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5화
피어난 감정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되는 말라가던 세상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에게서 어머니를 보았다. 매일 밤 홀로 눈물을 훔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그에게 보였다.
그 모습이, 마음속에 파문을 일으켰다. 파문은 잔잔하면서도, 모든 곳으로 퍼져나갔다.
모든 곳으로 퍼진 파문은, 막아 두었던 벽을 두드렸다. 그 약한 파문은 계속해서 벽을 두드렸고, 이내 벽은 허물어졌다. 벽이 무너지며 감정들이 범람했다.
어머니에게 배운 행복함이, 어머니를 보고 느낀 슬픔과 아픔이 범람했다.
그 감정들은 무거워 내가 감당하지 못하여, 쏟아내었다.
쏟아 내어도 그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았고, 어머니를 닮은 남자를 갈구하게 만들었다.
의무가 전부였던 삶에 그가 비집고 들어와, 단조로운 삶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를 붙잡기 위해, 저주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저주는 반신에 이른 마녀가 우리 가문에 건 저주였고, 마녀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저주는 우리의 감정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가장 아플 때 그 감정을 돌려준다.
역대 가주들이 남긴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에 그런 저주가 어디 있는가?
감정을 잡아먹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시전자가 죽은 저주가 어떻게 판단을 하고, 가장 아플 때 감정을 돌려주는가. 그런 것은 상리에서 벗어났다.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기에 무시하고, 해주법에 관해서 찾아보았다. 가문에 기록된 해주법들은 모두 실패했다.
그 사실에 입맛이 쓰지만, 어딘가에는 방법이 있으리라. 시간을 들이다 보면 찾아낼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저주를 조사하고 있을 때, 황실에서 무투대회에 연설을 맡아 달라는 초대장이 왔다.
평소라면 핑계를 대고 무시했겠지만, 그가 수도에 있다는 사실이 생각나 초대에 응했다.
무투대회 예선 날 그가 보였고, 그의 옆에는 검은로브를 쓴 자가 있었다.
그것이 거슬렸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거슬렸다.
다음날, 나를 보며 당황하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후가 되어 박살 났다.
결승전 그는 난도질당하고, 무대는 그의 피로 붉게 물들어 간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기 힘들었다. 제발 그가 포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승리에 대한 집념을 담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길 수 없는 간극임에도, 포기하지 않는 집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집념 끝에, 그는 승리를 쟁취했다.
승리를 쟁취하고 환하게 웃는 그 모습에 눈이 부셨고, 알 수 없는 감정이 피어났다. 그 감정이 나의 몸을 움직여, 그에게 향하게 만들었다. 그에게 다가가, 휘청거리다 쓰러지는 그를 품에 안았다.
다친 그를 치료받게 하고, 그가 일어날 때까지 옆을 지켰다.
편안하게 잠든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감정이 꿈틀거린다. 그 알 수 없는 감정을 품은 채, 잠든 그의 옆을 지켰다.
잠든 그를 지키는 동안, 그를 놓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확신으로 변해 갔다.
깨어난 그에게 내 생각을 전했고, 그의 눈동자는 흔들렸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을 알 수는 없지만, 반드시 그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 마음을 품고, 해주법을 찾으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내 삶에 그의 비율이 커져갈 쯤, 그가 이곳에 찾아왔다.
숨어서 찾아온 거 같지만, 관문의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알아보고 보고를 올렸다. 그 보고를 보고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무투대회 때 같이 다니던 자와 함께 있었고, 그 둘이 같이 다니는 모습이 친해 보여 거슬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거슬렸다.
“몰래 왔으니 찾아갈 필요는 없다. 그리고 찾아갈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다.”
그의 말에 틀린 점은 없다. 몰래 찾아왔으니 찾아올 필요도 없다. 우리가 가까운 사이도 아니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너무 거슬려서 참을 수 없어 입을 열었다.
내 목소리에 그는 놀란 표정으로 돌아봤고, 그 모습을 보니 조금 통쾌했다.
그 통쾌함은 저녁 만찬에서 불쾌함으로 변했다.
그의 동행자가 로브를 벗으니, 달빛 같은 은발이 넘실거리며 흘러내린다. 눈은 루비를 조각하여 만든 것 같은, 아름다운 다크엘프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여인과 같이 여행했을 그의 모습이 떠올라 거슬렸다.
거슬려서 그를 한 번 그를 찔러보니, 다크엘프를 변호하는 그의 모습에 거슬림이 커졌다.
다크엘프의 고기를 썰어주는 모습이, 친함을 자랑하는 그들의 모습이,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지껄이는 다크엘프의 모습이 불쾌했다. 그 불쾌함이 나를 좀먹고,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자리를 떴다.
그런 불쾌함을 눌러 담고, 그들이 여기 온 목적이 무엇일지 추측하며 시간을 보냈다. 달이 떠올랐을 때, 확실한 결론을 내렸고 그를 찾아갔다.
어딘가 아련해 보이는 그가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술 냄새가 싫었지만, 참으며 내가 생각한 결론을 그에게 말했다. 다행히도 내 추측은 맞았고, 동행할 명분은 충분했다. 동행하겠다는 의사가 일방적인 동행 통보에 가까웠지만, 상관없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다크엘프와 둘이서만 다니는 것을 막고, 그를 알아갈 시간이 생겼으니 모양새가 어떻든 괜찮다.
그리고 다음 날, 우리의 여정이 시작됐다. 거슬리는 다크엘프가 끼어있었지만, 그래도 그와 같이 있을 수 있어 좋았다.
시간이 흘러 편안한 여정은 끝나고, 혹독한 설원이 우리를 반겼다.
설원의 끔찍한 환경 덕분에 몸은 지쳐갔지만, 함께 있으면서 새로운 그의 면모들을 알 수 있어 즐거웠다. 물론, 아직도 경칭을 쓰는 그의 모습과 친근하게 구는 다크엘프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래도 이 여정이 좋았다.
그 행복 여정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눈보라 너머에서 처음 보는 괴물이 모습을 보였다. 사자의 몸에 검은 가시가 몸에 달려있고, 노인의 얼굴을 가진 괴물이 우리를 노려본다.
그 괴물은 우리에게 달려들었고, 사선을 오가는 전투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괴물의 가죽은 질기고, 힘은 강대했지만,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너져 내렸다.
괴물의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에서 독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몸이 조금씩 둔해져 갔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힘의 균형이 깨졌다.
괴물의 가시가 그의 옆구리에 큰 상처를 남겼다. 장기가 있는 위치는 아니지만, 출혈이 심했다. 그의 몸은 조금씩 휘청거리며, 더 이상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피하기도 급급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괴물을 공격해 시선을 끌어보려 했지만, 괴물은 나를 무시하고 집요하게 그를 노렸다.
이내 그의 몸은 붉어진 눈밭에 쓰러진다.
심장이 철렁인다. 호흡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그 모습을 부정했다. 부정하고 또 부정하며 그를 불러보았지만, 그는 일어서지 못했다.
절박함이 나를 짓누른다.
쓰러진 그에게 다가가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몸을 던졌을 때, 뒤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푸른빛은 푸른 불꽃을 만들어내고 괴물을 집어삼켰다.
푸른 불꽃에 삼켜진 괴물은 비명을 질렀고, 마음에 안 들던 다크엘프가 그 숨통을 끊었다.
괴물의 숨통이 끊어진 것을 보고, 가방에서 포션을 챙겨 그에게 뛰어갔다.
가까이서 본 그의 모습은, 멀리서 보았을 때보다 처참했다. 옆구리에서는 피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코와 입에서 검은색 죽은 피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빛바랜 세상 속,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그의 색채가 흐릿해져 간다. 입안에 피의 비릿한 맛이 감돈다.
흐릿해져가는 그의 입에 포션을 물린다. 다행히 그는 잘 삼켜 주었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되었고, 뒤이어 미안함과 죄책감이 나를 덮쳐온다.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내가 대신 다쳤더라면... 그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그 생각들이 나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나를 찔러온다.
찔려진 마음에서 피가 흘러내려 눈으로 나온다.
그 피가 그를 적신다.
그가 손을 뻗어온다. 가죽장갑의 차가운 느낌이 뺨에 느껴진다.
분명 차가울 진데, 어째서인지 따뜻했다.
그 따뜻함은 잠시 물러나고, 다시 찾아왔다.
거친 그의 손이 뺨에 닿는다. 그 거친 손은 따뜻해서, 마음에 닿을 정도로 따뜻해서 슬펐다.
너무 슬퍼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하염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그가 받아주었다.
따스함을 느끼며 울고 있으니 그가 웃는다. 그 미소는 아름다워서 눈이 부셨다.
그런 미소를 지은 그가, 나의 뺨을 어루만져 주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울지 마라.”
그의 미소가, 그의 손길이, 덤덤하게 내뱉은 그의 말이 나의 마음을 적셔온다. 그리고 더 이상 그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덤덤하게 말을 마치고, 눈을 감고 잠에 빠진 그를 보고서야 알았다.
처음에는 그저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그에게 풀고 싶었던 거다. 그저 그랬을 뿐이었다.
그랬던 감정에 어느덧 새로운 감정이 피어났다. 처음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것을 알았다.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이 내게 찾아왔음을.
조금 늦게 피어난 감정을 품고, 그의 뺨을 쓸어본다. 따스함이 느껴지고, 주체하지 못할 감정이 넘실거린다. 그 넘실거리는 마음을 고이 접어두고, 그를 안아 든다.
품에 안긴 그의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얼마 남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같은 사건을 다른 시점으로만 풀어 간 것이라 지루할 수 있겠지만, 꼭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넣었습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