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대를 사랑하여 아팠다-20화 (20/59)

제 20화

북부 미네소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여름이 마지막 사력을 짜내는 시기에 이곳에는 서늘한 바람이 분다.

더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땅, 내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아픔의 장소. 북부에 도착했다.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곳에, 도망치고자 했던 곳에 스스로 찾아왔다.

다 마녀 때문이다. 저주를 건 마녀의 거처가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거다.

한숨이 나온다.

매번 희망에 배신당한 삶을 살았으면서, 또 작디작은 희망을 품고 저주의 흔적을 찾아온 나의 상황에 자조만이 새어 나온다.

어쩌겠는가 항상 그리 살아와서 고치지 못하는 것을

그리 생각하며 품속에 넣어둔 책을 만진다. 초대 가주이자, 영웅의 불운한 삶이 담긴 책. 대사제가 나의 것이라고 떠넘긴 책. 그 책을 한번 만지고는 다시 마차의 고삐를 잡는다.

“형제님 저 멀리에 있는 얼음은 뭐에요?”

어째서인지, 나를 따라가겠다고 고집 피우며 따라온 레이첼이 가리킨 방향을 본다. 아주 작은 점이 보인다.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든 점이지만, 방향을 보니 그녀가 말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북부의 중심도시 미네소타다.”

“에이~ 거짓말 하지 마세요. 얼음이 어떻게 도시에요?”

“가보면 알 거다.”

그녀는 의심하는 표정을 지으며 쳐다보지만 무시하고 마차를 몬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이 커져만 간다. 그 점이 커질수록 속이 울렁거린다.

“형제님 저기 있는 얼음 혹시 성벽이에요?”

“그래, 녹지 않는 얼음으로 성벽을 쌓은 거다.”

“녹지 않는 얼음이라, 신기하면서 예쁘네요.”

“... 그래, 예쁘지.”

얼음으로 지어진 성벽은 확실히 예쁘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좋아했었다.

“길도 잘 아시고, 도시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데 여기 와보신 적 있으세요?”

“그래. 약혼자가 여기 살거든.”

아내이자 약혼자가 살고, 내가 살았으며, 내가 죽었던 곳이니 잘 알 수밖에 없지.

“오~ 형제님 약혼자도 있어요?”

그녀는 내 옆구리를 찌르며 실실 웃는다.

“귀족이라면 평범한 일이다.”

“그래요?”

그녀는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미소를 짓는다.

“그래도 결혼할 사람이니까 마음이 있는 거 아니에요? 지금도 이 넓은 북부에서, 굳이 약혼자가 사는 도시를 골라서 가고 있잖아요.”

그녀가 나의 복잡한 심경을 몰라서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그 말이 거슬려 반박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약혼자라고 다 결혼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북부가 넓지만, 정비를 할 만한 도시가 별로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미네소타에 들리는 거다.”

“흠. 그렇다고 해드릴게요.”

그녀의 묘하게 짜증 나는 표정과 말투가 신경을 긁는다. 신경을 긁고 있는 그녀에게 한마디 하고 싶지만, 한마디 하면 매번 꼬투리를 잡아서 질질 늘어질 것이 뻔히 보여 참는다.

“그건 그렇고 약혼자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또 질문해오는 그녀의 말에 답하기까지 잠시 시간이 걸렸다.

“내가 동경했던 사람이다.”

“형제님이 동경했으면 대단한 사람이겠네요.”

“... 그래, 대단하지.”

말하며 생각할 때마다 쓰라려 온다.

“근데 그런 사람이랑 약혼하면 좋은 거 아니에요? 마음이 있냐고 했을 때 왜 대답 안 하셨어요?”

오늘따라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버겁다.

“그래, 좋았지... 지금은 아니다.”

그녀는 내 대답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럼”

또 말을 하려고 하는 그녀의 입을 막는다.

“거의 다 왔으니 얼굴이나 가려라.”

그녀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복면을 쓰고 로브를 깊게 덮어쓴다. 그리고는 내 옆구리를 콕콕 찔러오지만 무시한다. 찌른다고 돌아보면 필담으로 말을 이어갈 테니 무시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렇게 그녀를 무시하고, 경비병들이 서 있는 관문으로 마차를 몬다. 너무나 익숙한 관문이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모습에 괴리감이 든다.

“통행증이나, 신분증을 제시해 주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신분증 대신 미리 준비해두었던 통행증을 병사들에게 넘긴다. 경비는 통행증을 확인하고, 몸을 꽁꽁 싸매서 감추고 있는 레이첼을 잠시 쳐다보고는 통행증을 돌려준다.

“통행증은 이상이 없습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꽁꽁 싸매고 있는 그녀 때문에 실랑이를 벌일 줄 알았는데, 아무 일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다. 실랑이를 벌이다 신분증까지 보여주게 되면, 분명 아이리스의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다. 저주를 풀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그녀를 보고 싶지 않다.

그런 상념을 하고 있을 때, 옆구리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묵직한 충격의 원흉을 한 번 노려본다. 눈을 찌푸리고 있는 레이첼이 필담 책을 들이민다.

「왜 자꾸 무시해요?」

“도시에서 마차 몰고 있을 때 한눈팔면 위험해서 그런 거다.”

그렇게 말하고 다시 앞을 바라보며, 기억하는 여관 중 방음이 가장 잘되는 여관을 향해서 마차를 몬다. 조금 시간이 지나 내 기억 속의 여관의 위치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낡은 집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레이첼이 나의 어깨를 흔들어 돌아본다.

「설마 여기서 잔다는 소리는 아니죠?」

“그런 거 아니다. 길을 착각했을 뿐이니 걱정 마라.”

불신의 눈빛을 보내는 그녀를 무시하고, 기억을 더듬으며 여관이 있을 만한 곳으로 마차를 몰았다.

다행히 다음으로 찾은 여관은 기억하던 장소에 깔끔한 모습으로 있었다. 안심하며 여관 옆 공터에 마차를 세운다.

“여기 있어라. 금방 갔다가 올 테니.”

그녀가 끄덕이는 걸 확인하고 여관으로 들어간다. 식사 시간이 아닌 늦은 오후임에도 여관 안에는 사람이 많아 시끌벅적했다. 기억과 다르게 시끌벅적한 여관을 걸으며, 기억 속 주인으로 추정되는 중년인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십쇼.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숙박하러 오셨습니까?”

“2명이서 하루 숙박할 생각이다. 마차도 있는데 관리가 가능한가?”

“물론 가능하죠. 방은 2인실로 하겠습니까? 아니면 1인실 2개로 하겠습니까?”

“1인실 2개로 다오. 그리고 식사는 필요할 때 말하도록 하지. 잔돈은 필요 없다.”

그렇게 말하며 은화 하나를 내민다. 중년인은 활짝 웃으며 은화를 소중히 챙겨 들고, 허리를 크게 숙인다.

“감사합니다. 방은 2층 왼쪽에 끝에 있는 마주 보고 있는 방을 쓰시면 됩니다. 혹시 불편한 점이나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나 말해 주십시오.”

“그러도록 하지. 마차는 옆 공터에 세워뒀으니 잘 관리해다오.”

“물론이죠.”

중년인이 내미는 열쇠를 받아들고, 밖에 있는 마차에서 짐을 챙기고 그녀와 함께 여관에 들어간다.

그녀를 데리고 주인장이 말한 2층 왼쪽 끝에 있는 방을 열어본다. 딱 봤을 때 깔끔해 보이는 모습과, 오래된 여관에서 나는 쾌쾌한 냄새가 나지 않음에 만족한다.

“네가 여기 써라. 나는 맞은편 방을 쓸 테니.”

「형제님 방은 상관없는데, 같이 마을 구경해요.」

“난 귀찮으니 혼자서 해라.”

질리도록 보았던 마을을 둘러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저 혼자 다니다가 경비대에 붙잡히면 책임지실 거예요?」

“왜 붙잡히는 걸 상정하냐?”

「전 인간들 법을 잘 모르니까 실수로 사고 칠 수도 있잖아요.」

“알았다 알았어. 따라가줄게.”

‘실수로’를 강조하는 그녀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만약에 그녀의 말대로 사고 쳐서 잡혀가면, 골치 아파질 테니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을 들어준다. 그것이 그리도 기쁜지 그녀는 방방 뛰며 좋아했다.

「그럼 빨리 가요.」

“짐만 던져두고 가자.”

챙겨온 짐을 내 방에 던져놓고, 방이 잠긴 것까지 확인한 후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간다.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가요.」

“그래그래.”

들뜬 그녀를 데리고 마을을 걷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의 묘한 거리를 걸으며, 그녀가 먹고 싶다고 조르는 군것질 거리들을 사먹으며 시간을 보낸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은, 묘하게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쓰라려 온다. 그 이상한 기분에 젖어가며 들뜬 그녀를 따라다닌다.

들떠서 쏘다니는 그녀가 멈춰 서서, 멀리서도 보일 만큼 웅장한 건물을 가리킨다.

「형제님 저 건물은 뭐에요?」

“영주와 가솔들이 머무르는 내성이다.”

그 말에 그녀는 내성을 한 번 더 보고는 다시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보니 형제님은 약혼자한테 안 가보셔도 돼요?」

또 버거운 말을 꺼내온다.

“몰래 왔으니 찾아갈 필요는 없다. 그리고 찾아갈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다.”

그렇게 말을 했을 때, 익숙하고 지금은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렇지, 몰래 찾아왔으니 굳이 찾아올 필요는 없지.”

뒤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놀라서 돌아본다.

“그런데 어떡하나 내가 그대를 찾아버렸군. 가까운 사이가 아닌 약혼자님.”

약간의 장난기와 기쁨이 섞인 목소리와 작은 미소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만나고 그대가 왔는걸 알았으니 나는 그대를 초대하고, 그대는 초대를 받는 게 예의겠지?”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옆에 있는 일행도 같이 가겠나?”

그녀의 말에 레이첼은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레이첼의 의사를 확인한 아이리스는 앞장서서 걸어간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오늘도 제 작품을 봐주신 [독자 닉네임 출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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