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화
설원과 비
마녀가 살았던 거처를 찾기 위해서, 설원에 진입한 지 삼 주야.
설원은 흉포한 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흩날리던 눈발은 앞을 보기 어려울 만큼 쏟아지고, 쌓인 눈은 하얀 늪이 되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싸늘한 공기는 냉혹한 한기가 되어, 보온 마법이 걸린 두꺼운 털옷의 존재를 퇴색시킨다.
한 자루의 명검처럼 날카로운 설원의 바람은 우리를 유린한다.
설원의 흉포함이 쉬지도 않고 입을 열던 레이첼을 침묵시켰고, 우리는 귀를 찢을 듯한 바람 소리만이 가득한 설원을 나아간다.
마녀의 거처까지 반나절 정도의 거리만 남았건만, 혹독한 환경 때문에 조금씩 지쳐가며 걸음이 무거워진다.
폐에 스며드는 얼어붙은 공기가 체온을 뺏어간다. 높이 쌓인 흰 늪이 우리의 체력을 빼앗고, 앞에 사람의 등만이 겨우 보이는 시야는 불안감을 조성한다.
이런 상황에도 설원의 경험이 있는 아이리스는 지도와 나침반을 확인하며,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가 우리를 인도한다.
뒤를 한 번 돌아본다. 레이첼의 안색은 조금 창백해 보였다. 다크엘프들 특유의 인간보다 낮은 체력과 경험하지 못한 환경 때문에, 우리 중에서 그녀가 가장 힘들 것이다.
“레이첼 괜찮나?”
“네. 괜찮아요.”
그녀는 괜찮다고 말하지만, 평소보다 확연하게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아침부터 해가 내려오기 시작할 때까지 간단한 보존식만 먹으며, 이런 곳을 걷고 있으니 힘든 것이 당연하다.
이런 상황 때문에 잠시 쉴 곳을 찾고 싶지만, 끔찍한 시야 때문에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을 감내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한참을 침묵 속에서 걷고 있을 때, 레이첼이 입을 연다.
“형제님 이상한 소리 안 들리세요?”
“나는 안 들린다. 공녀님은 무슨 소리가 들리십니까?”
“나도 안 들린다.”
나와 아이리스는 레이첼이 들은 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무시할 수 없다.
레이첼이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지만, 청각이 발달한 다크엘프가 한 말이기에 신경을 써야 한다.
“레이첼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짐승의 울음소리 같아요.”
그 말이 거슬린다. 설원은 특유의 혹독한 환경 때문에, 짐승이 살만한 환경은 아니다. 그녀가 잘 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희망적인 생각보다는 최악을 생각하는 게 낫다.
“공녀님 혹시 모르니, 조심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다.”
“레이첼 소리가 가까워지거나, 다른 소리도 들리면 다시 말해다오.”
“네.”
혹독한 환경에 지쳐가고 있는 와중에, 알 수 없는 짐승도 경계하니 심력이 빠르게 소모된다.
지치면서도 곤두선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흰 세상이 조금 붉게 물들어간다.
“밤이 되기 전에는 도착할 것 같다.”
선두에 선 아이리스가 희망적인 소식을 꺼냈다. 그 희망적인 소식에 가장 힘들었을 레이첼을 돌아봤다.
“레이첼 들었지? 조금만 더 힘내자.”
“네.”
레이첼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목소리는 조금 밝아졌다. 그 모습에 조금 안심하고 아이리스의 등을 바라보며, 붉은빛이 스며든 새하얀 세상을 걷는다.
붉은빛이 절정을 찍었을 때, 거센 눈발과 바람이 차츰차츰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희소식들이 찾아왔을 때, 거슬렸던 사실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형제님, 짐승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요.”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나?”
“그런 것 같아요.”
레이첼의 말에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든다. 아이리스도 검을 뽑아 들어 전방을 주시한다.
지쳤지만 아직은 예민한 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온다. 그 희미한 소리는 점차 덩치를 키워간다.
레이첼은 그 소리를 짐승의 울음소리라 했지만, 내 귀에는 여러 가지 목소리가 섞인 비명에 가까웠다.
그 소리가 가까워졌을 때, 괴물의 형상이 나타났다.
검은색 가시들이 달려있는 사자의 몸통에, 노인의 얼굴에 갈기가 달린 괴물이 우리의 앞에 나타났다.
그 괴물은 비명을 지르며 우리에게 달려든다.
오러를 검에 두른 아이리스가, 달려드는 괴물을 조각낼 기세로 검을 휘두른다. 아이리스의 검과 괴물이 발톱이 부딪히고, 아이리스가 밀려난다.
그녀가 만들어준 틈에 괴물의 옆을 파고들었지만, 검은색 가시는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나를 덮쳐온다.
몸에 자리 잡은 마나를 끌어올려 검에 오러를 두른다. 푸른빛을 머금은 검과 검은색 가시가 부딪히며, 귀를 찌르는 소리가 나며 가시가 튕겨져 나간다.
그 틈에 괴물의 옆을 베어봤지만, 강철도 베어내는 오러는 괴물의 가죽만을 베고, 그 이상은 침범하지 못했다.
괴물의 베어진 가죽 사이에서 검은 피가 떨어져 나오고, 지독한 냄새가 피어오며 눈을 녹여 내린다. 그 모습에 물러나 천으로 코를 막는다.
“피가 독인 것 같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겠다.”
아이리스는 괴물의 정면에서 대치하며 대답했고, 레이첼은 단검을 손에 쥐고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린다.
그 모습이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지만, 그녀에게 무슨 생각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검을 고쳐 잡는다.
괴물의 신경이 분산되도록 집요하게 옆을 공격한다. 그런 나의 행동에 가시가 대응해 온다. 오러에도 베이지 않는 가시는 내 행동을 방해하기에 충분했고, 지친 육신과 많지 않은 마나가 점차 발목을 잡아 온다.
곤욕스럽다. 오러에 베이지 않는 괴물을 만나본 적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럴 때마다 장기전으로 지치게 만들고 죽였다. 지금은 그런 방법은 불가능하다.
설원에서 체력을 빼앗긴 상태에서 장기전으로 간다면, 오히려 우리가 말라 죽는다.
그런 와중에 아이리스도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옆을 공략하는 것을 포기하고 아이리스에게 합류했다.
가시와 다르게 한방 한방이 묵직한 괴물의 앞발은, 힘을 흘리더라도 육신에 부담을 주어 온몸이 비명을 지른다.
비명을 지르는 육신의 소리를 무시하며,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이어 나간다.
사선을 오가는 싸움이 이어지며, 괴물의 몸에 상처가 조금씩 늘어난다. 괴물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독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몸이 지쳐서 그런지, 몸이 둔해진다.
몸이 둔해져, 괴물의 앞발공격에 이이서 내 옆으로 파고드는 가시에 반응하지 못하여, 옆구리를 내어준다.
어두워진 설원이 다시 붉게 물든다. 아픔이 몰려온다.
아픔을 무시하고 몸 상태를 확인한다.
다행히 장기나 뼈가 상한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지친 육신에서 빠르게 피가 흘러내린다.
정신이 흐릿해진다. 괴물의 몸체가 흐릿하고 보인다.
나에게 향하는 공격들을 감으로 간신히 피하고 있지만, 이것조차 곧 끝날 것이다.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검을 잡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사라져간다. 다리가 풀리려고 한다.
아이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마저 흐릿하다.
모든 것이 흐릿한 세상에 한 줌의 빛이 빛난다.
그 빛은 푸른 불꽃을 만들고 괴물을 감싼다. 괴물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치고, 푸른 불꽃이 서린 단검이 그 끝을 고한다.
레이첼이 괴물의 끝을 고했다. 그 장면만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편안한 안식이 되기를.”
끝을 맞이한 괴물에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흐릿했지만, 그래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괴물의 끝을 고하고 안식을 비는 그녀의 모습에, 음습하거나 장난스러운 모습은 없고, 엄숙하고 성스러웠다.
색다른 레이첼의 모습을 보고 있을 때, 흐릿한 세상 속에서 흐릿한 아이리스가 다가온다.
그녀가 내 입에 붉은색 무언가를 담은 병을 물려준다. 익숙한 향이다.
전장에서 여분의 생명이나 마찬가지인 포션의 쓴 향.
그 향을 맡고, 잘 안 움직이는 목을 억지로 움직여 삼킨다. 아무리 마셔도 적응되지 않는, 쓰디쓴 맛과 향이 나를 괴롭힌다.
구멍 난 상처에서 지쳐지는 통증이 느껴진다. 이 끔찍한 고통이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이니 안심했다.
그 고통을 느끼며 안도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비가 떨어진다. 차갑다. 차가우면서 뜨겁다.
흐릿한 세상에서 그 이상한 비가 조금씩 떨어져 나를 적신다. 그 비를 막으려 손을 뻗는다. 장갑 너머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온기가 달갑다. 조금 더 자세히 느끼고 싶다.
그리 생각하여 얼마 없는 힘으로 장갑을 벗고, 다시 손을 뻗는다.
따스하구나. 언제나 따스하다고 생각했던 온기구나.
그 따스한 온기 너머에서 차가운 비가 흘러내린다. 구슬픈 소리도 들려온다.
따스한 온기와 비 너머에, 슬퍼 보이는 그녀가 보인다. 그 모습이 너무 슬퍼 보여 눈물을 닦아준다.
그러고 있으니 슬프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져 간다.
새로이 기회를 얻고, 지난 삶을 떠나보낸 밤에, 그녀가 이렇게 내 눈물을 닦아주었지...
그 기억이 생각이나 기분이 묘해진다.
겨우 한 번의 웃음에 눈물을 흘리고, 혼자 아파하고는 밀어냈으면서...
저주를 풀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고, 행복할 확신이 없다고 겁먹고 밀어냈으면서.
밀어낸 그녀가 흘리는 눈물에, 다시 한번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하는구나.
알고 있었으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그녀를 보며, 나 또한 새롭게 사랑에 빠졌음을 알고 있었으면서, 이제야 그 사실을 바라보는구나.
그것이 웃겨서, 바보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웃고 나서, 슬퍼 보이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본다.
“울지 마라.”
이런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잠시 잠에 빠져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다음 편은 아이리스 시점으로 나올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