

희망과 깊은 상처가 만들어내는 복잡한 마음이 뒤섞여, 그녀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하여도, 지금 이 순간만은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다. 아픔 삶에서도 행복한 순간들이 있었으니, 잠깐 정도는 이 행복을 즐겨도 되지 않겠는가.

그리 생각하며, 이 시간을 음미한다.

그 시간을 음미하고 있을 때,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어째서 웃으시는 겁니까?”

“별거 아니네. 그저 즐거워서 웃었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우십니까?”

“그냥 그대와 있는 이 순간이 즐겁네.”

그 말에 나도 조금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입에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이 나올 것이라 생각도 못 했다.

정말 많이 달라졌구나.

전에 삶에서 본 그녀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 기꺼웠다. 이대로만 있을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텐데.

“처음으로 그대의 웃는 모습을 보는군.”

“처음 만났을 때 웃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짜웃음은 빼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아팠으니까. 그녀를 밀어내고 싶었으니까. 그녀의 앞에서 웃을 수가 없었다.

“그대는 매번 당황한 표정이나, 슬픈 표정만 보여주었지. 그런 것들보다 지금이 보기 좋구나.”

그녀의 낯간지러운 말을 듣고 있으니, 그녀를 보고 있기가 힘들어 눈을 돌렸다.

“그리고 매번 나를 밀어냈지. 지금은 밀어내지 않는군.”

“그건...”

그녀의 따뜻한 손이 내 입을 막는다.

“말하지 말게. 그냥 듣고 있어 주게.”

그녀의 손이 떨어져 나가고, 입술에 닿았던 온기가 사라진다.

“그대에 대해서 나는 잘 알지 못하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그리고 왜 나를 밀어내는지에 대해서도 모르네. 하지만, 꼭 전해야 하는 말이 있네.”

그녀는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연다.

“처음에는 그대에게서 어머니를 보았네. 그래서 그대에게 놓치고 싶지 않았네. 그런 마음을 품고 그대를 알아 가다 보니, 새로운 감정이 피어나더군. 처음에는 그 감정을 몰랐지만, 그대가 쓰러진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지.”

얼굴이 살짝 붉어진 그녀가, 잠시 뜸을 들이고 입을 연다.

“나는 그대를 사랑하네.”

심장이 부서질 듯이 뛰며, 시끄럽게 소리친다.

한평생 듣고 싶었던 말이 스며들어 남아있던 응어리를 녹이고, 흉터들을 감싼다. 고개를 들었던 불안함이 흩어진다.

시들었던 희망이, 한 줌밖에 남지 않았던 희망이 꽃을 피운다.

“대답은 하지 말게. 나중에 들어도 충분하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린다. 붉어진 옆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런 그녀에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나 또한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녀를 끌어안고 그 말을 전하고 싶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날뛰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 잠깐만 그 마음을 접어둔다.

그녀의 저주가 풀리는 날. 넘치도록 사랑을 고하리라.

그리 맹세를 하며,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지켜본다.

“레이첼이 좀 늦는 것 같군.”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주제를 돌린다. 그 모습에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는다.

“그거 좀 걱정되는군요. 같이 찾으러 가시겠습니까.”

“그대는 조금 더 쉬고 있게.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

“충분히 쉬었으니 괜찮습니다.”

그리 말하고 몸을 일으키고, 몸 상태를 확인해 본다. 옆구리에 남아 있던 통증은 완전히 사라졌고, 어지러움도 괜찮아졌다.

몸 상태가 괜찮은 것을 확인하고,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일어서지 못하고,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제법 오랫동안 머리를 올려놓고 있었으니 다리가 저렸으리라.

그녀에게 손을 뻗는다. 그녀는 잠시 내 손을 바라보고 손을 잡는다.

손에 따스함이 퍼져나간다. 그 따스함을 느끼며 힘을 주어 당긴다.

휘청거리며 일어서는 그녀를 잠시 지탱해주며,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다.

“힘드셨을 텐데. 일어나려 했을 때 왜 말리셨습니까?”

“그냥 그러고 싶었다고 말했지 않은가.”

여전히 불그스름한 기운이 안 사라진 그녀가, 눈을 살짝 피하며 대답한다. 그 모습에 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괜찮아졌으니, 그만 놓아주어도 되네.”

그녀의 말에 손을 놓는다. 따스함이 사라진 손이 허전하다. 그 허전함을 곱씹으며 먼저 걸어가는 그녀를 따라간다.

푸른빛이 맴도는 동굴에 우리의 발걸음 소리가 울린다. 그 소리가 이어지고, 우리의 앞에 두 개의 문이 나왔다.

한쪽은 열려있었고, 한쪽은 닫혀있었다.

우리는 열려있는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깐을 걸으니 동굴 같은 느낌은 사라지고, 오래된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의 내부 같은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도서관 같은 장소가 펼쳐졌고, 그 가운데에 레이첼은 푹신해 보이는 의자에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레이첼에게 다가가니 작게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그 모습에 우리는 잠시 웃고는,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레이첼은 눈을 비비며 멍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형제님, 자매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왔다. 둘러보고 온다고 했으면서 편하게 자고 있었군.”

“아 자매님 그게 말이죠. 둘러보고 있었는데, 의자가 너무 푹신해 보여서 잠깐만 앉아 있다가 보니 그만 헤헤.”

레이첼은 실실 웃으며 볼을 긁었고, 아이리스는 그런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안 다쳤으면 됐다.”

“자매님 혹시 걱정해 주신 거예요?”

“그런 거 아니다.”

“에이 솔직하지 못하시기는.”

레이첼이 웃으며 그녀에게 들러붙었고,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밀어내지는 않았다.

매일 투닥거리던 둘의, 조금은 친해진 듯한 모습에 조금 안심했다.

“그보다, 이제는 여기에 온 이유는 말해주는 게 맞지 않나?”

그녀의 말에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여기가 공녀님 가문에 저주를 건, 마녀의 거처입니다.”

“그렇군.”

아이리스는 잠시 생각하더니,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나를 계속해서 밀어냈지만, 생각보다 나를 많이 생각하고 있었나 보군.”

그녀의 말에 아직은 대답하고 싶지 않아, 발걸음을 옮겨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으로 향했다. 뒤에서 그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피어난 희망에 확신을 가져다줄 단서를 찾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제 소설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순수한애정물님 100코인 후원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