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화
지독한 향수와 달라진 그녀
아이리스가 내어준 손님용 방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멀리 보이는 차가워 보이는 성벽,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정원, 그리고 내가 자주 시간을 보냈던 연무장이 보인다. 언제나 변함없는 그 풍경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진다.
언제나 변함없는 풍경은 치우고,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별들은 수줍음을 타 구름 뒤로 숨었고, 홀로 떠 있는 달은 오늘따라 유독 밝아 보인다. 달이 밝아 보여서, 이상한 기분을 털어버리고 싶어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창밖으로 보던 정원을 거닐어 본다. 지금은 찾아오는 이가 없어, 존재 이유가 없는 정원은 외로워 보인다. 그 외로운 정원을 거닐고 있으니, 짙은 향수가 몰려온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나와 아이들이 매일 찾아온 정원에서 지독한 향수를 느낀다. 그 향수가 지독하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게 만든다. 너무 사랑스러운 그 소리를 더 듣고 싶으면서도, 듣고 싶지 않다. 들을 수 없는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귀를 막는다. 귀를 막아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여온다.
그 웃음소리 때문에 이상한 기분이 더 커져간다.
그 이상한 기분에서 도망치기 위해서, 이곳에서 도망친다.
도망친 발걸음은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연무장을 걷는다.
저번 삶에서 매일같이 오던 연무장을 걷다 보니, 한쪽에 놓아둔 목검들이 눈에 띈다. 목검을 보니 또 향수가 밀려올 거 같아 눈을 돌린다.
눈을 돌렸지만, 이미 향수는 잔잔히 밀려든다.
틀렸다. 이상한 기분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이곳에서 향수를 느낄 수 없는 곳은 없었다.
그것을 절감하며, 방으로 돌아간다.
방으로 돌아왔지만, 향수는 사라지지 않는다.
혼자 힘으로는 지독한 향수를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술이 필요하다.
그리 생각하여 시종을 부르는 종을 흔든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노크 소리가 들려와 문을 연다.
“부르셨습니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나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눈앞에는 반쯤 희어버린 흑발을 길러 묶고, 콧수염을 단정히 기른 중년의 끝자락에 서 있는 사내가 보인다. 기억보다는 젊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친우의 모습이 나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든다.
요동치는 마음을 억지로 무시하고 입을 연다.
“잠이 안 와서 그런데, 술을 좀 가져와 줄 수 있겠나? 잔은 2잔 가져왔으면 좋겠군.”
“금방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옛 친우가 허리를 살짝 숙인 후 돌아간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지독한 향수를 잊으려고 했건만, 잊지 못할 향수가 눈앞에 나타났다.
모든 것이 낯선 이곳에서 나를 보좌했던 나의 전속집사이자, 이 차가운 성에서 몇 없던 나의 친우. 한스...
친우의 젊은 모습을 보니, 나보다 먼저 떠나버린 친우를 만나니, 떨쳐버리고 싶었던 향수는 나를 완전히 집어삼킨다.
지독한 향수의 삼켜진 나는 그를 기다린다.
시간이 조금 흘러 그가 술을 들고 돌아왔다. 들고 온 술을 내 앞에 놓은 그를 불러본다.
“혹시 해야 할 일이 있나?”
“없습니다.”
“그럼 잠깐만 대작해주며, 푸념을 들어줄 수 있겠나?”
“그 정도야 당연히 해드리겠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그가 빼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그 생각대로 되어서 다행이다.
그리 생각하며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 그에게 잔을 넘긴다.
잔을 받은 그와 잔을 한 번 부딪히고, 술과 함께 향수를 들이킨다.
지치고 힘든 날마다, 이렇게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힘든 것들을 조금이나마 털어내었다.
그렇게 나의 힘이 되어주었던 친우를 보며 잔을 채운다.
눈앞의 그와 하고 싶은 말들이 많다. 나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을 옛날처럼 토해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할 수야 있겠지만 의미가 없다.
시간의 간극이 다른 그에게 괴리감을 느낄 거다. 토해낸다고 편해지지 않을 거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들을 삼키고, 술을 마신다.
술이 다 떨어갈 때쯤 그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하고 싶었던 말들을 내뱉고 싶어졌다.
“고맙네. 자네 덕분에... 힘이 났네.”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친우는 두서없는 나의 말을 웃으며 받아들이고 마지막 잔을 비운다.
“술이 다 떨어졌으니 더 가져오겠습니다.”
“아니네. 이 정도면 충분하니 그만 가보게.”
“알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자네도 좋은 밤 되게.”
빈 술병과 잔을 들고 가는 친우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 다 내뱉지 못한 말을 내뱉는다.
“자네 덕분에 차가운 이곳에서 적응할 수 있었네. 그런데 돌이켜보니 나는 자네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더군... 미안하네. 매일 힘든 것들만 토해내던 친우라서, 임종조차 지켜주지 못한 친우라서... 미안하네. 고마웠네.”
나 혼자 미래를 살고서, 과거를 보며 하지 못한 말들을 토해내는 모습이 이상하고, 들어야 할 사람은 듣지 못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이상했던 기분이 나아졌다.
완전히 잠겨버린 향수 속에서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곱씹는다. 곱씹고 또 곱씹고 나니 행복했던 일들이 생각보다 많았음을 알게 된다.
그 행복했던 일들을 곱씹을수록, 먼저 떠나보내었던 친우들이 보고 싶어진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진다.
향수 속에서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린다.
“혹시 깨어있나?”
나의 가장 큰 행복이자, 나의 가장 큰 아픔이었던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에 잠시 고민했다. 고민하니 지금이 아니면, 향수에 잠긴 지금이 아니면, 그녀를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을 거 같아 대답했다.
“들어오시면 됩니다.”
조금 가벼운 차림의 그녀가 문을 열고서 들어온다. 불편함과 함께, 신혼 시절 그녀의 모습이 생각나 가슴이 두근거린다.
“밤에 찾아서 미안하군. 그래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네. 그런데, 술이라도 마셨나?”
“잠이 안 와서 조금 마셨습니다.”
감각이 예민한 그녀가 술 냄새를 맡고 인상을 살짝 찌푸리고는,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내 앞의 자리에 앉는다.
“그대는 술을 많이 좋아하는가 보군. 나중에 아버님 술 상대도 하면 되겠군.”
그 말에 아무런 말도 안 하고, 표정조차 없는 옛 장인어른이 떠올랐고, 바로 머릿속에서 치웠다. 그런 사람과 술을 마시고 싶지 않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보다 하실 말씀은 무엇입니까?”
“시간이 늦었으니 본론부터 말하지. 내일부터 그대와 함께 다닐 생각이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저희는 내일 떠날 생각입니다.”
“알고 있네. 그래서 말한 거네.”
무슨 생각으로 따라오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좋지 않다. 그녀와 같이 다닐 자신이 없다. 그녀를 볼 때마다 밀어낼 각오를 하지만, 그녀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나를 믿지 못한다. 떨어트려야 한다. 그리 생각하고 입을 열려고 했을 때,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그대는 카이안과 관련된 일을 하려고 하겠지. 그렇지 않나?”
그녀의 입에서 카이안의 이름이 나와서, 열려고 했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그녀가 카이안을 알고 있는 건 상관없다. 기록이 말소되었다고 하나, 초대가주가 카이안의 사도였으니 알아도 이상한 건 아니다. 하지만. 나를 보면서 카이안의 이름이 나온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가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말이 없는 거 보니 비슷하거나, 맞나보군. 자네는 아는지 모르겠지만, 초대가주가 카이안의 사도였네. 그 덕분에 여러 가지 기록이 남아있지. 예를 들어 다크엘프들이 카이안을 모신다는 이야기 같은 거 말이네.”
그녀는 레이첼을 보고 이미 반쯤 확신을 했던 것이다. 최악이다. 빠져나갈 곳이 보이지 않는다.
빠져나갈 곳이 보이지 않아, 죄 없는 입술을 씹는다.
“우리 가문이 지금은 카이안을 모시고 있지는 않지만, 카이안의 사도였던 자의 후손으로서, 북부를 수호하는 자로서 동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네. 그러니, 그대에게는 거부할 권리는 없네.”
그녀는 웃으며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럼 내일 아침 식사 때 자네 동료에게도 말하지. 그럼 좋은 밤 보내게.”
그 말을 끝으로 방문을 열고 나간다. 그 자리를 멍하니 보고 있으니, 그녀가 다시 돌아온다.
“중요한 걸 안 말해서 다시 왔네.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게. 그대가 어디로 가든,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니까.”
그 말을 끝으로 다시 가버렸다. 그 모습을 곱씹으니 웃음이 나온다.
저번 삶에서는 내가 죽도록 당기는 역할이었건만, 이제는 그녀가 당기는구나.
그것이 싫으면서도, 좋았고, 부질없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저번 삶에서 그녀에게 저주가 없었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았을까? 매일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살아갔을까?
모르겠다. 너무 부질없고, 일어날 수 없던 일이기에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번 삶에서는 이룰 수 있지 않을까?
적응되지 않는 그녀의 모습 때문에, 또 기대를 하게 된다. 또 꿈을 꾸게 된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아니면 더 큰 아픔을 선사해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미련한 내 마음은 기울어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향수 속에 잠긴 채 밤을 보낼 줄 알았는데... 너무 달라져 버린 그녀가 나를 흔들어놔서, 그렇지 못하게 되었다.
불편하면서도, 기대를 하게 만드는 그녀를 생각하며, 잠에 빠져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부터 이야기에는 영향이 없는 선에서 이전 편들을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독성을 위한 수정이라 다시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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