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23화 (23/59)

제 23화

설원

아이리스 그녀가 우리와 동행한 지 칠 주야. 그리고 여름의 끝이 보이는 날.

눈이 흩날린다. 흩날리는 눈은 바닥에 차곡차곡 쌓여, 우리의 발을 붙잡는다.

계절을 무시하는 추위가 호흡을 하얗게 얼려버리고, 품속으로 파고든다.

들판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베이는 듯한 아픔을 주며 지나간다.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한 겨울의 땅. 설원에 왔음을 알려준다.

“형제님 저 추워서 죽을 것 같아요.”

“조용히 하고, 발이나 움직여라.”

“자매님 너무해요.”

“누가 자매님이냐! 그런 호칭으로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처음으로 경험하는 설원에 죽는 소리를 내는 레이첼, 그런 그녀에게 한 소리 하는 아이리스.

칠 주야 동안 같이 동행했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광경이다.

“아무튼, 형제님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지도로 보면 4일 정도 걸릴 것 같은데. 날씨가 안 좋아지면, 더 걸린다고 생각해라.”

4일 정도 걸리거나, 운 없으면 더 오래 걸린다는 말에 레이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형제님 저는 돌아가서 기다리면 안 될까요?”

“왔던 길을 기억하고 있으면 가도 된다. 기억 못하면 헤매다가 얼어 죽겠지만.”

“그냥 따라갈게요.”

마차와 말이 다닐 수 없는 설원 때문에, 이틀 전 마지막 마을에서 맡기고 걸어왔으니.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혼자 돌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레이첼은 그걸 인지했는지, 설원에 들어서고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춥다고 난리 치던 입을 다물었다.

레이첼이 입을 다무니 고요한 설원은, 차가운 바람 소리와 눈을 밟는 우리의 발걸음 소리만이 퍼져나간다.

“조용해지니 좋군.”

아이리스의 말에 레이첼이 불만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아이리스가 그런 걸 신경 쓸 사람은 아니었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무언가 새로웠다. 저번 삶에서는 만날 일 없던 자들이 만나고, 본적 없는 모습을 보여주니 그 모습 하나하나가 새로웠다.

그 새로움이, 그녀의 다양한 모습이, 가면 갈수록 나에게 기대감을 심어주고, 희망을 보여준다.

그것이 설레이며, 또 불안하다.

그런 복잡한 감정 때문에 그녀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게 만든다.

그 복잡한 생각과 마음으로 새하얀 설원을 걷는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설원을 조금 걸었을 때, 뒤에서 툭툭 치는 느낌을 받아 돌아본다.

“형제님 배고파요.”

그 말에 잠시 머무를 만한 바람막이가 있는지 주변을 둘러본다. 아쉽게도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눈밭이다. 이런 곳에서 자리 잡고 먹을 수 없으니, 공간확장 마법이 거린 배낭에서 육포를 몇 개를 꺼내서 그녀에게 준다.

“받아라.”

딱딱한 육포를 받으며 그녀는 처량한 눈동자를 보내왔지만, 어쩔 수 없다. 딱딱하고 질겨서 그냥 먹기는 힘든 건 알지만, 아무것도 없는 설원 한 가운데에서는, 이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다.

“어쩔 수 없으니 조금만 참아라. 저녁에는 제대로 먹을 수 있을 거다.”

“네...”

그녀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육포를 입에 넣는다. 그 모습이 조금 처량해 보였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기에 눈을 돌렸다.

레이첼에게서 눈을 돌리고, 선두 서 있는 아이리스에게 다가간다.

“공녀님 육포 좀 드시겠습니까?”

“육포는 조금 있다가 먹지. 그건 그렇고, 그 딱딱한 호칭 좀 그만두게. 칠 주야 동안 약혼자와 같이 다녔는데, 계속 그렇게 불러야겠나?”

그녀의 말이 틀린 점은 없다. 첫 만남도 아닌데, 나처럼 약혼자를 향해 딱딱한 호칭을 쓰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아직도 마음은 정해지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다.

“조금 고민해 보겠습니다.”

“고민할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했으면 좋겠군.”

동행하고부터 아이리스는 떠나기 전날 밤에 했던 것처럼 강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가까이 있으니 뜸을 들이며 다가올 생각인 것일까?

무엇이 되었든, 아직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는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저는 자매님이라고 편하게 불러드릴게요.”

“너는 편하게 부르지 마라! 공녀님이라고 불러라.”

“왜 저만 차별하시는 거예요! 자매님 너무해요.”

투닥거리는 둘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오고, 복잡하고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형제님. 자매님이 저만 차별해요.”

“차별이 아니라, 정당한 대우다.”

이런 모습들이 어쩐지 꿈같이 느껴져 편안하면서도, 금방이라도 깨어날 꿈같아 불안함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는다.

“정당한 대우가 아니라 차별이에요! 형제님한테만 잘 해주시고.”

“약혼자와 이방인의 대우가 같을 수 없는 법이다.”

“제가 왜 이방인이에요? 다들 카이안님의 축복을 받은 사이인데.”

“난 그런 건 받은 기억도 없고, 필요도 없다.”

“카이안님이 들으시면 슬퍼하실 거예요.”

“흥. 슬퍼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아이리스의 말에 충격받은 표정을 지은 레이첼이 나에게 들러붙어 도움을 요청한다.

“형제님. 자매님 때문에 카이안님이 슬퍼하시게 생겼어요. 혼내주세요!”

그 말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이리스를 처음 만난 날 나에게 보여 주었던, 음습한 마음과 거리가 먼 아이 같은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웃으시는 거예요!”

“웃어서 미안하다. 공녀님 너무 그러진 마세요. 한동안 같이 다닐 사이인데.”

“흥. 그대는 저자의 본 모습을 몰라서 그런다.”

아이리스가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레이첼의 음습한 면모라도 본 것일까. 그렇다면, 저리 불친절하게 대하는 것도 이해는 간다. 나도 레이첼의 그런 모습을 볼 때 소름 돋는 느낌을 받으니.

“어찌 됐든 지금은 서로 도와야 할 동료지 않습니까?”

“맞아요! 동료한테 너무해요.”

아이리스는 내 말에 맞장구치는 레이첼을 한 번 노려보고, 한숨을 내쉰다.

“알았다. 자중하지.”

“감사합니다.”

그녀의 말에 레이첼은 빙긋 웃고, 그 모습을 아이리스는 못마땅하게 쳐다본다.

이런 대화들이 몇 번 반복이 되고, 하얀 설원이 불그스름하게 물들며 하루가 저물어 간다.

낮보다 바람이 더 심해지는 밤이 찾아오기 전에, 우리는 운 좋게 발견한 얕은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얕은 동굴에 모닥불을 피워 얼어버린 몸을 녹이며, 젖은 옷가지와 신발을 말린다.

“이제 살 것 같아요.”

“엄살은.”

“엄살 아니에요.”

“흥.”

또 투닥거리는 그녀들을 내버려 두고, 솥을 꺼내어 굶주린 배를 채울 준비를 한다. 눈을 녹여 물로 만든다. 물이 되어버린 눈에, 말리고 빻은 고기 가루를 풀고, 얼마 없는 야채들을 손질하여 넣는다.

따뜻하고 배를 자극하는 향이 퍼지자, 레이첼이 들러붙는다.

“형제님. 배고파요.”

“조금만 기다려봐라.”

“네!”

매번 음식을 준비할 때마다 변함없는. 이런 레이첼의 행동은 너무 당연해지고, 익숙해 져버렸다. 물론 그 모습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리 말해도 변하지 않기에 조용히 넘어간다.

그리 생각하며 다 조리된 스튜를, 배고프다고 난리 치는 레이첼에게 먼저 건네고, 조용히 기다리는 아이리스에게 건넨다.

하루에 얼마 없는 조용한 시간이 흐른다.

가득 만들었던 스튜는 다 비어버리고, 세상은 완전히 어두움에 잠긴다.

“오늘 불침번 순서는 처음은 저, 그다음은 레이첼, 마지막은 공녀님입니다.”

“네~.”

“알겠다.”

“전 중간 불침번이니까 먼저 자볼게요.”

레이첼은 모닥불 주변에 두꺼운 침낭을 꺼내어 눕고는, 얼마 안 가 조용한 콧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들었다.

“공녀님도 피곤하실 텐데 주무시지요.”

“아직 잠이 안 오니, 조금 있다가 자도록 하지.”

그녀의 말을 끝으로 정적이 찾아온다. 레이첼이 깨어 있을 때는 덜했지만, 이렇게 둘만 깨어있으니 숨이 막히면서도,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이상해진다.

괜히 잘 타고 있는 모닥불을 나뭇가지로 뒤적거린다. 그때 아이리스가 정적을 깨트린다.

“그대는 안 피곤한가?”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이상하군. 설원에 처음 오는 사람이면, 피곤해서 저것처럼 잠드는 것이 정상인데.”

그녀의 말에 내 말실수를 깨달았다. 나는 설원이 처음이 아니기에 괜찮지만, 처음 설원을 경험하는 자들은, 처음 경험하는 가혹한 환경이기에 첫날에 뻗는 게 당연하다.

“또 대답하지 않는군... 그대는 볼 때마다 신기하네. 그대와 관련되면 감정에 쉽게 휘둘리게 되고, 그대는 어째서인지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거 같고, 경험했을 일이 없는 것들에 익숙하더군.”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침묵하고 있으니, 그녀가 입을 연다.

“대답하기 곤란하면 하지 말게. 계속해서 침묵하게. 하지만, 언젠가 나에게 말해줄 날이 올 거라고 믿겠네.”

그 말에 마음이 울컥했다. 저 말이 무슨 마음으로 하는 것인지 알기에, 내가 그랬었기에 그녀의 말이 마음에 스며든다.

그런 예전의 나 같은 그녀에게 대답을 해주고 싶지만, 아직은... 아직은 할 수 없다. 조금의 확신이 생기는 날 그녀에게 말할 것이다.

그대는 모르겠지만, 오래전부터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좋아했다고.

그 말을 마음속에서만 말해보며,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뒤적인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제가 비축분 없이 중간고사 기간을 맞이한지라, 한동안 올라오는 시간이 좀 이상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매일 한 편씩은 올릴 생각입니다.

8화와 9화에 짐승 편들은 조금 수정해서, 욕들은 전부 삭제했습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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